이어령, 「일장기 청천백일기」

2009. 5. 14. 10:26책 · 펌글 · 자료/인문 · 철학 · 과학

 

 

말은 무섭다.

문자는 더욱 무섭다.

귀신이 어둠 속에서 통곡할 정도로 무섭다.

같은 사람인데도 ‘한국인’이라고 할 때와

‘한국 사람’이라고 할 때 그 느낌은 달라진다.

한국인 이야기를 ‘한국 국민 이야기’라고 했다면 국민교육헌장과 같은 이야기가 될 것이고,

‘국민’이란 말 대신 ‘시민’이나 ‘민중’이라고 했다면

‘인민’이란 말처럼 혁명의 과격한 이야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국민 해방, 국민 혁명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더 이상 말하지 말자.

아직 나는 초등학교 단계에서 한국인 이야기를 쓰고 있기 때문에

그 눈높이에 맞춰 말과 문자가 얼마나 힘이 센가를 이야기하겠다.

내 바로 앞 세대만 해도 『천자문(千字文)』으로부터 일생을 시작했다.

서당에 들어가는 첫날 배우는 것이 ‘하늘 천 땅 지’다.

서당 개 삼 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춘향전에 나오는 방자도 ‘천지현황(天地玄黃)’의 천자문 첫 구절쯤은 외울 줄 안다.



그런데 국민학교에서 내가 배운 글자는 ‘가나’였다.

“アカイ アカイ ヒノマルノ ハタ(아카이 아카이 히노마루노 하타)”.

‘아카이’는 붉은색이고 ‘히노마루’는 해의 동그란 모양을 이르는 말이라고 했다.

여기까지는 『천자문』과 별로 다를 게 없다.

하늘 대신 해가 있고, 검고 노란색이 붉은색으로 바뀐 정도다.

그런데 마지막 ‘하타’에서 모든 것이 뒤집힌다.

‘하타’는 ‘깃발(旗)’이란 뜻으로

붉은 해는 하늘이 아니라 일장기 위에 그려진 태양이었던 것이다.

붉은 해는 천황가의 원조인 ‘아마데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하늘을 비추는 태양의 여신)’다.

이 땅에서 제일 높은 것이 황제(皇帝)인데,

일본의 천황(天皇)은 하늘까지 다스리는 존재라 하여

 ‘하늘 천(天)’자가 붙어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랴”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 그들은 일장기로 하늘을 가려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단순한 식민지 교육이 아닌 것이다.



‘히노마루노 하타’를 배운 아이들에게 내일 뜨는 아침 해는

천황의 것, ‘아마데라스 오미카미’가 뜨는 것이다.

 

일본(日本)이란 나라 이름부터가 해(日)의 근본(本)에서 온 말이다.

말은 무섭다.

문자는 더 무섭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겠다.

대정 8년에 일본 문부성(文部省)에서 발행된 소학교 국어책 일 권에는 첫 장에 딱 두 글자 “ハナ(꽃)”다.

인류보다 먼저 지구에서 살았던 네안데르탈인들도 죽은 자에게 제물로 바쳤다는 그 꽃이다.

그런데 삽화는 그냥 꽃이 아니라 벚꽃이다.

일본말의 ‘하나(꽃)’는 그냥 꽃이 아니라 벚꽃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부시(武士)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요 사쿠라(벚꽃)가 아니면 꽃이 아니라는,

에도 시대의 관념을 강화해 ‘하나(花)’를 ‘하타(旗)’로 바꿔 놓은 것이

내가 처음 배운 글자요, 그 일장기였던 것이다.

천지현황을 외우는 서당 아이들이 중화(中華)의 이념을 일평생 몸에 달고 다니는 것처럼

‘히노마루노 하타’를 외우는 ‘국민학교’ 아이들은

야마토(大和)의 천황주의에 못 박혀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자문』을 배운 아이들은 파란 하늘을 보고도 하늘을 검다(玄)고 하고,

초록색 초원을 보면서도 땅을 노랗다(黃)고 한다.

그리고 ‘아카이 히노마루(붉은 일장기)’를 배운 아이들은 해를 그리라고 하면 동그라미에 빨간 칠을 한다.

그걸 보면 서양 아이들은 기절을 한다.

예외 없이 주황색을 칠해 오던 아이들이니까.



일장기의 ‘붉은 해’와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의 ‘하얀 해’가 혈전을 벌인 것이 청일전쟁이다.

천지든, 태양이든 제 눈으로 보고도 그것이 딴 색으로 보이는 것은

그게 자연색이 아니라 이념의 색들이었기 때문이다.

천지현황의 검은색과 노란색은 음양오행의 이념에서 나온 색이고,

일장기의 붉은색과 청천백일기의 흰색은 근대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낳은 빛이었다.

여간 주의(注意)하지 않으면 주의(主義)의 이념 색에 가려 자연색을 볼 수 없는 눈뜬 장님이 된다.

금붕어는 노랗지 않은데도 귀한 물고기라는 뜻에서 황금자가 붙었다.

그래서 빨간 붕어를 보고서도 우리는 금붕어라고 한다.

삼학년 때였던가. 유리 조각에 그을음을 묻히고 개기 일식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념의 해가 아닌 물리적인 해를 볼 수 있었다.

조금씩 까맣게 침식되어 가며 죽어가는 태양…….

해가 이데올로기의 깃발 속으로 들어오면 일식처럼 암흑이 되어 죽는다는 슬픈 진리를 보았다.

물론 무의식 속에서 말이다.

- 이어령

  

 

 

 

 

 

 

 

 

 

 

 

 

 

 

 

 

 

 

 

국민학교 2학년이 되던 해였다.

미나미 일본 총독은 황민화(皇民化) 교육을 강화하라는 훈시를 내렸다.

한반도를 중·일 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고쿠고조요’의 강력한 정책이 필요했기 기 때문이다.

일본말로 ‘고쿠고’는 국어(國語), ‘조요’는 상용(常用)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미 ‘국어’는 한국어가 아니라 일본어를 가리키는 말이 된 지 오래였다.

천방지축이던 아이들이 무엇을 알았겠는가.

‘고쿠고조요’의 바람은 오히려 히노마루 교실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선생님은 도장이 찍힌 우표 크기만 한 딱지를 열 장씩 나눠 주시며 말했다.

“오늘부터 고쿠고조요 운동을 실시한다.

‘조센고(한국말)’를 쓰면 무조건 ‘후타(딱지)’라고 말하고 표를 빼앗아라.

표를 많이 빼앗은 사람에겐 토요일마다 상을 주고 잃은 애들은 변소 청소를 한다.

그리고 꼴찌는 ‘노코리벤쿄(방과후 수업)’로 집에 보내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 말이 끝나자 환성과 비명소리가 엇갈렸다.

처음엔 서로 쉽게 빼앗고 쉽게 빼앗겼지만 시간이 갈수록 전쟁은 힘겨워졌다.

조센고를 쓰는 애들은 차차 줄어들고 일본말이 서툰 애들은 아예 입을 다물었다.

대일본 제국이 코흘리개 애들을 상대로 펼친 상호 감시와 당근·채찍의 잔꾀는 들어맞는 듯했다.

이윽고 “야!”라고만 해도 후타를 빼앗겼다. 일본말로는 “오이!”라고 해야 한다.

애들은 똥침을 먹여 “아얏!” 소리를 내게 하고는 후타를 빼앗기도 했다.

혹은 화장실 뒤에 숨어 있다가 소리를 질러 놀란 아이들이 “아이구머니” 소리를 내도록 하는 전략도 썼다.

“아이구머니”는 조센고가 아니라고 하면 선생님에게 심판을 받으러 간다.

“센세이 아이구머니가 니혼고데스카, 조센고 데스카?

(선생님, 아이구머니가 일본말입니까, 한국말입니까?)”

 

아이들은 위급할 때 외치는 소리도 일본말과 한국말이 다르다는 것과

“아이구머니”라는 아무 뜻도 없는 비명 소리가 어머니를 찾는 말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됐다.

‘고쿠고조요’의 역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강요해도 비명 소리까지 일본말로 할 수 없다는 것과

세 살 때 배운 배꼽말은 결코 어떤 힘으로도 지울 수 없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아무리 일본말을 잘해도 양호실에 가서 “배가 쌀쌀 아프다”는 말은

죽었다 깨어도 일본말로는 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닫는다.

그래서 “쌀쌀”이라는 말을 일본말로 “고메고메”라고 한다는 조롱 섞인 농담도 유행했다.

일본말로 쌀(米)은 ‘고메’니까 “쌀쌀 아프다”를 “고메고메 이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후타가 모자라는 아이들은 필통을 열어 연필·삼각자·고무 같은 것과 거래를 했다.

표가 남는 아이들은 어느새 고쿠고조요의 상으로 받는 병뚜껑 같은 별 볼일 없는 배지보다는

몽당연필이 낫다는 실리주의를 알게 된 것이다.

약발이 끊어지자 선생들의 탄압도 거세져 매일 교무실에서 호출이 떨어졌고

당시 시오이(鹽井) 일본 교장은 전교생 앞에서 고쿠고조요 상을 시상하기도 했다.

토요일 방과 후 담임선생은 나와 ‘구마’(‘곰’이란 뜻)를 교실에 남으라고 했다.

담임선생은 파랗게 질려 있던 나에게는 시험지 답안을 꺼내 주고는 채점을 하라고 했고

구마에게는 또 꼴찌를 했으니 선생님이 돌아올 때까지 무릎 꿇고 손을 들고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나보고 잘 감시하라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셨다.

원래 구마의 별명은 ‘곰퉁이’였지만 고쿠고조요가 실시된 뒤부터 별명도 ‘구마(곰)’로 바뀐 것이다.

덩치는 우리 반에서 제일 컸지만 하는 일이 둔해 일본말도 가장 서툴렀다.

아이들은 표를 빼앗으려고 늘 상어 떼처럼 이 아이의 주변을 맴돌았다.

집에는 할아버지만 있어서 빨리 돌아가야 하니까 제발 표를 뺏지 말라고 조센고로 애걸하다가

다시 또 표를 빼앗기는 아이였다.

한참 동안 빈 교실에서 나는 채점을 하고 있었고,

구마는 선생님이 나가셨는데도 두 손을 든 채 천장 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구마야! ‘후타’라고 말하지 않을 테니 손 내리고 한국말을 해도 돼.”

그러자 덩치만큼이나 큰 구마의 눈물방울이 마룻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때 갑자기 어느 교실에선가 풍금 소리가 들려왔다.

“황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집에서는 한국말로 불렀고 학교에서는 일본 가사로 노래했던 바로 도나부강(다뉴브강)의 왈츠 곡이었다.
풍금 소리는 마치 구마의 허파 속에서 울려오는 것처럼 먼 데서 들렸다.

우리는 풍금을 ‘오르강’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일본말도 한국말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풍금 소리는 가사가 없이도 혼자 울릴 수 있으니까 일본말이든 한국말이든 상관할 게 없다.

풍금 소리는 바람 소리처럼 자유롭게 히노마루 교실의 창문을 넘어 긴 복도를 지나

나무들의 긴 그림자가 드리운 텅 빈 교정을 가로질러 날아다닌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구마가 아무리 조센고를 써도 절대로 절대로 ‘후타’란 말을 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맹세했다.

표만 빼앗기지 않는다면 ‘곰’은 다시 우리 학급에서 제일 기운이 센 아이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었다.


당시 총독부 발표에 따르면 ‘고쿠고조요’의 실시로 일반 수강자 수는 21만374명이라고 했다.

그 성과로 간단한 회화 가능자 9만2564명(44%),

가타가나 해득자 15만3572명(73%), 히라가나 해득자 5만8875명이라고 돼 있다.

하지만 제79회 제국의회(1942년 12월)에서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실시한 청문회의 기록은 이렇다.

“고쿠고조요 실시 후 일부 민족적 편견을 지닌 자들은 조선어는 머지않아 이 지상에서 말살될 것이고

4000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민족의 문화는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언사를 농하면서 저항하고 있다.”

우리가 식민지 교실에서 배운 것은 히노마루(일장기)가 아니라

우리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흙으로 된 국토’와

‘언어로 된 국어’의 두 ‘국(國)’자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 이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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