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편지 2

2008. 1. 17. 16:44책 · 펌글 · 자료/문학

 

 

 

 

  

 정끝별 씨에게

 

 

자주 꾸지는 않지만 제게는 평생 동안 반복되는 이상한 꿈이 있습니다.

꿈 내용이 특이한 것도 아니라서 평소에도 잊고 살다가도 뭔가 불편하거나

우울한 마음에 젖게 될라치면 그것이 암시하고 있는 게 뭘까, 하고 곰곰이 헤아리게 됩니다.

꿈은 간단합니다.

세 갈래 도랑이 있고, 이 도랑은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의 논두렁 같기도 한데,

아무튼 그 도랑으로 물이 가늘게 졸졸 흐르고 가끔은 물뱀이 S자를 그리며 헤엄쳐가기도 합니다.

주변에는 물풀이며 강아지풀 같은 마른 잡초들이 우거져 있지요.

도랑을 무심코 굽어보고 있으면 세 갈래 도랑은 갑자기 깊은 우물로 합쳐져 저 자신을 비춥니다.

그러면 늘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다른 표정과 다른 몸짓으로 우물 안쪽에 아른거리죠.

그러면 저는 우물 안의 사람과 제가 일치하는 존재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아니 확인받기 위해

이런저런 자세를 취하며 비교하기도 하고 제 자신이 원래는 저렇게 생겼을 것이라고 속엣변명을

늘어놓기도 하지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아닌 존재일 수도 있다는 근원적 공포가 있나 봅니다.

당신을 처음 본 날짜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처음 보았을 때 그 꿈을 연상시키는 야릇한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일치하고 싶은, 일치하는 점을 발견하고 확인하고 싶은 강한 욕망 때문에,

저는 허름한 호프집 안의 화기애애한 늦가을 분위기에 녹아들어갈 수 없었고

 저 자신을 끝없이 거울에 비춰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힐끗 쳐다보며 왜 아무 말이 없으시냐고 물었을 때,

저는 약간 메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던가요?

말을 할 때마다 자신을 증명해야 할 것 같아 초조해진다고,

그 초조가 제 성벽을 함락시켜 남들이 마구 짓밟고 들어올 것 같다고…¨.

 

그리고 저는 갑자기 많은 술을 먹기 시작했어요.

일치하여 닿을 수 없다면 그건 상대의 냉정한 타자성 탓만은 아닐진대,

이 겁 많은 나의 영혼은 스스로를 달래기 위하여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자의식과 싸우고 있구나!

결국 저는 서서히 무너져갔고 나중엔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가 멀게만 느껴져 무슨 말인가를

크게 소리쳤던 것도 같고, 아니면 당신을 보며 이죽거렸던 것도 같군요.

벌써 한 달이 넘은 기억이라 더욱 아련하기만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온 저 자신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지요.

 저는 너무 많이 들킨 기분에 스스로가 죽도록 미웠고 앞으로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라는

불안으로 술기운은 금방 달아나버렸습니다.

종이를 꺼내 당신에게 사과의 편지를 썼는데 그건 한 달 남짓 제 방에 머물다 폐기되었지요.

제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느낀 애정의 감정도 그렇게 폐기될 것 같았습니다.

 

이 주 전쯤인가요? 저는 혼자서 당신과 함께했던 호프집을 찾았습니다.

그날 분실했던 손목시계를 찾기 위해서였지만 아무튼 제겐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지요.

기억하고 싶은 것들과 잊고 싶은 것들이 혼재한 그 눅눅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가

한없이 쑥스럽고 미안했습니다.

시계는 없었고 대신 제가 흘린 수첩을 발견했습니다.

누군가 주워 보관하고 있었던 것인가 봅니다.

그 수첩은 제게 별 의미 없는 물건입니다.

강의 시간이나 급히 전화번호를 메모하기 위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값싼 수첩이었으니까요.

군데군데 맥주에 젖어 형편없이 일그러져버린 수첩을 넘겨보다가

저는 별안간 감전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당신 이름과 그리고 휘갈겨 쓴 듯한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는데,

분명 그건 제 필체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호프집 구석에 앉아 수첩을 넘기고 또 넘기며 다른 흔적을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당신 이름과 전화번호 그 외에는 없었어요.

분실된 그날의 기억을 찾기 위해 당신이 앉아 있던 의자에도 앉아보고

옆으로 약간 기운 삿갓등을 흔들며 담배도 한 대 피웠습니다.

왜 전화번호가 내 수첩에 적혀 있었던 것일까요?

뭔가 간절한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조바심과 의혹이 증폭되어

당장 전화에 걸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마음은 침울했고 밖으로 나서자 하늘에서는 가는 눈발이 내리기 시작하더군요.

길 위로 쌓이지 않는 눈처럼 제 기억 속에 당신에 관한 어떤 기억도 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저는 광화문 길을 덧없이 걷다가 마음 내키는 대로 향하던 발길을 이대 어름에서 멈췄습니다.

당신이 어디에 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아무 말이나 하면서 제 미안함을 전달하고 싶었지요.

그게 아니라면 기억도 없이 단절되어버린 호프집의 끊어진 필름을 다시 잇고 싶었기에

이대 근처에서 마음의 닻을 내리리라 마음먹었던 것도 같습니다 .

그리고 어느덧 어두워진 하늘에서는 환한 눈송이들이 앞을 다퉈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근데 그 순간 무엇 때문이었는지 제 마음은 알 수 없는 기쁨과 설렘으로 가라앉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엇을까…… 꿈속의 세 갈래 도랑을 건너뛴 것이었을까요?

구차한 멍에를 벗어버리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싶어진 것이었을까요?

미련한 제 머릿속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다 마침내 전화기를 통해 당신의 음성을 다시 듣고야

말았지요.

 

제 자신이 몹시 초라하다고 했던가요?

괜찮으시다면 정식으로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던가요?

당신은 나올 수 없다고 말했고, 호프집에서의 제가 우스�다고 했고 실제로 웃기도 했었습니다.

다급해진 저는 필사적으로 저 자신을 구석구석 뒤져 진실이란 진실은 고스란히 털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대 근처라고 말하기도 했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며 약속 장소로 할 카페를 잡느라 뒷머리가 후끈거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당신과 신촌에서 만났었지요.

겨울의 짧은 밤을 거의 아무 말 없이 걷기도 무척 걸었을 겁니다.

저는 수첩 얘기는 까맣게 잊은 채 문학과 번민과 죽음에 대해,

마야코프스키와 카프카에 대해 정신없이 떠들었습니다.

그것이 침묵으로부터 저를 구해줄 구세주라고 되는 양.

 

늦게 집으로 돌아온 그날부터는 아침마다 당신 생각을 합니다.

아직 살아 있구나, 내 기억이 보존되어 있구나, 너는 나로구나. 하는 안심과 위로 속에

눈을 뜨곤 합니다.

누구나 거만함과 차가움의 위장 속에는 나태하고 유약한 아기를 감추고 있게 마련입니다.

이제 잠에서 막 깨어난 저의 영혼이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저는 아직 모릅니다.

당신에게 호프집에서 무슨 말을 했었는지, 당신이 왜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났는지에 대해서도 저는 모르고, 알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그저 미지의 길을 마악 접어든 신출내기의 심정으로

하염없이 멀기만 하게 보이는 능선, 그 능선 너머로

빛나는 별을 찾아가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1988년 12월 31일 제야에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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