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도 버린 사람들

2007. 8. 9. 23:44책 · 펌글 · 자료/종교

  

神도 버린 사람들                

나렌드라 자다브 지음     

                        

고대의 힌두경전 《마누법전》은 수드라와 불가촉천민이 '개와 당나귀' 이외의 재산을 갖지 못하며 교육을 받을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다음의 인용문처럼 비천한 신분을 망각하고 고매한 진리에 접근하려는 수드라와 불가촉천민들을 차별하는 구체적인 규칙도 언급되었다

      베다를 들으면 귀에 납물을 부을 것이요.
      베다를 암송하면 그 혀를 자를 것이며,
      베다를 기억하면 몸뚱이를 둘로 가를 것이다.

3,500년이 넘은 계급제도는 아직도 인도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다.

도시에서 카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아마도 이런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계급제도는 이젠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과거의 유믈이지요."라고.  

시골에 가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웬걸요. 다른 마을은 어떤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사라진지 오래랍니다."

그럼에도 신문의 가정생활면에는 뿌리 깊은 카스트의 믿음이 맨얼굴을 드러내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1950년 1월 26일, 공화국을 선포하는 인도 헌법은 불가촉천민의 폐지를 선언하였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카스트와 종교를 근거로 차별받지 않는다고 명문화했다.

그리하여 불가촉천민은 그들의 침이 땅을 더럽히지 않도록 목에 걸고 다니던 침을 담는 오지그릇을 내려놓거나

더러운 자신의 발자국을 지우려고 궁둥이에 매달았던 빗자루를 떼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카스트의 차별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지금도 인도인들은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눈 상대의 이름으로 그 사람의 카스트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인도인은 국내에 있건 국외에 있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카스트를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카스트 제도는정교하게 바뀌었으나 그 독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이다.


고대 경전에 언급된 4개 카스트와 그 아래의 아웃카스트들은 오늘날 3,000여개의 집단으로 세분화된다.

힌두들은 저마다의 운명에 따라 카스트가 정해져서 탄생한다고 믿는다.

카스트는 인생의 행로를 결정짓는 요인으로 어디서 물을 마시고 누구와 밥을 먹고, 어떤 사람과 결혼할지를 결정한다.

개인이 학자가 될 것인지 거리의 청소부가 될 것인지도 카스트로 결정되는데, 타고난 카스트는 평생 바꿀 수가 없다.

이런 불평등한 계급제도에서 가장 아래에 자리한 아웃카스트들은 오염원으로 차별을 받았다.

카스트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과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오염이 된다고 접촉할 수 없는 천민들, 곧 불가촉천민으로 불렸다.

그러나 인분을 나르거나 가축의 시체를 치우는 천한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한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신분을 바꿀 능력이 없었다.

카스트를 거부하고 싸울 근거도 없었다.

인간이 신의 섭리에 도전할수 없다는 논리였다.

사회적이고 종교적 신성함에 근거한 그러한 주장은 카스트 제도의 영속성을 구축했다.



카스트 제도에 대한 반대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기원전 5세기경의 석가모니였다.

카스트 제도에 의문을 품은 그는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였다.

 

석가모니가 창시한 불교는 인도에서 융성했고,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 중국과 일본, 동남아의 여러 나라로 세력을 넓혀갔다.

하지만 불교는 인도에서 7세기경에 쇠퇴하였고, 10세기에 이슬람이 출현할 무렵에는 살아 있는 종교로서의 입지를 상실하였다.

그 바람에 카스트제도는 존속되었다.


인도를 통치한 영국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마하르집단이 마을에서 수행하는 의무는 '비천한 마을 하인'의 잡무였다.

마하르는 '마을의 야경꾼이자 보초이며 대소사의 살아 있는 알림판'이었다.

마을의 언쟁을 중재하고 마을을 지키면서 부고를 알리고 다른 마을에 서신을 전달하며 화장에 필요한 장작을 나르고

마을의 담장을 손보는 일이 그들의 일이었다.

지주들을 마을회관으로 불러서 지세를 걷고, 나라의 재물을 운반하는 사람들을 호위하며,

마을의 길을 쓸고, 관리들의 신부름을 하고, 도둑을 쫓고, 가축의 시체를 마을 밖으로 치우는 것도 마하르의 의무였다.


예스카르(yeskar)라고 부르는 이 전통적인 의무는 모든 마하르들이 돌아가며 맡았다.

마하르의 생득권처럼 인식된 이 의무를 수행하는 대가로 마을에 사는 카스트들은 마하르에게 약간의 토지를 불하하고

곡물과 고기, 죽은 가축의 가죽을 얻을 수 있는 일종의 권리를 보장하였다.


마하르가 이 권리를 얻게 된 계기를 알려주는 전설이 있다.

암루트나크라는 잘생긴 마하르 출신의 군인이 베다르 왕국의 술탄을 섬기고 있었는데 술탄의 왕비가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왕비를 구해오겠다고 나선 암루트나크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먼 길을 떠나기 전에 술탄에게 작은 상자 하나를 맡기며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다.
수많은 모험과 난관을 겪고 왕비를 왕국으로 데려오는데 성공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보상이 아니라
 왕의 분노였다.

왕비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 그를 의심하는 왕에게

암루트나크는 빙긋이 웃으며 자신이 맡긴 '작은 상자'를 언급하였다.

상자 속에는 그의 충성심을 증명할 증거물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를 거세하며 용맹을 입증한 암루트나크는 왕에게 자신의 부족인 마하르에게 52가지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암루트나크의 전설은 충섬심과 자기 희생의 본보기로서 마하르 정신의 한 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 권리는 고작해야 구걸할 권리, 즉 죽은 자의 옷을 가질 권리처럼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마하르들은 요새의 보초를 서거나 군대에 지원함으로써 마을의 전통적인 의무에서 벗어날 길을 모색하였다.

영국의 인도 통치가 강화되면서 마하르들은 군대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자아을 성찰할 계기를 얻었다.

군인은 마하르에게 괜찮은 직업이었다.

영국 군대는 인도인 군인과 그 자녀에게 의무교육을 실시했다.

그때까지 여성과 불가촉천민은 교육을 받을 수 없었으나 군대에서 교육을 받은 마하르들은 자아에 눈을 떴고,

종전까지 모르고 살아온 자존심을 갖게 되었다.

자신들을 옭아맨 것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브라만이 덧씌운 오욕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수치를 느낀 그들은 그 멍에를 떨쳐버리기로 결심했다.


1891년 인도의 평등혁명을 이끈 사람이 마하르 집단에서 태어났다.

영국 군대에 설치된 마하르를 위한 학교의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바바사헤브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박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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