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선생님의 연애편지

2007. 12. 28. 13:43책 · 펌글 · 자료/ 인물

 

 

 

화계의 어른 한 분을 만난 자리에서 흥미 있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바보새 함석헌(1901~89) 선생이 생전에 사랑하는 여인에게 보냈던 연애편지 다발이 남아 있다는 소식이었다. 편지들을 소중히 보관하던 한 신학자가 10여 년 전 타계한 이후에는 유족이 맡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석헌이 누구인가.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평화운동가이자 사상가 아닌가.
그의 ‘씨알철학’을 담은 역저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원고가 나온 지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이에게 감명과 용기를 준다. 잡지 『씨알의 소리』는 70년대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보루 역할을 했다. 고결하고 근엄한 함석헌 선생이 연애편지를 썼다니, 더구나 편지가 남아 있다니. 참 신선하게 들렸다. 그러나 함 선생을 기리는 모임에서는 편지 공개를 꺼리고 있다고 한다. 고인에게 누가 될까 봐서라는 것이다. 내게 소식을 전해 준 이는 “연애편지의 존재를 알리는 것 자체가 선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다”고

말했다.

근 번역돼 나온 『D에게 보낸 편지』를 재미있게, 한편으로 숙연한 마음으로 읽었다. 지은이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신좌파 사상가이자 노동이론가·생태주의자였던 앙드레 고르. 불치병에 걸려 23년째 고생하는 아내에게 바친 책이다. 책은 지난해 프랑스에서 출판됐고, 고르는 올해 9월 22일 60년간 생을 함께한 아내와 동반자살했다. 그런데도 책 내용은 매우 솔직·담담하고 때로 유쾌하다. ‘우리는 서두르지 않았지요. 나는 조심스럽게 당신의 옷을 벗겼습니다. 그러자 현실과 상상이 기적처럼 맞아떨어져, 난 살아 있는 밀로의 비너스상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처럼 약간 야한 대목도 있다.  

석헌 선생 같은 대사상가라면 연애편지도 분명 범상치 않을 것이다. 설혹 사내의 춘정(春情) 한 자락이나 달떠 있는 소년 같은 열기가 편지에 투영돼 있다 해도 선생의 인간적 면모를 풍성하게 하면 했지 훼손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 중앙일보 07. 12. 28 -

 

 

 

 

 

 

씨알의 울음 (함석헌 시 1970.4)

 

 

머리 들어 허허 아득한 누리 바라보라. 그 누리 뉘 누리냐? 끝없는 하늘알들 떠도는 것 아니냐?

발디뎌 펀펀 두툼한 땅 굽어보라. 그 땅 뉘 땅이냐? 셈없는 모래들 모여 앉은 것 아니냐?

높은 뫼 넓은 들 덮는 나무숲, 그 사이에 피는 가지가지 꽃, 잎알의 모인 것뿐이오.

긴 내, 깊은 바다 흔드는 은빛 고기, 조개, 그 밑에 떠도는 형형색색의 마름, 살알의 뛰노는 것뿐이다.

여섯 자 큰 사내라 뽐내지 마라. 먹은 밥알 곤두서 있는 너 아니냐?

억만 인구 굳센 나라라 자랑 마라. 눌린 씨알 엎디어서 서는 너 아니냐?

아, 씨알아, 씨의 씨, 알의 알, 생각하는 씨알아, 네 서름이 쌓인 것이 무릇 몇 즈믄이냐?

 

놈들이 속였구나! 말없는 우리라고 속였었구나!

저 놈의 해 제가 태양이라, 저만이 큰 빛이라, 생명의 근원이라, 제가 바로 하나님이라

억만 년 날마다 우릴 속여 왔지, 이 폭군아!

저 년의 달, 태음이라던 계집, 제 집도 아닌 걸, 폭군 턱 밑에 몸 팔아 얻은 부끄런 낯짝 가지고

제가 제법 화복의 권세나 쥔 양 밤마다 우리를 속여 왔지. 이 간악한 계집!

산아! 너는 뭐라고 높은 체, 그래 하느님이 네게 계시다고? 네가 높으냐? 지구의 꽁지 아니냐?

바다야, 이 엉큼한 놈아! 네가 맑다, 그래 용왕이 네 속에 있다? 네가 어찌 맑으냐? 만물의 시궁창 아니냐?

 

이제 날이 밝았다! 과학의 날이.

밤낮이 바뀐다! 사나운 폭군 혼자 빛나던 것, 사실은 참 가리는 어둔 밤이오.

억억 만만의 별이 반짝이는 밤, 그게 도리어 평화의 밝은 대낮이었다.

어느 것이 더 밝으냐. 빛 멀어 가는 태양아! 너만이 해냐?

너는 수없는 해 알 중의 지극히 작은 하나 아니냐? 너도 본디 씨알의 하나였느니라.

과학의 시대는 새알의 시대, 씨알의 아구를 트이어 눈을 뜨고 입 열게 한 것은 참의 과학이었다.

씨알은 과학으로 말한다.

 

성인들아 물어보자. 학자들아 대답하라. 크단 것이 무엇이냐? 씨알 모인 것 아니냐?

물체는 분자 모여, 분자는 원자 모여, 원자는 전자 모여 됐다더라. 子는 알이다.

굳센 힘 어디서 나오느냐? 씨알 씨알 서로 손잡음 아니냐?

힘줄도, 강철도, 바위도 다 뵈지 않은 씨알의 악수다.

빛은 뭐냐?  에너진 뭐냐? 전기는 뭐고 방사선은 뭐냐? 억눌렸던 알의 풀려남 아니냐?

아름다움이 뭐냐? 씨알들의 노는 꼴 아니냐?

씨알이 제멋대로 하면 자유, 씨알이 제자리 ?으면 정의, 씨알이 얼굴 들면 영광, 씨알이 숨쉬면 신비,

산은 무너지고 바다는 마르고 나라도 망하고 문명도 사라지는 날이 와도 씨알은 영원히 있을 것이다.

씨알은 전체요 또 부분이다.

하나님 내 안에 있고 나는 하나님 안에 있다지만, 그저 큰 알 속에 작은 알이 있고 작은 알 속에 큰 알이 있는 것이니라.

아니다. 크고 작음 없이 그저 알일 따름이다.

알에는 안이 밖에 있고 밖이 안에 있다. 밖의 밖이 안이요, 안의 안이 밖이다.

전체, 밖을 그리면 "O"이요, 하나, 속을 그리면 "."이다.

 

정치란 게 무엇이냐? '씨알은 짐승이다' 하는 소리니라.

다스린다는 말부터가 건방지다. 누가 누굴 다스리느냐?

종교란 게 무엇이냐? 정치 아닌 종교 없느니라. 마찬가지다. 다만 여기서는 암호를 쓸 뿐이다.

요사이 종교는 점점 정치화하고 정치는 점점 우상화하지 않더냐?  놈들이 서로 손을 잡고 씨알을 짜먹을 뿐이더라.

보라, 씨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다만 생각하는 마음뿐을 가진 알짜 씨알은 정치에도 종교에도 없지 않더냐?

이 세상이거나 저 세상이거나 이름에 관계없이, 잘살기를 목적하는 정치와 종교, 우리 씨알과는 상관이 없더라.

 

씨알은 울어야 한다! 우리 목이 메고 눈물이 마르고 손발이 맞은 지 무릇 몇천 년이냐?

길게,처량하게, 애절하게, 엄숙하게, 거룩하게 울어야 한다.

울면 목이 열릴 것이요, 눈에서 눈물이 솟을 것이요, 그러면 눈이 밝아 밝히 볼 것이오. 몸이 떨리면 저절로 춤이

나올 것이다.

저놈들이 민요라고! 그게 어찌 우리 노래냐? 그것은 썩어진 사회의 문드러지는 소리다.

그러기에 그것 좋아하는 놈들은 정치쟁이들과 그 종들뿐이지, 정말 땅에 뿌리박는 씨알 거기 하나도 오지 않는다.

그놈들 또 포크 댄스라고! 그게 어찌 씨알의 춤이냐? 그것은 썩어진 종교에 미쳐서 하는 발작이다.

그러기에 그거 좋다는 놈들 정신 빠진 맘몬교도(黃金敎徒)뿐이지 정말 하늘만 믿고 사는 맨 씨알들 하나나 거기

참여하더냐?

부끄럽고 슬퍼 말 못 하겠다.

 

저 신문쟁이들을 몰아내라. 잡지쟁이, 연극쟁이, 라디오, 텔레비쟁이 들을 모두 몰아내라.

그놈들 우리 울음 울어달라고 내세웠더니 도리어 우리 입 틀어막고 우리 눈에 독약 넣고 우리 팔다리에 마취약 놔버렸다.

그놈들 소리 한댔자 사냥꾼의 개처럼 짖고 행동한댔자 개의 꼬리 치듯 할 뿐이다.

쫓아내라. 돌로 부수란 말 아니다. 해가 떠오르면 도깨비가 도망가는 법이다.

우리가 우리 울음을 울어야 한다. 우리가 울면 우리 소리에 깰 것이다.

힘도 우리의 것이요, 지혜도 우리 것이다. 그것은 참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내 가슴 만져 보며 눈 감아 지난 날 생각해 보고 귀 기울여 동터오는 앞날의 소리 들으려 애쓰노라면 울음이 저절로 나와요.

간난을 이기고, 무지를 녹이고, 죄를 씻을 수 있는 큰 울음이 저절로 나와요.

 

얼씨구나, 절씨구나!  얼씨구두 절씨다! 절씨구두 얼씨다!

하늘 알, 땅 알

마음 알, 살 알

얼의 아, 알의 알

얼씨구, 절씨구!

 

 

 

  

 

 

인생은 갈대 

 

 

인생은 연한 갈대 어린 순 날카론 맘 

쓴 바다 노한 물결 단숨에 무찌르자 

끝끝이 뜻 머금고서 다퉈가며 서는 듯 

 

인생은 푸른 갈대 비바람 치는 날에 

자라고 자라잔 뜻 하늘에 달뜻건만 

떠는 잎 한데 얽히어 부르짖어 우는 듯 

 

인생은 누런 갈대 바람에 휘적휘적 

거친 들 저문 날에 외로운 길손 보고 

풀어진 머리 흔들어 가지 마소 하는 듯 

 

인생은 굽은 갈대 망망한 바닷가에 

물소리 들어보다 쓴 거품 마셔보다 

다시금 하늘 우러러 생각하고 서는 듯 

 

인생은 마른 갈대 꽃 지고 잎 내리어  

파린 몸 빈 마음에 찬 물결 밟고 서서 

한 세상 쓰고 단 맛이 다 좋고나 하는 듯 

 

인생은 꺾인 갈대 한 토막 뚫린 피리 

높은 봉 구름 위에 거룩한 숨을 마셔 

처량한 곡조 한 소리 하늘가에 부는 듯 

 

 

  

 

  

 

 

 

진리

 

 

진리는 슬퍼,

파랗게 슬퍼.

 

분주한 일 다 마치고

떠들던 손님 다 보내고

사람이 다 자고

새도 자고 쥐도 죽은 밤

띠끌이 다 가라앉고

구름 다 달아나고

높이 드러나는 파란하늘

깜박깜박하는 파란 별

아아슬하게 올려다볼 때 같이,

진리의 얼굴 마주 대하면

파랗게 슬퍼.

 

진리는 슬퍼,

파랗게 슬퍼.

엉커러진 넝쿨 다 헤치고

우는 시냇물 그대로 남겨두고

험한 골짜기를 건너

위태로운 바위를 더듬어

무르익은 산과를 내버리고

어지러이 피는 꽃밭도 뒤에 두고

나무도 없고 풀도 없는 높은 봉에

하늘 쓰고 돌 위에 앉아

포구의 그림자도 없이

망망하게 열린 파아란 바다

끝없이 일고 꺼지는 파란 물결

아아득하게 바라볼 때 같이,

진리의 눈동자 건너다보면

파랗게 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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