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 10. 13:29ㆍ책 · 펌글 · 자료/ 인물
여류시인ㆍ소설가. 호 탄실(彈實). 평남 평양 출생. 1911년 진명(進明)여학교 졸업. 1917년 최남선이 주재하는 [청춘(靑春)]지의 현상문예에 ‘망양초(望洋草)’란 필명으로 투고한 단편 <의문(疑問)의 소녀>가 3등 입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1921년 [개벽] 12월호에 발표한 <칠면조>라는 서간 형식의 단편소설에서는 여주인공의 번민하는 심리를 섬세하게 추구하는가 하면, 1925년에 발표한 [조선문단] 5월호의 <꿈 묻는 밤>에서는 상당히 지적인 사고(思考) 태도를 의식적으로 취한 경향을 볼 수 있다. 첫째로, 주제부터 아내가 있는 3남매의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꽤 까다로운 심리적 갈등 위에 두었다.
시인으로서의 작품 활동은 1925년 [조선문단]에 발표한 <창궁(蒼穹)>을 절정으로 한다. 1925년에 시집 <생명의 과실(果實)>을 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나, 그 후 도쿄(東京)로 가서 작품도 쓰지 못하고 가난에 시달리다 복잡한 연애사건으로 정신병에 걸려 아오야마 뇌병원에 수용 중 사망했다.
김동인(金東仁)의 소설 <김연실전>의 모델로 알려진 개화기의 신여성이다.
여류시인ㆍ소설가. 필명은 탄실(彈實) 또는 망양초(望洋草). 평안남도 평양 출신. 평양 갑부 김가산 소실의 딸이다. 서울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를 졸업한 뒤, 1917년 잡지 [청춘(靑春)]의 현상소설에 응모한 단편소설 <의심(疑心)의 소녀>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19년 동경유학시절에 전영택(田榮澤)의 소개로 [창조(創造)]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문필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매일신보(每日申報)의 신문기자(1927)를 역임한 바 있고, 한때 영화에도 관여하여 안종화(安鍾和)감독의 <꽃장사> <노래하는 시절> 등에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1939년 이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작품도 발표하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정신병에 걸려 동경 아오야마뇌병원(靑山腦病院)에 수용중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문학 최초의 여류문인으로서 여성해방을 부르짖은 선구자적 구실을 하였으며, 여자주인공의 내면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한 소설들을 많이 남겼다. 개인적인 생활의 고뇌와 사랑의 실패 등으로 인하여 불우한 삶을 살았다.
【경향】그의 시작품은 연정(戀情), 자연의 아름다움, 추억 등을 노래한 것이 주류를 이루며 소설은 인물에 대한 지적인 분석과 심리묘사에 치중하였다.
【시】<의심의 소녀>(1917) <창궁(蒼穹)>(1925) <거룩한 노래> *<고구려 성을 찾아서>(1933) <동경(憧憬)> <옛날의 노래여> <언니 오시는 길에> <석공의 노래> <시로 쓴 반생기>
【시집】<생명의 과실(果實)>(한성도서.유일한 시집.1925)
【단편소설】<의문(疑問)의 소녀>(1917) <칠면조>(1921) <돌아 볼 때>(1924) <탄실이와 주영이>(1924) <꿈 묻는 날 밤>(1925) <손님>(1926) <나는 사랑한다>(1926) <모르는 사람같이>(1929)
<김명순은 문란녀(紊亂女)가 아니다> 동아일보(1981. 10. 9)
개화기 시대 최초 여류시인이며 작가로 그 생활이 상당히 문란했던 것으로 알려진 탄실 김명순의 행적이 그 동안 일반이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밝혀져 문학사가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김명순을 모델로 했으며 우리나라 개화기 시대 최초의 성 묘사 소설로 평가되고 있는 김동인의 <김연실전(金姸實傳)>에서 퇴기(退妓) 첩의 소생인 김명순(소설에서는 김연실)이 15세의 어린 나이에 가정교사에게 거침없이 몸을 맡기고 집에서 거액을 훔쳐 동경 유학을 떠나는 것으로 돼 있으나, 현재 생존해 있는 그의 친동생들이 나타나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드라마 작가 구봉석(具錫逢)이 최근 김명순의 넷째 동생 김기성(金箕成.서울 거주.77)과 셋째 여동생 김영순(金英淳氏.부산 거주,78)을 직접 만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즉, 김명순은 퇴기첩의 외딸이 아니고 1895년 평양의 명문 가정에서 엄연히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 김희경(金羲庚)도 감영의 이속이 아닌 평안남도 참사였으며, 그의 숙부인 김희선(金羲善)도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1920년 상해임시정부 시절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 밑에서 차장을 지내는 등 뼈대있는 집안에서 특히 부모의 귀염을 받고 당당하게 유학을 떠났다는 것으로 김기성옹, 김영순 할머니 등은 김명순이 <김연실전>의 모델이 아니므로 그러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는 것.
이에 대해 문학사를 연구하고 있는 김윤식 교수는 작가 김동인이 여러 차례 글과 좌담회 등을 통해 당시 누구나 알 수 있는 작가이며 신여성을 모델로 했다고 밝혔고 그때 신여성이라면 바로 나혜석(羅惠錫), 김일엽(金一葉), 김명순(金明淳)을 지칭한 것이어서 김연실의 모델이 김명순임이 통념화됐다고 말하고 그의 유족이 나타나 명예 회복을 주장한다면 창작과 모델과의 관계는 다음 연구 과제로 삼더라도 마땅히 그 오해를 풀어 주어야 할 것이라면서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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