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순(金明淳)

2008. 1. 10. 13:29책 · 펌글 · 자료/ 인물

 

  

 

대부분의 예술가는 단순하다.
그들은 자기를 알아주는 땅에서라면 한 잔의 커피와 한 조각의 쿠키에도 행복해지는 존재이다.
2, 30년대에는 유난히 많은 예술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때 이 나라는 아직 그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허다한 빛나는 재능의 예술가들이 다른 나라를 유리하거나 좌절 끝에 죽음의 길로 내몰려졌다.
이 나라는 특히  그 시절 예술가들에게 가혹했다.
그들에게 잘해야 '내놓은 여자'이거나 심지어 '화낭년' 비슷한 편견까지도 가졌다.
자유연애의 불길도 이런 편견에 한몫했다.여류작가 김명순도 그렇게 내몰린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여자 이상(李箱)이라고까지 불렸던 김명순은 예정된 코스처럼 어두운 생의 질곡을 간다.

 

 


 

 
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永訣)할 제
...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해 다구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 다음에 나 같은 사람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 이 사나운 곳아, 이 사나운 곳아  
 
                                     - 김명순 '유언(遺言)' 중에서 -

 

 

시인 김명순은 이렇게 분노했다.

자신을 둘러싼 현실과 그 더움에 대해서. "…서울아 쓰러져라/부모야 형제야 너희가 악마…"(시 「외로움의 변조」중에서)라고 울부짖기도 했다. 그러다 그녀는 카미유 클로델(1864~1943, 로댕의 제자 조수이자 모델이며 연인 사이로 알려졌던 프랑스의 조각가)처럼 도쿄의 한 정신병원에서 홀로 죽어갔다.
김명순. 1920년대의 근대 예술사를 건너올 때면 만나게 되는 발광체. 어떤 소설로도 따라잡기 어렵게 극적인 생애를 살다간 여인이었다. 이 나라 여성사에 기록될 만한 근대적 자각의 한 상징체였지만 갑자기 떠올랐다 흔적없이 사라진 밤하늘 유성처럼 짙은 어둠에 묻혀 버린 이름이었다.
그리하여 "한국 현대소설 사상 최초의 여류작가(김우종)"라거나 "한국 현태시 최초의 여류시인(김해성)"이라는 평가가 무색하게 이제는 희미한 안개 저편으로 사라져버려 혼자 하나 찾을 길이 없다. 어쩌면 그녀가 살아서 이미 "생장(生葬)되는 이 답답함을 어찌하랴"고 했던 것처럼 사후에는 더더욱 그 이름이 가려지고 매장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남성 위주의 한국 근대 문학사 속에서 말이다.
김명순은 '돌 속에 묻혀서' 풍화되어버린 작가였다.생가도 무덤도 한점 혈육도 찾을 수가 없다.
몇 편의 글과 이름 석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짧은 생애 동안 60여 편의 저항적, 실험적인 시에 10여 편의 소설, 그리고 평론과 희곡에 이르기까지 괴력으로 문학의 전 장르를 섭렵해 갔던 여자였다. 작가로서뿐 아니라 신문기자와 배우로까지 눈부시게 활동했다. 웬만한 남성들도 컴플렉스를 가질 만한 재능이었다.
그러나 감수성이 예민하고 다감했던 그녀는 당시 들불처럼 번졌던 '자유연애'에 불나비처럼 허망하게 자신의 몸을 던져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만다. 결혼하지 않은 몸으로 끝내 아비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아이를 낳아 비난의 돌팔매를 맞았고 정신착란으로 부랑자처럼 도시를 헤매다 정신병원에 갇혀 거기서 홀로 죽어간 기구한 삶이었다. 세상은 그녀의 남성편력만을 비난했을 뿐, 그녀를 농락한 남성들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 점에 있어서는 그녀를 모델로 쓴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중학 2학년 때. 유감스럽게도 그 작품을 당시 나돌던 '꿀단지'류의 포르노소설로 잘못 이해했을 만큼 내게 '김연실'이라는 여류 소설가의 남성편락과 성애의 세계는 충격적이었다. 소설은 자유연애를 넘어 여주인공을 프리섹스주의자로 그리고 있었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만으로도 중학생 소년은 얼굴이 붉어지고 숨이 가빠왔다.
김명순은 문학을 통해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여성을 억압하는 온갖 종류의 모순된 구조와 전사처럼 싸운다. 그래서 그녀의 글은 도처에 꽃향기 대신 피냄새가 진동했다. 문학적 침착성이나 완성도 없이 자전적인 애기가 먼저 튀어나오는 겨우도 많았다. 그녀가 자신을 변호하고 옹호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문학밖에 없어서였을 것이다.  
 (글쓴이 모름. 신문기사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김명순(金明淳.1896.1.20∼1951.6.22)
 

   여류시인ㆍ소설가. 호 탄실(彈實). 평남 평양 출생. 1911년 진명(進明)여학교 졸업. 1917년 최남선이 주재하는 [청춘(靑春)]지의 현상문예에 ‘망양초(望洋草)’란 필명으로 투고한 단편 <의문(疑問)의 소녀>가 3등 입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1921년 [개벽] 12월호에 발표한 <칠면조>라는 서간 형식의 단편소설에서는 여주인공의 번민하는 심리를 섬세하게 추구하는가 하면, 1925년에 발표한 [조선문단] 5월호의 <꿈 묻는 밤>에서는 상당히 지적인 사고(思考) 태도를 의식적으로 취한 경향을 볼 수 있다. 첫째로, 주제부터 아내가 있는 3남매의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꽤 까다로운 심리적 갈등 위에 두었다.

  시인으로서의 작품 활동은 1925년 [조선문단]에 발표한 <창궁(蒼穹)>을 절정으로 한다. 1925년에 시집 <생명의 과실(果實)>을 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나, 그 후 도쿄(東京)로 가서 작품도 쓰지 못하고 가난에 시달리다 복잡한 연애사건으로 정신병에 걸려 아오야마 뇌병원에 수용 중 사망했다.

  김동인(金東仁)의 소설 <김연실전>의 모델로 알려진 개화기의 신여성이다.


  여류시인ㆍ소설가. 필명은 탄실(彈實) 또는 망양초(望洋草). 평안남도 평양 출신. 평양 갑부 김가산 소실의 딸이다. 서울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를 졸업한 뒤, 1917년 잡지 [청춘(靑春)]의 현상소설에 응모한 단편소설 <의심(疑心)의 소녀>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19년 동경유학시절에 전영택(田榮澤)의 소개로 [창조(創造)]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문필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매일신보(每日申報)의 신문기자(1927)를 역임한 바 있고, 한때 영화에도 관여하여 안종화(安鍾和)감독의 <꽃장사> <노래하는 시절> 등에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1939년 이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작품도 발표하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정신병에 걸려 동경 아오야마뇌병원(靑山腦病院)에 수용중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문학 최초의 여류문인으로서 여성해방을 부르짖은 선구자적 구실을 하였으며, 여자주인공의 내면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한 소설들을 많이 남겼다. 개인적인 생활의 고뇌와 사랑의 실패 등으로 인하여 불우한 삶을 살았다.

【경향】그의 시작품은 연정(戀情), 자연의 아름다움, 추억 등을 노래한 것이 주류를 이루며 소설은 인물에 대한 지적인 분석과 심리묘사에 치중하였다.

【시】<의심의 소녀>(1917) <창궁(蒼穹)>(1925) <거룩한 노래> *<고구려 성을 찾아서>(1933) <동경(憧憬)> <옛날의 노래여> <언니 오시는 길에> <석공의 노래> <시로 쓴 반생기>

【시집】<생명의 과실(果實)>(한성도서.유일한 시집.1925)

【단편소설】<의문(疑問)의 소녀>(1917) <칠면조>(1921) <돌아 볼 때>(1924) <탄실이와 주영이>(1924) <꿈 묻는 날 밤>(1925) <손님>(1926) <나는 사랑한다>(1926) <모르는 사람같이>(1929)

  

<김명순은 문란녀(紊亂女)가 아니다>  동아일보(1981. 10. 9)

  개화기 시대 최초 여류시인이며 작가로 그 생활이 상당히 문란했던 것으로 알려진 탄실 김명순의 행적이 그 동안 일반이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밝혀져 문학사가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김명순을 모델로 했으며 우리나라 개화기 시대 최초의 성 묘사 소설로 평가되고 있는 김동인의 <김연실전(金姸實傳)>에서 퇴기(退妓) 첩의 소생인 김명순(소설에서는 김연실)이 15세의 어린 나이에 가정교사에게 거침없이 몸을 맡기고 집에서 거액을 훔쳐 동경 유학을 떠나는 것으로 돼 있으나, 현재 생존해 있는 그의 친동생들이 나타나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드라마 작가 구봉석(具錫逢)이 최근 김명순의 넷째 동생 김기성(金箕成.서울 거주.77)과 셋째 여동생 김영순(金英淳氏.부산 거주,78)을 직접 만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즉, 김명순은 퇴기첩의 외딸이 아니고 1895년 평양의 명문 가정에서 엄연히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 김희경(金羲庚)도 감영의 이속이 아닌 평안남도 참사였으며, 그의 숙부인 김희선(金羲善)도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1920년 상해임시정부 시절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 밑에서 차장을 지내는 등 뼈대있는 집안에서 특히 부모의 귀염을 받고 당당하게 유학을 떠났다는 것으로 김기성옹, 김영순 할머니 등은 김명순이 <김연실전>의 모델이 아니므로 그러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는 것.

  이에 대해 문학사를 연구하고 있는 김윤식 교수는 작가 김동인이 여러 차례 글과 좌담회 등을 통해 당시 누구나 알 수 있는 작가이며 신여성을 모델로 했다고 밝혔고 그때 신여성이라면 바로 나혜석(羅惠錫), 김일엽(金一葉), 김명순(金明淳)을 지칭한 것이어서 김연실의 모델이 김명순임이 통념화됐다고 말하고 그의 유족이 나타나 명예 회복을 주장한다면 창작과 모델과의 관계는 다음 연구 과제로 삼더라도 마땅히 그 오해를 풀어 주어야 할 것이라면서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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