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 평전 (1)

2007. 12. 11. 21:35책 · 펌글 · 자료/ 인물

 

 

 

여수 순천 에서 

 

때로 실실 웃어가면서 곤봉으로 머리통과 등줄기, 어깨를 내리쳤고

무릎을 꿇고 쓰러지면 총의 개머리판으로 짓이기곤 했다.

다른 쪽에서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자신의 남편이나 아버지가 맞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녀자들은 옥죄어 비틀어진 듯한 공포와 절망의 표정으로 새하얗게 질린 채

남자들이 참혹하게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를 맞고 총살당하는 광경을 지켜보아야 했다.

적발된 부역자들은 다섯 명씩 철사에 묶여 운동장 가에 파놓은 구덩이 앞에 세워진 후 사살 당했다.

장교들이 확인 사살을 마치면 피 흘리는 시신들은 구덩이에 밀어넣어졌고,

어느 정도 쌓이면 장작과 기름을 넣어 불태워졌다.

학살이 벌어진 넓은 운동장에는 수천 명이 모여 있었으나 들리는 소리는 잇달아 연속되는 총소리와  욕설,

구타하는 퍽퍽 소리와 뼈가 부러지는 소리밖에 없었다.

부역자든 아니든 극도의 공포에 질린 나머지 한마디 항변도 없이 침묵으로 차례를 기다렸다.

살려달라는 울부짖음도, 슬프고 애처로운 애원의 소리도, 신의 구원을 비는 중얼거림조차 없었다.

숨죽여 구경하는 이들은 물론, 무릎이 꿇려진 채 머리 위로 손을 얹고 있다가

시체 구덩이 앞으로 끌려가는 남자들 사이에서 한숨 소리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다.

간혹 부녀자 중에도 부역자로 몰린 이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갓난아이를 데리고 왔다가 반군으로 분류된 젊은 아기엄마도 있었다.

그녀는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철사로 손을 뒤로 묶인 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가슴 바로 아래에서는 갓난아이가 젖을 달라고 울어댔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를 위해 손가락도 까닭할 수 없었다.

아이를 달랠수도, 젖을 먹일 수도 없이 죽음을 앞둔 창백한 표정과 공포에 가득한 눈으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살육장면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런 광경은 주로 외국인 기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라이프』지의 칼 마이던스 기자는 "울 수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표현한다.

  

 

 

 

제주에서 

 

주변 산간 마을 전체를 초토화시키기 시작했다.

오백여명에 불과한 무장반군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해안에서 육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중간산지대 가옥 삼만여동을 모조리 불태우며 주민들을 학살하도록 지시했다.

먼저 주민을 소개시킨 후 불태우면서 소개를 거부하거나 달아나는 이들을 쏘아죽인 곳은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 사전 통보조차 없이 불을 질러버린 후 불길을 피해 몰려나오는 주민들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어

어린애까지 남기없이 사살했다.

거대한 연기와 사람 타는 냄새로 뒤덮여갔다.

학살자들은 여성과 아이들을 죽이는 일에 한결 쾌감을 느끼는 듯했다.

어떤 마을에서는 강제로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먼저 젊은 여자를 벌거벗겨 나무에 매달아 칼로 난자해 죽이는 것을

지켜보도록 한 후 차례로 마을 사람들을 죽였다. 

긴 총검으로 갓난아이 업은 여성을 등 뒤에서 찔러 모자를 함게 죽이기도 하고,

죽은 갓난아이를 총검에 꽂아 들고 자랑스레 돌아다니기도 했다.

어떤 마을에서는 남편이 달아났다는 이유로 출산 직전의 산모를 대검으로 찌르기 시작했는데

고통을 참지 못한 산모가 쓰러진 채  맨손으로 발을 긁으며 기어가자 계속 따라가며 찔러 죽였다.

나중에 시신을 수습한 마을 사람들은 태아가 산도를 따라 절반쯤 나온 채 죽어 있음을 확인한다.

 

 

 

   

   

  

 

 

 

빨치산

 

유격대원들은 인민군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원칙이 인민군의 대원칙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다.

유격대가 그렇듯이 인민군들은 기본적으로 직속부하가 아닌 이상 남녀 구별없이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했다.

주민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강간한 사실이 드러나면 즉시 인민재판을 열어 총살해버리는 것도 같았다.

실제로 전쟁 동안  여러 부대를 겪어본 중부지방의 주민들은 제일 점잖은 군대로 중국 팔로군을 꼽고,

그 다음에 인민군, 미군, 그리고 한국군을 꼽는 이가 많았다.

공산당은 싫어도 군대로는 한국군이 가장 야만적이고 잔인했던 것이다.

 

국군은 여전히 민중들의 원망을 사고 있었다.

일단 촌락에 주둔하게 되면 가축을 잡아 술상을 차리게 하고 동네 여자들을 강간하는 일이 재미처럼 행해졌다.

실제로 국군 지휘관 중에는 이런 게 '군대의 재미' 아니냐고 떠들고 다닌 이도 있었다.

경찰이 친일파 일색인 것은 물론, 군 간부들은 대부분 일본 육사나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이어서

술판이 벌어지면 당연히 군가를 부르는 게 순서처럼 되어 있었다.

부역자를 가린다며 주민들을 모아놓고 폭행하다가 수틀리면 즉석에서 사살하는 일도 여전했다.                                                            

 

(이현상 평전 p 338~339)

 

 

 

 

친일 경찰 출신들이 해방 후 더욱 악랄해진 것은 자신들의 목숨이 걸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제 때는 월급을 받기 위해 일본 순사들의 지시에 따라 고문과 폭력을 행사했다면,

이제는 스스로 좌익의 집권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 되었다.

일제 잔재 청산을 가장 앞장서서 주장하는 좌익의 집권은 곧 자신들의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좌익을 없애려고 앞장서게 된 것이다.

 

우익이라 불려온 이들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위해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애국의 명목으로 내세운 반공은 자신들의 생존이나 이익과 관련이 있었다.

부자들은 물론, 가난한 우익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제하에서 매국노로 일할 때나, 해방 후 반공을 내세워 애국자를 자처할 때나,

그들의 행동은 언제나 권력과 돈에 연결되어 있었다.

반공이 신념일지라도, 그것을 위해 무료로 일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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