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 안도현

2007. 12. 21. 20:53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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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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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샤

 

노란 은행잎이 마치 눈처럼 내리는 늦가을입니다

은행잎들이 사라질 때쯤이면 그 자리에 또 눈이 쌓이는 겨울이 오겠지요

 

나는 나타샤라는 말을 들으면 당신의 이름 뒤쪽으로 왠지 눈이 내리고 있을 것 같고

눈부신 허벅지의 자작나무숲이 펼쳐져 있을 것 같고

당신이 홀연 나타날 것만 같아서 숨이 막힌답니다

 

백석의 시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습니다

나는 백석이라는 사내가 무척 부러웠습니다

나도 백석처럼 가난했으나 내게는 아름다운 나타샤도 당나귀도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백석이 되어보려고 혼자 쓸쓸히 앉아 눈 내리는 북방을 생각하며

밤새워 소주를 퍼마시기도 했지요

그렇게 몇 날 며칠 술을 마셔대도 나타샤 당신은 오지 않더군요

 

내가 당신에 대해 아는 건 당신이 아름답다는 것과

내가 사랑하는 한 시인이 당신을 사랑했다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마음으로 그려볼 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아마 당신은 흰 눈을 닮았을 것 같습니다

손으로 만지거나 가까이 가슴에 품으면 금세 녹아 없어지는

눈물이 되어 녹아버리는 당신은 혹 그런 사람 아닌가요?

 

나타샤

 

한 가지 궁금한게 있습니다

백석은 당신한테 대체 어떤 사내였나요?

 

그는 일본 유학파에다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통했으며

이목구비가 준수한 모던보이였지요

고향에서 세번이나 결혼을 하고도 집을 뛰쳐나와

뭇 여인들을 안고 싶어하던 바람둥이기도 했구요

 

그의 어떤 점이 당신을 홀리게 하던가요?

모르긴 몰라도 백석은 우유부단한 성품에

참으로 이기적인 사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여자 저 여자 다 찝쩍거리면서

서울로 함흥으로 만주로 떠도는 방황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과 짧고도 뜨거운 연애를 했던 자야 여사는

누런 미농지 봉투 속에 든 이 시를 직접 받았다고 했고

1938년 당시 삼천리 잡지 기자였던 소설가 최정희 선생은 

백석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자 이 시를 보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통영 처녀 박경련과의 러브스토리도공개된 적이 있지요

과연 이 중에서 나타샤가 누구일까 하고 세간에는 말이 많았지요

 

나타샤

하지만 당신이 누구인지 내게는 그게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여인에게 이 시를 건네며

사랑의 무기로 활용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나는 이 시에서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는 구절을 좋아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눈이 내린다는 겁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 만나자 어쩌고저쩌고 하는 유행가풍의 사랑법을

일거에 격파하는 솜씨가 멋지지 않습니까?

 

게다가 연인에게 산골로 가서 살자고 하면서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라고 당당하게 말할 줄 아는 사내는 백석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겁니다

누군들 이런 목소리에 빨려들지 않겠는지요

 

나타샤

 

내 말을 서운하게 듣지 마십시오

어쩌면 백석에게는 나타샤가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봤습니다

물론 많은 여자가 그의 주변에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 어떤 남자에게도 나타샤는 없는 게 아닐까요?

없기 때문에 모든 남자들은 나타샤를 그리워하는 게 아닐까요?

     

 

-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구)의 나타샤에게 /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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