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 11. 13:06ㆍ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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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 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 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 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 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 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 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 속 주머니에
넣어 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 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 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 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 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 넣거나
수평선을 잡아 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이 詩가 발표된 당시 정보통신부에서는 장관이하 전 직원들이 아침회의 때마다 낭송하는가 하면,
전 직원이 나서서 바닷가 우체국을 찾아다니는 등 난리법석을 떨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인은 특정 우체국을 염두에 두고 이 詩를 지은 것은 아니라고 전했다. 변산반도 한자락에
위치한 언덕위의 한 집을 놓고 우체국이라는 간판을 달았다는 것이다.
모항으로 가는 길
-안도현-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위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쳐 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쯤 달리면
객지밥 먹다가 석삼 년만에 제 집에 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 거야
먼데서 오신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조용하고 깨끗한 방도 있다고,
바다는 너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대수롭지 않은 듯 한 마디 던지면 돼
모항에 가는 길이라고 말이야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거든
모항 가는 길은 우리들 생이 그래왔듯이
구불구불하지, 이 길은 말하자면
좌편향과 우편향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한데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드는 싸움에 나섰다가 지친 너는,
너는 비록 지쳤으나
승리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지지는 않았지
저 잘난 세상쯤이야 수평선 위에 하늘 한 폭으로 걸어두고
가는 길에 변산 해수욕장이나 채석강 쪽에서 잠시
바람 속에 마음을 말려도 좋을 거야
그러나 지체하지는 말아야 해
모항에 도착하기 전에 풍경에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촌스러우니까
조금만 더 가면 훌륭한 게 나올 거라는
믿기 싫지만, 그래도 던져버릴 수 없는 희망이
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온 것처럼
모항도 그렇게 가는 거야
모항에 도착하면
바다를 껴안고 하룻밤 잘 수 있을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너는 물어오겠지
아니, 몸에다 마음을 비벼 넣어 섞는 그런 것을
꼭 누가 시시콜콜 가르쳐 줘야 아나?
걱정하지마, 모항이 보이는 길 위에 서기만 하면
이미 모항이 네 몸 속에 들어와 있을 테니까
낭만주의
-안도현-
저 변산반도의 사타구니 곰소항에 가면
바다로부터 등 돌린 廢船(폐선)들,
나는 그 낡은 배들이 뭍으로 기어오르고 싶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뭣이? 바다가 지겹다고라?
나는 시집을 내고 받은 印稅(인세)를 모아서
바다에 발 묶인 배 한 척을 샀던 것이다
세상에 아직도 詩를 읽는 사람이 있나, 하고
너는 마치 고장난 엔진처럼 툴툴거리겠지
하지만 말이야, 배를 천천히 뭍으로 올려놓는 순간,
그 어둡던 바다도 배도 단번에 환해졌단다
그때 덩달아 끼룩끼룩 울어 준 것은 갈매기들이었고
너는 이해할 수 없다고, 바다만 바라보겠지
나는 배를 데리고 갈 방도를 생각하느라
20년 동안이나 끙끙대며 시를 쓴 것 같다
배를 분해해서 옮기는 일은 재미가 없을테고
트럭 짐칸에다 배를 통째로 태우는 건 우스꽝스런 짓이지
그래서 밀고 가기로 한 것이다
귓불이 연하고 빨간 아이들이 조기떼처럼 재잘대며 배를 따라 왔던 거야
생각해 봐, 여러 개의 손들이 한꺼번에 배를 민다고 생각해 봐
배도 힘이 났던 거야
국도를 타고 가다가
지치면 미끄러운 보리밭으로도 가고.....
배를 밀고 가는 나를 보았다면, 너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핑계를 대거나, 미친 짓이라며 손가락질했겠지
나는 배를 잠시 멈추고 네 귓구멍이 뻥 뚫리도록 뱃고동을 울려 주었을 거야
詩를 읽는 시간에 자신을 투자할 줄 모르는 인간하고는
놀지 않겠다, 絶交(절교)다, 하고 말이야
나는 장차 배를 밀어 산꼭대기에 올려놓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배를 산꼭대기로 밀고 올라가느냐고?
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詩人이거든
내가 항해사였다면 배를 데리고 수평선을 꼴깍, 넘어갔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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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가리와 꼬막이 운다
- 안도현 -
바다의 입이 강이라는 거 모르나
강의 똥구멍이 바다 쪽으로 나 있다는 거 모르나
입에서 똥구멍까지
왜 막느냐고 왜가리가 운다
꼬들꼬들 말라가며 꼬막이 운다
덤.
서정주 / 선운사 洞口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사하촌에서 동운암으로 가는 다리를 막 건너면 왼편의 호젓한 숲길에 자리한 이 詩碑는 상당히 순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이 詩碑가 살아있는 사람의 詩碑로서는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 당시 나는 알지 못했다. 비석이란 어차피 죽은 사람의 면전에 세워지는 것이 상식이라면 살아있는 미당의 詩碑가 버젓이 세워질 수 있는 현실이 오늘날 미당 개인이, 혹은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한 시대적 아픔의 이정표이기도 하다.
동백여관에서의 하룻밤은 상쾌했다. 신선한 아침공기 속에 절집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서정주가 노래한 '목쉰 육자배기 가락의 막걸리집 여자'가 자신이라고 믿는 옛 귀거래 식당의 이화성(59세) 여사에게서 복분자술과 구증구포한 작설차를 얻어 마셨다. 스무살적 나는 그녀가 운영하는 식당의 칡방에서 며칠 동안 비럭잠을 잔 일이 있다. 그녀가 습작한 글을 읽고 들어주면 밥값조차 해결되는 편안한 구조였다.
- 곽재구 '예술기행' 중에서 -
마쓰이 히데오 !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 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꽈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서정주의 <오장(伍長) 마쓰이 송가(頌歌)>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