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 외

2007. 7. 20. 12:16詩.

 

 

 

 

 

 

 

 

 


해남에서 온 편지


아홉배미 길 질컥질컥해서 오늘도 삭신 쿡쿡 쑤신다.
아가 서울 가는 인편에 쌀 쪼깐 부친다
비민하것냐만 그래도 잘 챙겨묵거라
아이엠 에픈가 뭔가가 징허긴 징헌갑다
느그 오래비도 존화로만 기별 딸랑하고 지난 설에도 안와부럿다
애비가 알믄 배락을 칠 것인디 그 냥반 까무잡잡하던 낯짝도 인자는 가뭇가뭇하다
나도 얼릉 따라 나서야것는디 모진 것이 목숨이라 이도저도 뭇하고 안 그러냐.
쑥 한 바구리 캐 와 따듬다 말고 쏘주 한 잔 혔다
지랄 놈의 농사는 지먼 뭣 하냐
그래도 자석들한테 팥이랑 돈부, 깨, 콩, 고추 보내는 재미였는디
너할코 종신서원이라니 그것은 하느님 하고 갤혼하는 것이라는디
더 살기 팍팍해서 어째야 쓸란가 모르것다
너는 이 에미더러 보고 자퍼도 꾹 전디라고 했는디 달구똥마냥
니 생각 끈하다
복사꽃 저리 환히 핀 것이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

(이지엽) 

 

 

 

 

 

 


 

 

 

사랑방 아주머니

죽으믄 잊혀지까 안 잊혀지는겨
남덜이사 허기 좋은 말로
날이 가고 달이 가믄 잊혀진다 허지만
슬플 때는 슬픈 대로 기쁠 때는 기쁜 대로
생각나는겨
살믄서야 잘 살았던 못 살았던
새끼 낳고 살던 첫사람인디
그게 그리 쉽게 잊혀지는감
나도 서른 둘에 혼자 되야서
오남매 키우느라 안 해본 일 읎어
세상은 달라져서 이전처럼
정절을 쳐주는 사람도 읎지만
바라는 게 있어서 이십 년 홀로 산 건 아녀
남이사 속맴을 어찌 다 알겄는가
내색하지 않고 그냥 사는겨
암 쓸쓸하지. 사는 게 본래 조금은 쓸쓸한 일인겨
그래도 어쩌겄는가. 새끼들 땜시도 살어야지
남들헌티사 잊은 듯 씻은 듯 그렇게 허고
그냥 사는겨
죽은믄 잊혀지까 안 잊혀지는겨.


(도종환)

 

 

 

 

 

 

풍경  -묘비명 -

 

내가 본 묘비명 중에
'먼길 와 주셨는데 일어나지 못해 죄송합니다'라는
유머러스한 어느 문필가의 그것보다
어느 무명인의
'어물어물하다가 이렇게 될줄 알았다'라는
묘비명이 더 가슴을 친다.

속절없이, 가버린
생의 오후 시간표 앞에서
내 무덤을 생각하다
무명인의 묘비명을 생각한다.

창밖 흐르는 풍경을 본다.
눈 맑은 새 한마리 푸른 속으로
정처없이 발을 내딛고.

 - 김성춘 - 

 

 

 

 

 

 



이 보게, 친구!


살아 있는 게 무언가?
숨 한번 들여 마시고
마신 숨 다시 �어내고...
가졌다 버렸다 버렸다 가졌다.
그게 바로 살아 있다는 증표 아니던가?
그러다 어느 한 순간들여 마신 숨 내�지 못하면
그게 바로 죽는 것이지.

 

어느 누가,
그 값을 내라고도 하지 않는
공기 한 모금도
가졌던 것 버릴 줄 모르면
그게 곧 저승 가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 어찌 그렇게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모두 다 내 것인 양
움켜 쥐려고만 하시는가?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저승길 가는 데는
티끌 하나도 못 가지고 가는 법이리니
쓸 만큼 쓰고 남은 것은
버릴 줄도 아시게나

자네가 움켜쥔 게 웬만큼 되거들랑
자네보다 더 아쉬운 사람에게자네 것 좀 나눠주고
그들의 마음 밭에 자네 추억 씨앗 뿌려
사람 사람 마음 속에 향기로운 꽃 피우면
천국이 따로없네, 극락이 따로 없다네.

생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 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스러짐이라.
뜬 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나고 죽고 오고 감이 역시 그와 같다네.

천 가지 계획과 만 가지 생각이
불타는 화로 위의 한 점 눈(雪)이로다
논갈이 소가 물위로 걸어가니
대지와 허공이 갈라 지는구나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오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다
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
죽고 살고 오고 감이 모두 그와 같도다.

 

 ......

 

 

- 서산대사 입적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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