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2002' 한겨레)

2007. 7. 27. 14:00책 · 펌글 · 자료/ 인물

 
 
 
김훈. 지금은 <칼의 노래> 저자인 소설가로 이름 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자로서 언론계에서 널리 이름이 알려진 사람입니다.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로서 그가 쓴 문장은 후배들에게 '전설'처럼 전해오기도 합니다. 아래 글은 김훈이 <시사저널> 편집국장을 마치고 한참 지난 뒤 국장급(?) 기자인데도 불구하고 <한겨레> 사회부 현장기자로 활동했던 시기를 반추하며, 당시 그의 지근거리에 있던 권태호 기자가 '뉴스메일'에 썼던 것입니다. 오래 전 글이지만 남겨둘만한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퍼온이 주>

 

 



김훈이 한겨레를 떠난 이유 2


1편을 띄운 뒤, 김 선배로부터는 아무 연락이 없었습니다. 아마 누군가가 김선배에게 이야기해주지 않는 한 김 선배는 자신과 관련된 뉴스메일이 떴다는 것을 알 수 없겠지만, 알았다 하더라도 별도의 연락을 하진 않았을 겁니다.

오늘 이야기는 지난번보다 좀더 내밀한 부분으로 들어가게 돼 부담이 큽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하는 김 선배에 대한 이야기는 다분히 주관적인 김훈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김훈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거나 정의를 내리려는 의도는 전혀 없음을 밝힙니다. 그런데 1편이 나간 뒤, 엉뚱하게 김훈을 지나치게 칭송하거나 또 그에 대한 반론으로 김 선배를 비판하는 것이 둘다 당황스럽고, 제가 김 선배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듭니다. 오늘 하는 이야기도 김훈 그 자체가 아닌, 제가 겪은 김훈의 일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4. 김훈과 도올 김용옥

지난해 10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김 선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용옥이 곧 문화일보 기자가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기사로 씁시다. 단독인데”
“김용옥이 저보고 문화일보가 발표할 때까진 기다려달라고 하더군요”

김훈과 김용옥은 고려대 동기동창으로 친구 사이입니다. 그리 친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고려대 67학번(66학번인가? 지난번에 김 선배 고등학교를 틀린 이후라 자신이 없네요)에는 당시 3명의 천재가 있었다고 합니다. 김훈, 김용옥, 그리고 또 한 명 있었는데. 그래서 김훈과 김용옥은 대학시절부터 서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10월 어느 날, 김용옥이 김훈에게 전화를 걸어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둘은 만났습니다.

“당신처럼 현장기자가 되려고 한다. 내가 무엇을 하면 되는지 좀 가르쳐달라”
“하지 마라. 이 일은 사람이 할 짓이 못된다”
“이미 문화일보 사장과도 다 이야기가 됐다”
“굳이 하겠다면, ‘보고’를 잘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라”

‘보고를 잘 하라’는 김훈의 한 마디 말에는 기자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김 선배는 이 이야기를 제게 전하면서 “그런데 김용옥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못 알아듣는 것 같더라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정몽헌 회장의 죽음 이후, 기자직을 그만둔 김용옥은 <한겨레>의 김훈과 곧잘 비교되곤 했지만, 김훈과 김용옥은 ‘거리의 컬럼 3매’와 ‘신문 한 면’이라는 둘의 기사 길이가 둘의 차이를 모두 설명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훈은 <한겨레> 조직 안에서 행동하고, 그의 기사도 그 시스템 안에서 작동했습니다. 그러나 김용옥은 제가 보기에는 기존의 시스템을 초월했고(나쁜 말로는 ‘무시’) 특별한 기자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었습니다.

사회부 기동팀(또는 경찰팀)은 보통 수습시절과 그 이후 1~5년차 등 초년 기자들이 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50 넘은 기자가 이 현장으로 돌아온 것은 지금까진 거의 없었습니다. 김훈의 사례는 다른 나이든 기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김용옥도 김훈으로부터 상당한 용기를 받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훈 이후 경향신문, SBS 등에서도 차장급 40대 기자들이 경찰팀 기자를 자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1년이 채 안돼 원대복귀하는 경우가 많아 아직은 실험단계일 뿐 정착단계로 옮아가고 있진 않은 것 같군요. 김 선배가 현장기자로 조금만 더 계셨더라면 상황이 또 어떻게 달라졌을 지 모르는데, 기자로서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5. 김훈이 <한겨레>를 떠난 이유

이제 진짜 본론 중의 본론이군요.

아래 기사는 김 선배가 <한겨레>에서 마지막으로 쓴 기사입니다. 2002년 12월20일 대선 직후였습니다.(날짜상으로는 2003년 1월1일자의 ‘세습사회 르포’ 기사가 더 나중이지만, 이는 대선 이전에 마감을 한 것이어서 기사를 쓴 시점으로는 아래 기사가 가장 마지막입니다)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는 지역보다는 세대별로 갈라섰다. 조직되지 않고 동원되지 않은 젊은이들의 힘이 젊은 정치권력의 시대를 열었다. 국민통합21 정몽준 대표가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18일 밤,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진 젊은 세대들의 민첩하고도 전략적인 대응에 기성세대들은 경악했다. 이회창 후보를 찍었다는 엘지그룹 오정환(59) 전무는 “한마디로 무서웠다. 쇠뭉치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20일 아침, 오 전무가 주재한 회사 간부회의 분위기는 무겁고 침울했다. “나이먹은 간부들은 모두 멍한 표정이었다. 간부들은 리더십의 문제를 심각히 고민했다. 한평생 먹고사는 일과 회사수익 올리는 걱정만 하다가 미래의 가치를 내다보지 못한 죄도 있다”고 그는 말했다.

소설가 이문열(56)씨는 19일 밤 개표방송을 보다가 술을 마시고 대취했다. “선동성에 노출된 젊은이가 다수가 되었다. 빨간 옷을 입고 다수의 힘으로 광장을 점거하는 젊은이들을 신뢰할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20일 아침까지 그는 술이 덜 깨어 있었다. 전직 차관인 김시복(59)씨는 “젊은 세대가 대통령을 만들었다고 해서 정치세력화한다면 기성세대와 마찰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말했다.

익명을 원한 대기업 중역 김아무개(57)씨는 “젊은이들의 힘이 특정정치세력화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순수한 변혁의 힘이기를 바란다. 통일 원동력이 된 경제력을 건설해온 세대의 고통을 부정하지 말아달라. 무섭고 두렵다”고 말했다.

월간지 〈바자〉기자 김경숙(32)씨는 개혁국민정당 당원이다. 19일 밤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수많은 젊은이와 함께 만세를 불렀다. 카페마다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맥주잔을 쳐들며 환호를 질렀다.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는 젊은이들도 함께 함성을 질렀다. “우리는 정치적 이익을 바라지 않고서도 우리 후보를 위해 열렬히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청춘이다. 우리는 조직이 아니지만 필요할 때는 조직처럼 움직인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이 우리의 무기다”라고 김씨는 말했다.

소설가 조정래(61)씨도 개표방송을 보며 술을 마셨다. “이것은 혁명이다. 50대와 60대들은 근대화라는 업적을 민주화, 합리화로까지는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 결과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실패로 나타났다. 젊은 세대들은 정치에 대한 환멸을 희망으로 전환시켰다”고 말했다.

얼마 전 문화일보사에 입사한 도올 김용옥(55) 기자는 전국의 유세 현장과 투·개표 현장, 정당 상황실을 며칠째 쫓아다녔다. “미국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세대가 시대의 전면으로 등장했다. 기성세대들은 이 젊은이들의 힘을 그저 막연히 느끼고 있었다. 이 힘이 현실로 나타나자 기성세대는 충격을 받고 있다. 이회창은 일방적이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젊은이들과 쌍방 커뮤니케이션을 했다. 이것이 노무현의 승인이다”라고 김 기자는 말했다.

19일 밤, 광화문에서 고려대생들이 20~30명씩 모여 건배를 하고 있었다. 고려대 학생기자 윤수현(23·경제학과 3)씨는 “이회창이 이겼다면 어른들은 이런 자리를 만들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배인 임춘택(32·고대신문 간사)씨는 “월드컵, 소파개정 투쟁 열기 속에서 젊은이들은 개인의 판단으로 참가했다. 친구들끼리 가족들끼리 광장으로 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희망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 ‘희망’에 대해 50대는 여전히 의구심을 제기한다. 젊은 대통령의 ‘희망’ 앞에서 50대의 보통 사람들은 주눅들고 불안해하고 있다. 늙음은 다만 낡음인 것인가, 고생하며 살아온 세월은 단지 수구 냉전의 고착화에 기여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 앞에 처한 50대들의 자괴감이었다. 서울대 황상익(50·전국교수노조 위원장) 교수는 “기성세대는 이제 행동이나 판단에 있어서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역할분담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20일 낮, 서울 도심 식당에서 젊은이들의 식탁은 ‘노무현’으로 시끌벅적했고, 50대들은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이 기사는 원래 김 선배가 쓰겠다고 한 기사는 아니었습니다. 대선이 세대간 대결처럼 치러지면서 대선 발표 직후, 50대 이후 장년들의 상실감이 상당했습니다. 이를 기사로 보여줘야할 것 같아 김 선배에게 대선 다음날인 20일(금) 아침 전화를 걸어 이런 내용의 기사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 대선결과에 대해 50대 이후 세대들이 충격을 받은 것 같더라구요”
“저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때만 해도 저는 이말에 그냥 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김 선배가 받은 그 ‘충격’이 바로 김 선배가 <한겨레>를 떠난 이유입니다.

위 기사를 마감한 그날 저녁 김 선배가 제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가 컬럼을 한 번 써도 괜찮겠습니까?”
“예, 좋습니다. 어떤 내용이지요?”
“저는 노무현을 찍지 않았습니다. 이회창을 찍었습니다”
“그러셨나요?”
“제가 왜 노무현을 찍지 않았는지, 왜 이회창을 찍었는지를 <한겨레> 지면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김 선배가 컬럼을 쓰겠다고 한 적은 그 때까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김 선배가 이회창을 찍었다는 것도 조금 놀랐지만(김 선배는 대선 전 이회창 지지 발언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평소에도 한나라당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 내용을 공적인 자리를 통해 밝히겠다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기도 했고, 우려되기도 했습니다.

“김 선배가 쓰시겠다면 제가 뭐라고 할 말은 없습니다. 또 <한겨레> 지면에 그런 내용의 컬럼이 나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김 선배 개인한테 반론과 비난이 쏟아질 지도 모를텐데 괜찮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저는 이번 대선과정에서 노무현 후보 유세를 주로 따라다녔습니다.(김 선배는 노무현-정몽준이 서로 갈라서게 된 문제의 명동 유세장에도 그 한복판에서 그 과정을 모두 지켜봤습니다) 제가 그 과정에서 느낀 점 등을 그대로 써볼까 합니다. 후보와 지지자들이 보인 행태 등”

저는 그 컬럼을 쓴 이후 김 선배가 겪을 지도 모를 마음고생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김 선배의 컬럼을 지면에 게재하고 싶다는 냉혹한 욕심이 더 컸습니다.

이후 부장에게 보고해 이 내용은 국장에게까지 보고됐고, 지면확보 등 일단 회사쪽 준비는 모두 끝난 상태였습니다. 김 선배가 컬럼을 보내오면 월요일 12월23일치에 쓰기로 돼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인 12월21일(토) 낮, 김 선배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컬럼을 쓰긴 다 썼습니다. 그런데 제가 읽어보니 도저히 못 내보낼 것 같습니다. 아마도 컬럼이 나가면 예전에 제가 겪었던 비난여론이 또 한 번 몰아닥칠 것 같습니다. 제가 도저히 그것을 견뎌낼 자신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컬럼은 없었던 일로 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얼마 뒤, 그해가 가기 직전 종로1진 기자가 제게 사표 한 장을 쑥 내밀었습니다.

“김 선배가 캡 갔다주라고 해서요”

원고지 한 장에 쓴 사표 내용의 일부입니다.

“저는 <한겨레>의 진보성 속에 저의 보수성을 펴는, 나름대로 제 역할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실패했습니다. 늙음은 낡음인 것 같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 기사를 쓸 자신이 없습니다. 이제 조용히 집에서 책이나 읽으며 여생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왜 그만둔다고 하시대?”
“이번 대선결과에 좀 충격을 받으셨나봐요”

그때 저는 순간적으로 ‘차라리 이회창이 됐더라면’ 하는 바람이 불쑥 솟아나기도 했습니다.

“대선결과?”
“단순히 결과가 아니라 이제 자신 세대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하시나봐요. 그런데 (김 선배 특유의) 횡설수설해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요. 몸도 좀 안 좋으신 것 같고”

김 선배 기사가 지면에서 보이지 않으면서 회사에도 소문이 퍼졌습니다. 사회부 바깥에서는 당시 기자생활을 시작해 한 면씩 도배를 하던 도올 김용옥을 거론하며 “혹 대접이 소홀해서 그랬던건가?” “섭섭한 게 있었나?” “이제 다른 역할을 맡겨야 하는거 아냐?” 등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김 선배가 <한겨레>를 떠나는 이유를 김 선배가 말하는 이유로는 이해가 잘 안됐기 때문입니다. 김 선배는 애초 그해 가을 자신의 집을 일산에서 회사 근처로 옮기려고도 했습니다. 일산에서 출퇴근하기가 너무 멀어 <한겨레> 바로 옆 삼성아파트로 이사하기 위해 형수가 근처 복덕방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니 그때만해도 김 선배는 <한겨레>에 꽤 오랫동안 머물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겨레>는 김 선배를 붙잡고 싶어했습니다. 사회부장, 전 사회부장(김훈 선배를 데려온), 심지어 사장까지 김 선배를 만나 설득했습니다. 김 선배와 친한 한겨레 인사가 김 선배와 밤새 술을 마시며 김 선배를 붙잡기도 했습니다.

사회부장과 김 선배가 만난 자리에선 저도 함께 있었는데 “지금 그만둔다고 곧바로 결정하시지 마시고, 조금 쉬시면서 머리도 좀 식히시다가 그래도 정 생각이 바뀌지 않으시면 그때 결정해도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구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김 선배는 막무가내였고, 또 횡설수설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마르크스를 읽을 때, 노자를 읽었다”
“조직이 중요하다”
“더 이상 나는 이 세상에서 존재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그냥 조용히 있어야 할 것 같다”
“세상에 나서는 게 무섭다” 등등 서로 연결되지 않는 말들을 마구 내뱉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감기에 걸렸다며 베이지색 바라리 코트 깃을 세우고(전혀 멋있지 않았습니다. 상당히 촌스러운 복장이었습니다) 찾아온 김 선배는 쓰지 않은 컴퓨터를 반납하고 <한겨레>를 떠났습니다.

김 선배가 한겨레를 떠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이 무렵 <한겨레>에서는 홍세화 선배 등 한겨레 기자 중 몇 명의 민주노동당 가입과 관련해 논쟁이 오갔습니다. 언론인의 정당가입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 논란에도 세대차를 보여줬는데, 젊은 기자들은 ‘그건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쪽이었고, 차장급을 기준으로 그 이상의 기자들은 ‘안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김 선배도 역시 ‘안 된다’ 쪽이었습니다.

김 선배는 이런 <한겨레> 내부 논란 진행과정도 본인의 마음에는 좀 안들었던 것 같습니다. 논리적인 설명 없이 그냥 “안된다”는 말만 계속 되풀이하곤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입니다. 여러분들은 김훈이 왜 한겨레를 떠났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사족) 김훈과 홍세화는 참 사람이 이렇게도 다를 수 있구나 할 수 있을 정도로 극과 극입니다. 김 선배는 겉으론 강하지만 속은 너무도 부드러운 아이 같은 감성을 지닌 사람이고, 홍 선배는 겉으로는 한없이 부드럽고 인자하지만, 속은 강철같아서 이세상 사람들이 다 변할 때까진 전혀 흔들리지 않을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김 선배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귀엽고, 홍 선배는 무섭습니다.

6. 김훈과 <칼의 노래>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칼의 노래>의 첫 문장입니다.

김훈이 왜 <한겨레>를 떠났는지 제대로 설명도, 해석도 못한 채 용두사미처럼 뚝 끊어버려 혹 실망감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는 분들이 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부터의 이야기는 그 배신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기 위한 에필로그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김 선배의 사표는 1월20일 수리됐고, 이후 저는 김 선배 없는 삶에 익숙해져 갔습니다. 대구지하철 때는 김 선배의 부재가 너무 크게 느껴져 김 선배에게 외부기자 형태로 현장 르포 기사를 써줄 것을 부탁하려 했으나, 김 선배를 이용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관둔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 5월 들어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겪으면서 그때 무슨 생각이 들어서였는지 서점에 나가 <칼의 노래>를 빼들었습니다.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저는 많은 것을 정리하며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칼의 노래> 속에서 마치 고문서를 통해 수수께끼를 풀 어내는 것처럼 세상에 대한 김 선배의 고민과 번뇌를 조금이나마, 정말 미약하나마 어림짐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칼의 노래>는 외로웠던 400년 전 사나이 이순신의 가장 힘들었던 말년을 그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순신의 얼굴에 자꾸만 김훈의 얼굴이 오버랩 되는 것을 떨치기 힘들었고, 그리고 저의 얼굴 반쪽도 자꾸 끼어들려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칼의 노래>에 대해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 것도 아마도 이런 감정이입 때문이었을 겁니다.

<칼의 노래>는 이순신의 일대기 중 백의종군 직후부터 다루고 있습니다. 한산대첩에서 인생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뒀지만(임진왜란에서 두번째로 큰 승리, 가장 큰 승리는 권율의 행주대첩-권율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나중에 김훈이 아니라 권율과 이순신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칼의 노래>는 이순신의 영광은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극심한 고통과 번민이 죽음 직전까지 계속되는 그때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 백의종군한 이순신이 앞바다를 바라보며 든 생각이라고 <칼의 노래> 첫 문장이 말하고 있습니다. 김훈 선배가 이 책을 쓴 2001년은 1편에서 말한 것처럼 쾌도난담 사건 이후 집에서 홀로 있을 때였습니다. 김훈은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그는 나름대로 이순신처럼 ‘부름’을 기다렸고, 그리고 그 ‘부름’은 자신이 사모하는 이순신처럼 ‘백의종군’의 길이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이순신을 닮고 싶어했던 김 선배가 현장기자를 자신의 ‘백의종군’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지금 나에게는 적의(敵意)만 있고 함대는 없다”, “내 백의종군의 시작이었다”
- 굳이 설명을 않겠습니다.

“ 끝없는 전쟁은 결국은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
- <칼의 노래>를 관통하는 사상은 허무주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허무한 세상 속에서 이순신 장군은 떠나지 않고 끝까지 그 바다에 머물면서 그 ‘무의미한 장난’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니 김훈도 그 ‘무의미한 장난’을 계속하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 방책없는 세상에서 살아 있으라고 칼은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물위에 뜬 수군”
-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의 말이기도 하지만, 김훈 스스로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는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세상과의 싸움을, 어쩌면 세월과의 싸움을 많이 힘들어했고, 그리고 결국에는 그가 패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미리 감지한 듯 합니다. 또 자신에 대한 연민의 대목도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이 세상과의 싸움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명량 어귀에서 나는 외가닥 일자진으로 물결을 버텨가며 기다렸다.”
“처음 보는 바다는 외면하고 싶도록 두려웠다. 나는 바다와 맞선다는 일을 상상할 수 없었고,”
-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마지막 목숨을 다해 싸운 것과 달리 어쨌든 김훈은 현실에서 스스로 떠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칼의 노래>에서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 하나쯤은 만들어 놓았습니다.

(왜적 포로들을 처형하면서 그 왜적 한 명 한 명을 인간으로 바라보면서 그 하나하나의 죽음을 마음에 걸려하는 이순신을 묘사하며)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때, 나는 칼을 버리고 저 병신년 이후의 곽재우처럼 안개 내린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개울물을 퍼먹는 신선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 갈래는 다름니다만, 김훈은 어쨌든 무너졌고,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그는 산속으로 숨어들어가려 한 것 같습니다. 애초부터 그는 ‘백의종군’이 아닌, ‘개울물을 퍼먹는 신선’이 되려는 욕망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다만 의지로서 그 고통스런 ‘백의종군’을 하긴 했으나, 이순신과 달리 더 이상 세상이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자신도 세상에 맞서 싸울 힘이 없다고 판단되자 그 스스로 물러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김훈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마치 김훈이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으로’ 이런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느껴집니다. 김훈은 이순신을 흠모하며 그를 닮고 싶어했지만, 결코 이순신의 길을 따라가거나 그를 닮을 수 없는, 천성적으로 다른 사람입니다. 그는 이순신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 안위(安衞, 명량해전 초기 바다 위에 뜬 새카만 적을 보고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려했던 이순신의 부하장수)에 머물고 말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김훈에 대한 한가닥 기대는 남아 있습니다. 안위는 명량해전 당시 ‘내 손에 죽고 싶으냐, 왜적 손에 죽고 싶으냐’는 이순신의 호통에 다시 적진 가운데로 뛰어들어가 싸웁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주 나중에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나이 74살의 노구로 임금을 구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말을 타고 남한산성으로 진군합니다. 저는 김훈이 이순신은 되지 못할 망정, 안위라도 되기를 바랍니다.

아마 그가 <한겨레>를 그만둔 뒤에도 완전히 글에서 손을 떼지 않고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에세이집을 펴낸 것은 아마도 ‘백의종군’과 ‘신선’ 그 중간 어딘가에서 머물며 새로운 싸움을 시작하려 하는 건 아닌지 기대해봅니다.

모르겠습니다. 김훈은 어쩌면 세상과의 싸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에세이집 제목처럼 정말 ‘밥벌이’ 때문에 계속 글을 쓰려 하는 건지도. 김 선배가 입버릇처럼 밝히는 꿈이 ‘음풍농월’이었으니까요.

7. 김훈의 요즘

김 선배가 <한겨레>를 떠난 지 저는 김 선배를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아직 없습니다. 제가 캡 생활을 할 때는 마음도 시간도 여유가 없기도 했거니와 뭔가 김 선배에 대해 정리를 하고 싶었기에 제 스스로도 적극적으로 김 선배를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뉴스메일에 자주 나오는 종로1진 그 기자는 김 선배와 몇 차례 만났고, 그를 통해 김 선배의 요즘을 가끔 전해 듣습니다. 김 선배는 그의 소망처럼 나름대로 ‘음풍농월’ 하고 있습니다. 김 선배는 유일한 낙을 “집 앞에 고등학교가 하나 있다. 오후 늦게 학교가 파하고 아이들이 쏟아져 나올 때 그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그 파릇파릇한 생명력을 부러워한 탓이겠지요.

제 핸드폰 8번을 꾹 누르면 액정에 ‘김훈’이라고 뜨며 김 선배의 핸드폰으로 연결됩니다. 이번 주말쯤에는 김 선배를 한 번 찾아뵙고, 허락없이 김 선배 이야기를 쓴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할까 합니다.

김 선배는 요즘 이순신을 떠나 안중근에 푹 빠져 있습니다. 역시 기자 출신답게 안중근을 이야기하면서도 이토 히로부미가 애초 역을 떠나 몇 번째 역에서 내렸고, 그때 객차 수는 몇 개였는데 이토 히로부미는 앞에서 몇 번째 객차에서 내렸고, 그때 역사에서 안중근의 위치는 어디에 있었고 등 세세한 팩트 하나하나까지, 안중근의 미세한 숨결까지 읊고 있습니다. ‘안중근’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그래, 맞아. 김 선배가 흠모할만한 또다른 사람, 이순신을 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번득 들었습니다. 아마 내년쯤에는 소설 <총의 노래>가 나올 지도 모르겠습니다.

2003. 9. 21(일)
권 태 호 올림
ho@hani.co.kr

김 선배 이야기 뒤에 제 이야기를 붙이는 게 죄송스럽습니다. <칼의 노래>를 읽고 저도 김 선배만큼은 아니어도 이순신 장군에 빠져들었습니다. 한없이 강하면서도 한없이 부드러운 이순신 장군의 그 맑은 결기와 부하 사랑하는 마음 등을 보며 많이많이 자책했었고,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이순신 장군을 더 알고 싶어 <난중일기>를 읽었고, 여름휴가도 남해로 가 장군이 스러진 노량 앞바다에서 그 빈 바다를 바라보며 장군을 그렸습니다.

저는 조직의 중간관리자(기동팀원과 사회부장 사이에 있는 캡(기동취재팀장)을 중간관리자라고 볼 때)로서 이순신 장군을 보며 느낀 많은 것 가운데, 캡 생활을 하며 저도 모르게 접한 3가지만 나누고자 합니다. 이 글을 보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많은 중간관리자가 있으리라 생각되니까요.


1) 작은 실수는 혹독하게, 큰 실수는 관대하게

사소한 실수는 본인의 생각보다 더 가혹하게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작은’ 실수가 개선되지 않은 채 점점 더 커지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알게모르게 ‘뭐, 이 정도는 괜찮나보다’라는 대충대충 하려는 마음을 키워줍니다. 본인을 위해서도 조직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죠.

그러나 큰 실수를 저질렀을 때는 오히려 감싸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큰 실수는 이미 본인이 더 자신의 잘못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기에 이때 이를 자꾸 지적하면 사람이 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큰 실수는 이미 개인차원의 문제를 떠난 경우가 많아 함께 힘을 합쳐 공동대처하지 않으면 안되는 터라 잘잘못에 대한 지적은 사후처리가 다 끝난 다음에 차분하게 감정의 지방기를 완전히 빼고서 순전히 재발방지 차원에서 복기를 해도 늦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순신의 경우, 본인은 물론 부하들에 대해서도 단 한 치의 어긋남도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잘못을 저지를 경우, 가차없이 목을 벤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난중일기>에 보면, 그는 비가 오면 자신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진채에 왔다간 부하가 배에서 앉을 자리가 없어 고생할 것을 염려하는 자상한 아비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저도 캡을 하면서 보스(Boss)나 경영자(CEO)가 아닌 ‘아비’가 되려 했으나, 저의 모자란 인격이 ‘아비’의 사랑보다는 ‘보스’의 권한과 ‘경영자’의 효율성에 더 끌렸음을 고백합니다.

2) 권한과 책임의 일치

우리 사회에서 가장 잘 안 되는 것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전시체제하의 삼도수군통제사로서 부하직원은 물론 주민들에 대한 생사여탈권까지 엄청난 권한을 갖고 있었지만 조선의 바다를 지켜야 하는 것은 물론 백성들의 살림살이까지 껴안아야 하는 엄청난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칼의 노래>에도 부하장수와 이순신과의 대화에서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나으리의 몸이 수군의 몸입니다”
“그렇지 않다. 수군의 몸이 나의 몸이다”

권한없는 책임이란 질 필요가 없고, 책임없는 권한은 인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캡으로서 제가 정리한 권한과 책임은 ‘기사로 인해 칭찬을 듣게 되면 모두 기사를 쓴 기자 탓, 만일 그 기사로 인해 문제가 생기면 모두 그 기사를 넘긴 캡 탓’ 입니다.

어릴 때,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때였습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저의 고모는 책상 위에 저를 올려놓고 뛰어내리면 제 몸을 받아주곤 했습니다. 저는 허공중에 붕 날아올랐을 때의 그 기분이 너무 좋아 몇 번이고 책상 위로 올라가며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하고 고모를 졸라댔습니다. 공중으로 뛰어오를 때 저는 고모가 저의 겨드랑이를 받치면서 저를 안전하게 붙잡아주리라는 것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간관리자는 저의 고모처럼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조카를 충분히 떠받쳐줄만한 능력이 있어야 하고, 조카의 머리털 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하겠다는 애정과 책임이 함께 있어야 하는. 그러나 다 끝난 지금 돌아보면 저는 여러 차례 나를 믿고 허공 중에 뛰어오른 팀원들을 제대로 부여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면서 같이 나뒹군 적이 한 두번이 아닌 것 같습니다. 게다가 팀원들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채려 하거나, 내가 안아야 할 ‘질책’을 슬그머니 팀원들에게 돌리려 하려 했던 적이 적지 않았음을 이 자리를 빌어 참회합니다.

3) 개인은 조직을, 조직은 개인을

<칼의 노래>, 그리고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나라에 충성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여러 차례 이순신을 배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칩니다. 이순신은 자신이 그토록 헌신하는 ‘나라’가 자신을 결코 지켜주지 않고 자신이 ‘나라’를 위하는만큼 ‘나라’가 자신을 위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개인과 조직과의 엄중한 논리를 실천한 장군의 그 결기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우리 주변에서 너무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개인’과 ‘조직’이 서로 갈등하며 길항하는 장면들입니다. 서로에 대한 책임은 전혀 지지않고 서로 권리만을 주장하는. 저는 조직에 속한 ‘개인’은 ‘조직’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 ‘조직’이 ‘개인’을 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조직’을 떠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물론 조직에 대해 자신의 요구는 당당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이조시대는 아니니까요) 저는 이게 ‘조직’에 몸담은 ‘조직원’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조직’은 그 조직 속에 속한 ‘개인’을 한없이 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개인’이 한없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이처럼 ‘개인’과 ‘조직’이 서로를 조건없이 위할 때 그 ‘조직’과 ‘개인’은 함께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이 ‘개인’만을 생각하고, ‘조직’이 ‘조직’만을 생각할 때 그 ‘조직’은 서서히 망해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저의 이 생각이 순진무구라고 한다면 아무 할 말이 없고, ‘조직이 원하면 뭐든지 한다’는 말이 말처럼 쉬운 것 같지도 않더군요.

이 글을 끝으로 ‘기동취재팀 25시’에서는 떠납니다. 다음부터는 뉴스메일 ‘권태호의 ~ ’(현재의 ‘자동차랑 광고랑’이란 이름을 바꾸려 합니다)에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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