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여관 ... 이응로화백

2007. 10. 8. 11:22책 · 펌글 · 자료/ 인물

 

 

#1.  수덕사앞 수덕여관의 야사
 
                                                           글쓴이 :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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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변에서 자주들리는곳중의 하나가 수덕사다. 

수덕사는 700여년전 고려시대에 건립된 대웅전의 위용은 역사적인 가치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우리나라의 목조건축물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수덕사 일주문 입구에 있는 수덕여관에 대하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수덕여관은 90여년전 누가 지었는지는 알수가 없으나 1930년대 일본으로 유학하여 그림을 공부하고 돌아와 국내에서 변호사 김우영과 혼인하였다가 유럽여행중에 최린과의 염문때문에 이혼당하고 1937년부터 1943년간 수덕여관에 머물던 나혜석을 이응로화백이 만나기위해 출입하던 곳으로 나혜석이 떠난뒤 이듬해인 1944년 고암 이응로가 이여관을 사들여 부인 박귀희여사에게주어 운영하게 했던 곳이다.

 

   

이응로 화백 (1904-1989)  

그의 작품세계는 세계적인 유명인으로 여기서 거론하지 않고 그와 수덕여관에얽힌 야사만을  여기에 올리고자 한다.

그는 1921년 유교가정인 집안에서 구식으로 박귀희와 결혼하였으나 결국은 이혼하고 1958년 21세 연하인 이화여대를 졸업한 신여성 박인경(현 이응로 미술관장)과 재혼하고 프랑스로 훌쩍 떠나버리자 박귀희 여사는 자기혼자 수덕여관을 운영하면서 이응로 화백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살다가 2001년 홀로 쓸쓸하게 세상을 하직한 곳이 바로 수덕여관이다. 

이 여관은 일엽스님이 수덕사에 있을때 그와 친구였던 나혜석이 이혼을 한뒤  마음의 안정을 찾기위해 일엽스님을 찾아왔을때 이 여관에서 묵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6년여동안 그곳에서 호구지책을 위한 작품 활동을 하기도 한 곳이며 당시 나혜석은 이혼한뒤 사회의 질시를 견딜수 없어 고심하던 끝에 당시 수덕사 주지스님이던 만공스님을 찾아가 출가해줄것을 요청하였으나 만공스님은 그를보자 당신은 스님으로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거절 하였다고 하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나혜석은 일본 유학중 이광수 최승구등과 사귀면서 자유분방한 신여성 으로의 입지와 여성운동의 선봉에 서기도 하였으나 사회에서의 질시를 견디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결국은 행려병자로 전락되어 길거리에서 죽고말았던 비운의 신 여성 이기도 하나  일엽스님과는 아주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였다. 일엽스님의 유일한 혈육인 김태신이 일본에서 어머니를 그리워 한 나머지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수덕사 입구에 있는 이 여관에 .머물었다고 한다. 

당시 일엽스님은 아들 김태신이 어머니...라고 부르자 "나에게 어머니라고 부리지 말라 스님이라고 불러라" 고 말하고 홀연히 아들곁을 떠나 수덕사내의 암자로 돌아가자 친구인 나혜석이 그아들을 팔베개 해주며 젖을 만지게 하는등 모성애에 굶주린 김태신에게 엄마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이응로 화백이 강제송환되어 2년간 옥살이를 하는 동안 박귀희 여사는비록 이혼한 남편이었지만 그의 옥살이의 뒷바라지 해주었으며 석방된 뒤에 2개월간 수덕여관에서 몸조리를 하도록 지극 정성으로 돌봐주었으나 석방 두달뒤 그는 프랑스로 떠나고 말았다.  

고암은 수덕여관에 머무는동안 뒷뜰에 내용을 알수없는 암각화 2점을 완성시켰는데 일설에 의하면 자기와 결혼한 전부인 박귀희 여사에게 미안한 마음을 그림으로 옮겨놓았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이응로화백 본인 이외에는 아무도 알수가 없는 일이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가 없는 일이다. 암각된 그림은 문자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영적인 계시에서 그린 부호인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박귀희 여사에게 사죄하는 영적인내용의 계시문이란 말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박귀희 여사가 죽은뒤 이여관은 방치되어 돌보는이가 없어 암각화에도 이끼가 끼는등 관리가 소홀했으나   예산군청에서 수덕여관 관리자인 이응로화백의 조카로 부터 1역원에 건물을 매입하여 지방 문화재로 지정 관리하기위해 수리중에 있다. 

수덕여관은 건물은 이응로화백의 후손이 소유로 되어있으나 대지는 수덕사 소유로 되어있어 수덕사와 이응로화백 후손간에 약간의 갈등도 있었으나 잘 해결되어 예산군청에서 이곳을 보수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으로 이응로화백의 작품이 보존되어 있는 수덕여관을 길이길이 후손에게 전할수 있게되어 반가운 일이다. 

후문이지만 이응로화백은 박귀희 여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북한에 있는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백림 사건시 아들을 만나기위해 북한을 방문했다가 이 사건에 얽히게 되었다고 한다.

 

 

 

  

 

이자료는 홍성 인터넷신문에서 퍼온것입니다

 

 

 

  

 

 

  

 

 

 

 

 

 

 

 

 

 

 

 

  

 

 

 

 

 

 

 

 

 

 

 

 

 

 

 

 

 

 

 

* 나혜석(호 晶月, 1896-1946, 수원에서 출생)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졸업하고 국내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여성운동을 하다가  김우영과 결혼한뒤 유럽일대를 여행하던중 유럽에서 최린(북한 고위층)과의 염문이  국내에까지 퍼져 결국은 이혼당하고 말았다. 

  그뒤로 자기의 입지를 알리기 위한 글도 내었으나 당시 사회에서 그를 포용해줄수 있는  여지가  없었기에 주눅이 든 상태로 수덕여관에 머물면서 친구였던 일엽스님으로 부터  위안을 받기도 하였으며 마음의 변화를 입어 출가까지 할 생각이었으나 만공스님으로  부터 거절당하고 마음을 잡지못하고 결국은 폐인이되어 행려병자로 전락되어 길거리에서  사망하기에 이르렀던 근세사에 오르내렸던 신여성이다.

 

연애(戀愛) 라는 말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쓴여인.
최초의 여류화가이자,우리나라 유화유입의 1세대,
문예지 『폐허』의 창간 동인,시인,여권운동의 선각자,
그리고 뛰어난 소설가로서'경희'는 같은시대의 베스트셀러였던
춘원 이광수의'무정'보다도 더 높은 문학적 평가를 받을만큼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났지만, 그녀의 삶은 불꽃처럼 정열적이었고
또한 그리 길지는 않았습니다.

엄한 아버지의 강압적인 결혼권유에 맞서 교원으로도 재직했던
그녀는 사랑하던 애인 최승구가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그녀가 다녀간 다음날 사망하게 되는 불운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후 그녀에게 끈질기게 구애하던 김우영과 결혼.
그리 화목한 가정을 꾸리진 못하지요..
그때 당시 '최린'과의 염문설로 파격적이었던 이혼을 하게 됩니다.

후에 해인사에서 구도생활을 하기도 하지요..
당시,나혜석에게 젊은 화가 고암 이응노가 찾아와서
동료 화가로서 교분을 나누었다고도 합니다.
한 여인의 삶으로써는 불우한 삶을 살았던 그녀이지만
때로는 3.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루면서
'여성도 사람이외다!'라는 말을 외쳐 여성해방운동의 기틀을 마련하였었고,
여성으로보다는 한 인간으로의 삶을 살고 싶어했던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적작가 였습니다.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여성해방의 문제를 타고난 재질로 쓴시..
노라의 집을 한번 읽어보세요..
 

 

 


노라의 집..1921년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노라를 놓아라..최후로 순순하게 엄밀히 막아논..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노라를 놓아주게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사명의 길로 밟아서..사람이 되고저
노라를 놓아라..최후로 순순하게 엄밀히 막아논..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노라를 놓아주게
나는 안다 억제할 수 없는..내 마음에서 온통을 다 헐어 맛보이는..
진정 사람을 제하고는 내 몸이 값없는 것을..내 이제 깨도다
노라를 놓아라..최후로 순순하게 엄밀히 막아논..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노라를 놓아주게..중략

자료참고:수원홈피,나혜석홈피,...

 

 

 

 

 

 

 

 

 

 

 #2. 수덕여관 복원

 

 
 
1년여 간의 복원공사를 마친 충남 예산 수덕사 내 수덕여관이 5일 개관식을 갖고 일반인들에게 공개됐다. [사진=프리랜서 김성태]

 

 

한국 근·현대 미술의 거장 고암(顧庵) 이응로(19041989) 화백의 발자취가 묻어있는 ‘수덕여관(충남도 지정 기념물 제103호)’이 1년 여의 복원 작업을 거쳐 일반인들에게 공개됐다.
 5일 열린 ‘고암 이응노 화백 고택 복원 기념식’에는 수덕사 주지 옹산 스님과 이완구 충남도지사, 문화·예술인, 주민 등 200여 명이 참석해 고인의 발자취를 되새겼다.
 기념식이 끝난 뒤 이봉연 교수와 심응섭 교수(혜전대) 등 화가·서예가들은 고인의 작품세계를 기리는 의미에서 직접 한지에 고인의 이름과 생전 즐기던 그림을 그려 관람객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修德寺) 경내에 자리한 수덕여관은 1054㎡ 부지에 건평 182㎡ 크기의 ‘ㄷ’자형 초가로 지난해 10월부터 군비 등 4억 원을 들여 7개의 방, 장지문, 툇마루, 부엌, 구들을 깔아놓은 온돌 등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됐다.
 군은 당초 초가지붕 등만 개축하려 했으나 정비과정에서 서까래, 연목 등 건물 대부분의 부재가 썩거나 훼손이 심해 전면 해체 복원했다.
 대문 위에 걸린 ‘수덕여관’이란 옥호는 고암의 친필을 그대로 사용했다.
 비록 고암의 손때가 묻은 낡은 기둥과 벽, 툇마루 등이 사라져 낯선 모습이지만 새집이면서도 옛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과거 수덕여관은 길가던 나그네를 재워주고 산채정식을 파는 유명한 곳이었지만 복원을 통해 객실은 고암의 작품이 걸린 전시관으로 변모했고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토론을 벌이는 다목적 문화공간으로 태어났다.
 복원된 수덕여관을 둘러 본 최명숙(45·여)씨는 “이응로 화백의 자취가 그대로 살아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이미지와 잘 맞춰졌다”며 “전체적인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장식들이 있는 게 흠이지만 그런대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수덕여관은 이 화백이 1944년 구입해 59년 프랑스로 가기 전까지 거처하며 수덕사 일대의 풍경을 화폭으로 옮긴 곳으로 앞 뜰에는 69년 동백림 사건 당시 이 화백이 잠시 머물며 화강암에 새긴 추상 암각화 2점도 남아있다.
 고암이 프랑스로 건너 간 뒤에는 부인인 박귀희 여사가 식당과 여관 등으로 사용해왔으나 박 여사가 사망한 후 수년간 방치되다 96년 도 기념물로 지정되고 수덕사가 여관을 매입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게 됐다.
 수덕여관은 고암이 기거했다는 추억뿐만 아니라 50~80년대 전국 각지의 중·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면 묵어가던 명소로 유명했다.
 사찰 측은 수덕여관 복원을 기념해 ‘고암 고택에서 만나다’라는 주제로 오는 14일까지 수덕여관에서 전시회를 열어 고암의 미공개 작품 20여 점과 서찰, 낙관, 제자 금동원의 작품 등 40여점을 전시한다.
 수덕여관은 앞으로 지역 문인들의 작품활동과 토론의 장으로 활용된다. 고암의 뜻을 기리고 따르는 후배들이 고암의 예술세계를 토론하고 이 곳에서 작품활동을 할 예정이다. 수덕여관은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된다. 수덕사 측은 절을 찾은 신도나 관람객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하고 수덕사에서 운영하는 템플스테이(Temple Stay)와 연계해 종교와 문화가 함께 어우러지도록 할 계획이다.
 수덕사 주지 옹산 스님은 “수덕여관은 고암의 예술 혼이 서려있는 곳으로 이번에 복원을 마침으로써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게 됐다”며 “사찰 문화체험 공간 등으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예산=신진호 기자 , 사진=프리랜서 김성태

 

 

 

 

 

 

 

 

 

 

 

 #3. 고암 이응노 화백의 예술혼이 깃든 수덕여관이 최근 해체복원됐다.

 그러나 복원된 수덕여관에서는 옛모습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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