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河 1.

2007. 12. 2. 10:25중국

 

 

  

      "일단 한바퀴 둘러보고나서" 

 

 

 

 

 저기가 황하유람선 타는 터미널인 셈인데요,

가만, 지금  저 간판을 뭐라고 쓴 거지요? '黃河氣 @ 船.......?'

중국에선 읽을 수 있는 한자가 반 밖에 안되더군요. 

 

 

  

  

 

 이건 또 뭔 字래요?

'情@黃河'....?  격(擊)자는 아닐테고, 라(拏)자도 아니고...?

  

 

  

 

 어휴 저 진흙 좀 봐요!

하긴 황하가 달리 황하겠어요?

  

 

 

  

 

 배가 황하 본류에서 수로를 통해 들어오는 거예요.

  

 

 

  

 

 흙탕물 튀니까 멀쯔감치 물러나있어야 되지요.

근데 저 배 희한하게 생겼지요?  바닥이 쥬브로 된 배예요.

 

 

  

  

 

도착하니까 바람이 빠져서 푹 가라앉더군요.

근데 어떻게 순식간에 바람을  빼는지..?

  

 

 

  

 

 이왕이면 얼릉 들어가서 앞자리 맡는게 낫겠죠?

  

 

 

 

 

  30인승? 50인승?

  

 

 

 

 

 하휴~ 저 뻘흙 튀기는 거 좀 보세요.

 

  

 

 

  

 

해가 역광이라서, 또 배 안에서 찍는 거라서, 사진 상태가 아주 션찮죠?

그래도 넘실거리는 황톳물은 보일 겁니다. 

저 위에 산 꼭대기, 정자 하나 보이지요?

거기가 초한지의 그 항우가 사면초가 당한 데라는 거에요.

근데 암만해도 뻥 같아서...

 책에서 본 거랑은 주변 여건이 좀  아니거든요.

 

 

 

 

 

 

  

 

 저기 저쪽 산 위에도 뭔 탑 같은게 보이지요?

그건 또 유방네 한나라가 축성했던  성벽이라네요.

아까 항우네랑은 지척지간이지요?

나중에 저기도 개발해서 관광객한테 보여준다더군요.

  

 

 

  

 

 

저 여자애는 황하전문 중국인 가이든데 배 회사에 소속 된 모양이더구만요.

시종 숨쉴틈도 없이 설명을해주기는 하는데 뭔 말인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

 근데 중국사람들은 말소리가 왜 그렇게 크고 시끄럽대요?

돌아올때는 우리 가이드가 설명해줬는데 갸는 두마디 하니까 끝나더이다.

저 배에서 黃河CD를 팔기에 사왔는데 확인은 안해봤습니다.

 

 

 

  

  

 

 

앞에 황하를  설명하는 글에서  河라는 건 중간에 끊어지기도 한다는 얘기 처럼

이렇게 드믄드믄 바닥이 드러나는데가 있더라고요.

전체가 누러니까 잘 표가 안나긴 하는데, 어디는 물이 굽이쳐 흐를 정도로 수심이 깊어보이는가 하면

또 어디는 이렇게 거죽을 드러낼 정도로 얕으니, 큰 배가 다니기에는  애매하게 생겼더군요.

  

 

 

 

 이거 봐요, 이거!

  

 

 

 아주 섬 같잖아요.

저쪽 어디 江岸에다가 배를 댄 게 아니예요.

여기가 黃河 물 한복판이라니깐요.

 

 

  

 

 

 

  그래서 이런 수륙양용배가 다니는거구요.

참 빼먹은 얘기가 있었네요, 저 배는 뒤에 달린 프로펠러 힘으로 가는 거랍니다.

  

 

 

 
 
 거참, 희한하게 정박하면 자동으로 바람이 빠지는 눈치더라구요.
출발할 땐 금세 공기가 채워지고.
저 뒤에 달린 프로펠러랑 서로 연관이 되어있는 시스템인가봐요.
 저게 돌면 바람을 유입시키고, 멈추면 빠지고 하는... 
 
 
  

 

 

  뭐 보나마나 진흙바닥이지요.

비가 안 온지가 오래되다보니 바싹 말라서 푸석푸석하더군요.

  

 

 

  

 

 배가 오면 저 사람들 우루루 떼져오더라구요, 말 타라구요.

 저 가운데 보면 움막이 몇개 있는데 거기서 자기도 한다네요.

분명 소수민족일텐데 회족은 아닌 것 같고...

 

 

 

  

  

  황사란게 저 비슷한 거겠지요?

 

  

 

    

 

   

위 아래 사진은 내외분인데, 아주 젊게 생기셨더군요.

아주 활기차서 보기 참 좋데요.

  

   

 

   

 

아줌마! 줄 놔요, 놔! 쪽팔리게 이게 뭐여!"

  

 

  

 

끝없이 넓지요? 오른쪽에 보이는게 옛날에 논 철교인데
(다리 말구 그 앞에 보이는 거.)

토사가 자꾸 쌓이다 보니 교각 윗둥치만 남았다는군요.

 

  

 

 

 

  

지금 저건 제방공사를 하는 건데 금년부터 시작했다는 거예요. 여태는 제방이 없었단 거지요.

제방이 없다보니 비가 오면 산이 깍여나가서 그 때문에 제방을 쌓기로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요 대목이 바로 의문이란 말입니다.

앞에 설명문에선 제방이 다 돼서 수해가 없다고 했잖았어요?

더 알아봐야겠지만 그 얘기는 지역마다 사정에 따라서 다른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네요.

그리고 하남성 중동부 지역은 돌이 없는 토양이라서 제방을 막으려면 전부 시멘트로 해야하는데...

 만만치가 않겠던걸요?

 

 

 

 

 




 


 

 

 

 

 

허난 성 지도

                           

빨갛게 표시 된 부분이 하남성이고 그 한복판이 정주(鄭州)다.

밑에 지도에서 보듯이 황하는 'ㄹ'字형태로 흐른다.

 

 

   

 

 

 

 

  

그런데 말입니다.

중국에 뭔 강이 있냐고 물으면 다들 황하와 양자강이 있다는 것은 아는데,

그 둘을 대충 엇비슷한 걸로 생각해버리는 이들이 의외로 많더란 겁니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전혀 아니올시다 랍니다.

제가 오륙년 전에 장강삼협을 다녀오지 않았겠습니까.

중경에서 의창까지 3일을 꼬박 내려오는, 크루즈 관광이란 걸 했거던요.

삼협댐을 막는다고 해서 부랴부랴 막차로 다녀왔단 것인데....

그때 본  장강과 이번에 정주에서 본 황하를 비교하면  전혀 차원이 다르더군요.

물론 장강은 상류를 본 것이고 황하는 중류를 본 것이지만

이거저거 모든 분위기가 딴판이랍니다. 

 

그럼 여기서 다시 장강에 대해서 살펴보고 갈까요?

중국인들은 양자강이라 부르지 않고 만리장강, 줄여서 장강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렇다면 다시, 왜 어떤 건 江이라 하고 어떤 건 河라고 하는지 궁금할터 -

 여러가지 기준이 있겠지만 간략히 구별하는 방식은 이렇답니다. 

# 물이 통상적으로 내해나 호수의 하류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河라 하고,

반면, 물이 외해 또는 바다로 통하는 하류로 가는 것을 江이라고 한다.
#  유량과 유역면적이 비교적 크고 넓으며, 4계절 내내 마르지 않는 것을 강이라 하고,
 

유역면적이 크기도 작기도 하고, 유량이 강보다 작은, 그리고 더러 단류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河라고 한다.

 

 

 

 

 

 


"자 그럼 이제부터 시작해볼까요~?"

 

 

 

가 이번에 다녀온 길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정쩌우(鄭州)에서  자오쭤(焦作) 를 거쳐 운대산까지 이동한 거리가 버스로 2시간,

운대산에서 다시 초작으로 나와서 뤄양(洛陽)까지가 2시간,

낙양에서 소림사가 1시간(?), 숭산 소림사에서 카이펑(開封)까지가 3시간,

개봉에서 다시 정주로 돌아오는길이 1시간. 

나중에보니 시계반대방향으로 지그재그 한바퀴 돌아오는 코스였는데

아무튼간에 도합 8~9시간을 버스로 이동한 셈이다.

 

위에 황하에 대한 설명에서도 보았듯이 중국은 서고동저의 지형이고

특히 동부지역은  황하 충적평원이라 했다.

이번에 그 많은 시간을  버스로  이동했는데 

차창으로 무덤크기만한 흙더미 조차도 볼 수가 없었다.

5일을 다녔어도 그 끝을 보지 못하고 왔으니...

그런점에서 운대산과 숭산은 아주 특이하다. 그것도 순전히 돌산이라니.

아무튼 여기는  모두가  밭이다. 황무지는 없어뵌다.

곡창지대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더러는 과수원도 있으나 대부분  밀밭과  옥수수밭이다.

황하 북쪽으론 일모작, 황하 이남으론 이모작을 한다는데

황하로 인해 기후가 달라지는듯하다. 

 

 

 

 

 

  

대학 1학년때 교양과목 문화사 시간에 있었던 얘기 한번 하자.

다들 잘 알고 있는 <4대강 유역의  문명발생 원인이 '범람으로 인해 토지가 비옥하여...>라는 대목에서

내가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한 기억이 있다.

"아니 범람을 한다면 토지가 비옥해지는 건 나중 문제이고 당장에 사람이고 집이고

다 홍수에  떠내려가서 죽고 없어지고 말텐데, 어떻게 거기에 삽니까?

몇해 걸러서도 아니고, 매년 당하는 일인데다 더구나 그때는 원시사회 아닙니까?"라고 했더니,

교수란 양반이 왈 ; "어떻게 대학생이나 돼서 그딴 한심한 질문을 하냐"고 일언지하에 무시하는데

아이들 마져도 와 하고 웃으니,

난 내가 뭘 다부지게 모르는 게 있는가 싶어 그냥 머쓱해졌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이후로도 그 의문이 떠나지를 않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마침 당시에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론'과 '소수의 창조자론'을 읽게 되었다.

당시는 박정희 유신독재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때라서

그 이론을 요리조리 짜맞추면 아주 절묘하게 엮어낼 수가 있어

대학가는 물론이고 신문 방송 할 것 없이  토인비 광풍이 불었던 적이 있다. 

'도전과 응전론'에 이런 대목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기후를 포함한 자연환경을 기준으로 볼때 '최적-최악-중간'의 세가지  환경조건이 있었다고 한다면

의외로 '중간'되는 환경조건에서  살아남은  人間群이 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바로 도전과 응전으로 단련된 인류가 문명을 발전시켰다는 이론인데,일반론으로는 당연하겠지만

4대강의 문명발생 이론에 그 이론을 직접 대입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문명의 발생은 문명의 발전이나 전이와는 다른,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있을 거라는 이유다. 

특히 지리적인 환경에 주목할때 그렇다.

   

이 글은 기행문 내지 여행후기이니 의문을 제기하는 정도만으로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최근에 완공한 염황이제상이다.

황하유람선을 타는 바로 그 승선장과 붙어있는데 이름하여 황하풍경구다.

풍경구(風景區)란 이름을 붙인 걸로 봐서는 漢나라의  성곽 복원을 포함하여

대규모 관광단지 공사가 예정되어 있는 걸로 보인다.

위에서 본 제방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축조하는 게 아닐까?

염황이제에 대한 문제는 황하 2 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黃河 그 자체만을 살펴보자.

 

 

 

 

 

 

 

다음은 대만 사람 '보양'이 지은 《帝王之死》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방훈(이방훈은 黃帝 또는 요임금으로 불리는 인물임.)은 100년 동안 제왕의 자리에 있었지만

진짜 권력을 장악한 시간은 고작 60년뿐이었는데, 그 60년 동안도 고통과 재난의 연속이었다.

첫 번째 재난은 큰 가뭄이었다. 

홍수와 가뭄의 가장 큰 차이는 홍수는 제방이 무너진 일부 지역에 한정된 재해지만, 가뭄은 훨씬

넓은 지역에 닥치는 재해라는 사실이다. 가뭄은 한번 들었다 하면 1,000리가 붉은 땅으로 변하고

굶어 죽은 시체들이 들판을 덮는다. 게다가 가뭄이 들면 흉작은 필연적이어서 상황은 더욱 처참해

진다. 홍수는 금세 지나가지만 가뭄은 그렇지 않다. 가뭄은 한번 닥쳤다하면 1년을 단위로 거의

모든 것을 서서히 말살시킨다. 이방훈이 집권하던 그 시기에도 이런 큰 가뭄이 들었던 것이다.

 

두번째 대재난은 홍수였다. 가뭄이 언제 발생했는지는 사서에 언급된 바 없다. 반면 홍수는 기원전

229년에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홍수는 가뭄에 비해 영향을 미치는 면적이 작다. 그러나

황제 왕조 시기의 중국은 오늘날의 100분의 1 정도로 콩알만 해서 황하 중류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산서성 남부, 남으로는 산동성 중부에 미치는 정도였다. 따라서 홍수가 닥치면 손바닥만 한 전국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

 

기원전 23세기에 터진 전례 없는 홍수는 세계적 현상이었다고 한다. 이는 노아의 방주 시대로 중국

뿐만 아니라 서양을 비롯해 세계 곳곳이 물에 잠겼다.

이 늙은이는 『맨얼굴의 중국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이방훈)가 재위한 100년 동안 전에 없던 무시무시한 대재난이 터졌다. 기원전 2297년 하늘에서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강이란 강은 모조리 다 넘치고 산이 무너졌다. 집과 가축 그리고 논밭이 모두

 물에 휩쓸렸다. 전국이 물바다로 변했고,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거나 굶어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높은 산으로 올라가 구호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 최초의 대참극이었다.

 

「통감외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용문이 열리지 않고 여양이 트이지 않아 황하는 맹문쪽으로 나가고 장장은 회하 쪽으로 터져버렸다.

평원이나 고원이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져 온 세상이 분간할 수 없는 망망대해가 되었다.

이를 '홍수'라 했으며, 사람들은 언덕이나 나무 위로 올라갔다.

 

이처럼 속수무책인 상황에서 이방훈은 신료들을 소집하여 아홉 개의 태양을 활로 쏘아 떨어뜨린

후예처럼 물을 다스릴 만한 인물이 없겠냐고 물었다. 4명의 군사령관을 포함한 신료들이 한결같이

유하 부락의 우두머리 사곤을 추천했다. 유하  부락은 당시 하남성 우현에 둥지를 틀고 있었는데,

그들이 선조는 지금의  사천성 곳곳을 전전하다 중원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사곤은 당시 가장

지명도 높은 치수공사 전문가였으므로, 중앙정부는 그에게 모든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사곤은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후예는 가뭄이 끝날 무렵 나타났지만 사곤은

홍수가 기승을 부릴 때 나타났다. 당시의 지식이나 기술로는 그런 어마어마한 홍수를 막을 수 있는

공사가 불가능했다. 사곤이 처한 어려움을 살펴보자. 산을 뚫어 물길을 내는 일은 다이너마이트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또 쇠망치, 전자 드릴 같은 도구가 없으면 길을 내거나 다리를 놓는 일도 어렵다.

따라서 사곤에게는 죽자 살자 재방을 쌓아 물을 가두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이 방법이 산을 뚫는 것

보다 쉽고, 어느정도 실행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그나마 주변에 황토나 부서진 돌이 많아, 그저 운반

하기만 하면 바로 재료가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같은 제방만으로는 홍수를 완전히 막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제방은 끊임없이 여기저기

계속해서 터졌다. 사곤은 경험 많은 전문가였지만 작은 시내가 강을 다루는 정도였으므로 지금 같은

대홍수를 막는 일에는 전혀 힘을 쓸 수 없었다.                                 

                                                                                                          - 帝王之死 - 

 

 

 

 

 

 

 

황하유역의 범람으로 인해서 생겨난 비옥한 토지가 황하문명의 발생원인이라는 말은

 잘못됐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지형을 가지고 기원전 5,000년대를 유추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만일 지금의 정주-낙양-개봉의 평원지역에 옛날과 같은 홍수가 나서 범람을 했다고 친다면

단언컨대 멸종외엔 방법이 없다.

피신을 할 곳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수백리를 가도 끝이 안보이는 들판에서 도대체 어디로 도망을 가겠는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피난하겠는가?

물론 수상가옥이라도 짓고 살았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그런 흔적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내가 이리 말하면 - 

그곳에서 발견되는  엄청난 양의 유물에 대해서 어찌 설명할 것이냐고 물을 것이다.

내 결론을 말하면 이렇다.

당시엔 지금과 같은 지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들과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부락이 있었을 것이다.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그리해야 했을 것이다.

생각을 해보라. 당시엔 큰 비만 왔다하면 곧바로 범람으로 이어졌을텐데,

일년에 한 두번만 계산한다고쳐도 거의  1만번을 헤아리지 않는가?

그러면 왠만한 지반은 다 평지로 화했을 것이다.

지금도 황하유역에 제방을 쌓는 이유가 산의 침식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라지 않던가.

평원 한가운데에 어떠한 산맥과의 연계됨 없이 홀로 불뚝 솟은 운대산과 숭산을 보라. 

거져 생겨난 우연인가?

순전히 돌산이다. 얼핏보아 화강암이다.

노아의 방주 같은 대홍수가 있었다고 해보라. 아마 그 두개의 산 꼭대기만이 남았을 것이다. 

개봉성 밑으로 12미터의 진흙이 옛주거지 위에 덮여있다고 앞에서 얘기한 적이 있는데,

12 미터의 잔류 진흙층이 생기려면

도대체 얼마만한 높이의 물이, 오래, 많이, 덮여있었어야 하겠는가 말이다.

도저히 지금의 관점에서는 당시를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범람으로 인해 생긴  비옥한 토지라는 것은 후대에서 본 결과물일 뿐,

당시의 문명발생의 필요조건이 아니라 여러 조건 중에 한가지도 될똥말똥하다는 것이 내 견해다.  

 

 

                                             - 이어서 黃河 2 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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