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양(洛陽) 관림(關林)

2007. 11. 24. 18:11중국

 

 

 

 

三國演義 一開場, 第一句話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9척 신장에 수염의 길이는 두 자가 넘고, 봉의 눈매에 누에 눈썹이 짙은 그의 얼굴은

 무르익은 대춧빛이며, 소리는 마치 쇠북을 울리는 듯했다.

원소가 묻는다. "누구인가?"

공손찬이 대답한다. "유현덕의 의제 관우입니다."

"지금 무슨 벼슬에 있소?"

"유현덕의 마궁수로 있소이다."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원술이 관우를 향해 호통을 친다.

"네가 우리 제후들 중에 장수가 없다고 업신여기는 게냐?  한낱 궁수 따위가 어디라고 감히

그런 소리를 지껄이느냐?  저놈을 당장 밖으로 끌어내라!"

조조가 급히 말린다.

"공로, 너무 노여워 마시오. 저자가 저렇듯 큰소리를 칠 때에는 그만한 용기와 지략이 있을

것인즉, 시험삼아 내보내서 만약 이기지 못하거든 그때 책망해도 늦지 않으리다."

원소는 도무지 내키지 않는 눈치다.

"한낱 마궁수 따위를 내보냈다가 화웅의 웃음거리가 되면 그땐 어쩔 테요?"

조조가 말한다.

"보아하니 평범한 인물 같지는 않은데, 화웅인들 저자가 마궁수인줄 어찌 알겠소."

잠자코 듣고만 있던 관우가 다시 청한다.

"만일 화웅을 이기지 못하면 그땐 내 목을 내어드리리다."

조조가 더운 술 한잔을 가져다가 관우에게 권한다.

"한잔 마시고 나가시게."

"그냥 두십시오. 술은 갔다 와서 마시지요."

관우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칼을 들고 밖으로 나가 말에 뛰어올랐다.

잠시 후 관 밖에서는 북소리와 함성이 천지를 진동한다.

금방이라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듯 요란하여 모든 제후들이 놀라 소식을 기다리는데,

문득 말방울소리가 들려왔다.

일제히 쳐다보니 관우가 화웅의 머리를 들고 와서 보란듯이 내팽개쳤다.

따라놓은 술이 미처 식지 않은 사이였다.

 

후세 사람들은 관우의 공로를 이렇게 칭송했다.

 

위엄이 천지를 진압한 제일 공훈 /

군문의 북소리 둥둥 울릴 때로다 /

관운장이 술잔 놓아둔 채 용맹을 떨쳐 /

그 술이 식기도 전에 화웅의 목 베었더라 /

 

 

 

  

 

 

 

관우(關羽) 

자가 운장(雲長)이고 하동(河東) 해량(解梁: 지금의 산서성 운성시<雲城市> 상평촌<常平村>) 출신이다. 정사에는 관우가 태어난 날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전장군관장목후조묘비명(前將軍關壯穆侯祖墓碑銘)과 <사전비기(祀田碑記)>·≪관제지(關帝志)≫ 등의 기록과 민간에 전해지는 여러 가지 설들을 종합하면, 그는 대체로 환제(桓帝) 연희(延熹) 3년(160)에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이름을 장생(長生)이라 하였다가 뒤에 우(羽)로 바꾸었다.   

관우는 맥성에서 패하여 임저장향(臨沮章鄕: 지금의 호북성 안원현<安遠縣> 북쪽)으로 퇴각하다가 손권의 복병에게 사로잡혀 아들 관평(關平)과 함께 피살되었다. 이때 관우의 나이 59세였다. 

관우가 죽은지 41년 후 촉(蜀) 경요(景耀) 3년(260, 관우 탄신 100주년)에 후주 유선(劉禪)은 관우의 시호를 장목후(壯繆侯)로 추증했다. 그러나 남북조 시기부터 청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관우는 역대 제왕들의 추존을 끊임없이 받아, "후(侯)에서 왕, 왕에서 제(帝), 제에서 성(聖), 성에서 천(天)"으로 올라갔다. 그의 명성은 중국은 물론 해외에까지 널리 알려져 중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고 신성시 되는 우상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마침내는 공자와 함께 "문무이성(文武二聖)"으로 병칭되었다. 

정사에서는 관우의 활약에 대한 기록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민간설화와 명대의 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를 거치면서 '충의(忠義)'의 화신으로 신격화 되어갔다. 역대 왕조의 통치자들은 이러한 전형 인물을 빌어 그들의 통치를 유지하는 수호신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관우의 충의와 용맹·무예를 더욱 과장하여 많은 문무대신들이 관우처럼 왕에게 충의를 다하고 사직에 용맹과 무예를 바치기를 바랬던 것이다. 

 관우에게 왕이라는 작위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송대부터이다. 휘종(徽宗)은 숭녕(崇寧) 원년(1102)에 관우의 시호를 '충혜공(忠惠公)'으로 추증하고 그의 작위를 후작에서 공작으로 한단계 더 높였다. 다시 계속하여 숭녕 3년(1104)에는 '숭녕진군(崇寧眞君)', 대관(大觀) 2년(1108)에는 '소열무안왕(昭烈武安王)', 선화(宣和) 5년(1123)에는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으로 추존했다.

남송의 창시자 고종(高宗)도 건염(建炎) 2년(1128)에 관우를 '장목의용무안왕(壯繆義勇武安王)'에 봉했고, 그의 아들 효종(孝宗)은 순희(淳熙) 14년(1187)에 관우를 '장목의용무안영제왕(壯繆義勇武安英濟王)'에 봉했다. 

원나라 문종(文宗)은 천력(天曆) 원년(1328)에 남송시대에 관우에게 내린 시호에서 '장목(壯繆)'을 없애고 대신 '현령(顯靈)'으로 바꾸어, '현령의용무안영제왕(顯靈勇武安英濟王)'이라 하였다. 

관우에게 제(帝)라는 시호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명대부터이다. 주원장(朱元璋)이 죽은 후 혜제(惠帝)가 왕위를 계승했다. 혜제 건문(建文) 3년(1399)에 주체(朱棣)가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는데, 그가 바로 성조(成祖: 영락황제<永樂皇帝>)이다. 성조는 자신의 행동을 관우의 영험한 도움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즉 그가 황제가 된 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말이다. 황제가 관우를 신이라 한 이상, 신하와 백성들도 당연히 관우를 신으로 숭상하였다. 명대 중후기의 정덕(正德) 4년(1509),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전국에 있던 관묘(關廟: 관우 사당)의 이름을 모두 '충무묘(忠武廟)'로 고치게 했다. 

만력(萬曆) 22년(1594), 도사 장통원(張通元)의 요청으로 신종(神宗: 만력황제<萬曆皇帝>)은 관우를 제(帝)에 봉하고, 관묘의 이름을 '충무'에서 '영렬(英烈)'로 바꾸었다.  

만력 42년(1614) 10월, 신종은 관우를 '삼계복마대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三界伏魔大神威遠震天尊關聖帝君)'(≪해여총고(咳余叢考)≫≪노포총담(老圃叢談)≫ 참고)에 봉했다.  

청대의 통치자들도 관우를 매우 숭배했다. 세조(世祖: 순치황제<順治皇帝>)는 순치 원년(1644)에 관우를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에 봉했고, 성조(聖祖: 강희황제<康熙皇帝>)는 강희 42년(1703)에 관우의 선조, 조부, 부친을 공작(公爵)으로 추존했다.  

건륭(乾隆) 이후 가경(嘉慶)·도광(道光) 두 왕조를 거치면서 관우의 시호를 '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우찬선덕충의신무관성대제(仁勇威顯護國保民精誠綏靖羽贊宣德忠義神武關聖大帝)'라고 하여 그에 대한 숭배가 극에 달했다. 문종(文宗: 함풍황제<咸豊皇帝>)은 함풍 5년(1855)에 관우의 선조를 '광소왕(光昭王)', 조부를 '유창왕(裕昌王)', 부친을 '성충왕(成忠王)'에 추증하고, 관우의 신위를 황궁에 모셔두었다.

 

관림(關林) 

관림은 관제묘(關帝廟)라고도 한다. 낙양시(洛陽市) 남쪽 7㎞에 위치한 관림은 관우의 목이 묻힌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 무덤만 하나 있었으나, 명대 만력(萬曆) 연간에 여기에 사당을 짓고 잣나무를 심었다. 그후 다시 청대 건륭(乾隆) 연간에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로 조성하였다. 

'관림'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과거 중국의 등급제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과거 중국에서는 황제의 무덤을 '능(陵)', 왕후의 무덤을 '총(塚)', 일반 백성의 무덤을 '분(墳)'이라 하였으며, 오직 성인의 무덤에만 '림(林)'자를 붙였다. 중국 역사상 성인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은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중국 최초의 교육가 공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바로 삼국시대 촉의 명장 관우이다. 따라서 오직 이 두 사람의 무덤만은 각각 '공림(孔林)'과 '관림(關林)'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 이러한 관림묘(關林廟)는 세 군데 있다. 관우의 목이 안장된 낙양 관림 외에도, 관우의 시신이 안장된 호북성 당양(當陽)의 관림과 관우의 고향인 산서성 해현(解縣)에 세워진 운성관림(運城關林)이 있다. 

따라서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민간에서는 관우를 일러 "머리는 낙양을 베게삼고, 몸은 당양에 누워 있으며, 혼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말한다.  

출처 : [기타] http://www.chinabang.co.kr/renwu/guanyu.htm 


 


      

 

 

 

 

 

 

 둘째날, 관림(關林)

 

 

 

 

관림(關林) 입구.

중국은 저 '림(林)'자를 즐겨쓰는 눈치더군. 공자묘도 공림(孔林)이라 부를 걸?

西安에서던가? 비문을 많이 모아놓은 곳을 비림(碑林)이라 하지.

곧 이어서 소림사를  소개해줄텐데, 거기에 가면 또 탑림(塔林)이라고 있어.

계림(桂林)은 물론 계수나무가 많단 얘기일테고.

그렇지만 酒池肉林은 그런 뜻이 아닐 girl?

 

 

 

  

 

여기 입장료가 얼마더라? 우리돈으로 한 3000원쯤 하지?

저 앞에는 큰 광장이야.

 우측 하얀 벽면에  '충의(忠義)'라는 글자 보이지? 

사진엔 안 나오는데 좌측엔 '인용(仁勇)'이라고 써있어.

근데 가이드가 그걸 못 읽어.  그래서 내가 갈쳐줬어. 나 참을성 많지?

  

 

 

 

 

현판은 관림(關林)이라고 씌어있는 거고,

저렇게 일렬로 건물이 세개던가 네개가 있고, 좌우로 또 건물이 있지.

중국은 어딜 가나 똑같애. 배열형태가.

 

 

 

   

 

 

여기도 관림(關林) 저기도 관림(關林).

관우상을 모신 집이니까  말하자면 절에서의 대웅전과 같은 거지,

부처님 자리에 관우가 대신 앉아있을 뿐.

머리에 임금님 면류관을 씌운 걸 보면 옥황상제쯤으로 만들었나봐.

 

 

  

 

 

중국은 어딜 가나 저렇게 큰 향로가 정면에 세워져 있어. 꽂아논 향도 저렇게 무식하게 크구.

대만인가 곤명인가 갔을때 가이드가 그러더군.

아무래도 과소비에다 이거저거 문제다 싶어서 정부에서 향을 세개 이내로만 태우라고 한정을 했단거야.

 

 

  

 

 난 도대체 이게 뭔가 했어.

 

 

 

 

 아 그랬더니 글쎄 향을 사르는 데라는 거야.

저봐! 저봐!  저 향 디미는 거!

저게 향이라니 믿어져? 종 치는 거 같지 않아?

 

 

 

  

저기도 비슷한덴가 보군.

 

  

 

 

  저긴 뭐더라?

참, 청룡언월도가 저 안에 있더군. 82근 맞어. 엄청나.(중국은 500g이 1근)

그러니 저걸 말 위에서 붕붕 휘둘렀다고 생각해봐.

말년병장은 고사하고  군기가 바짝 든 이등병이래도 어떻게 대들겠냐구.

그러니 십계처럼 쫘악 갈라지는 거지머.

참말로 힘도 장사지만 과연 그 시절에 사람의 체형이 저리 컸을까?

미스테리야, 미스테리.

 

 

    

 

 

측천무후라고 알지?

그 냥반 모형을 모셔놨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다는 거 같았어.

그리고 참,  이 측천무후는 음식얘기와 더불어서 나중에 따로 묶어볼 생각이야.  

  

 

 

 

 저 여자, 아~ 진짜 꺼부슝하더라. 어휴~ 저 여자 생각하면 지금도 등허리가 가렵네.

여기가 관우총(關羽塚), 관우의 잘려진 머리 무덤이란 얘기지.

지금 저 여자 머리 있는데가 門인데,

 손잡이고 뭐고 달린 게 없는 걸로 봐서는 아주 봉해버린 모양이더군.

 

 

  

 

 

 일년에 한번인가 두번인가 행사가 열리는데 대단하다더군.

 

 

 

  

아까 얘기한대로 중심축의 건물 옆으로 늘어선 집들인데,

기념품 가게도 있고, 화장실도 있고, 요사채도 있고...

  

 

 

  

조각상을 시대별로 모아놨는데 보잘것 없으니 그냥 통과.

 

 

 

 

여기가 전면에 있는 광장이야. 주민들에게 요긴하게 쓰이는 것 같더라.

춥지 않을때엔 사람 엄청 북적대게 생겼더군. 

 

  

 

 

 

저 사람, 팽이를 채찍으로 치는데 기똥차데.

 

 

 

 

 

분필로 쓰고있는 거야.

중국의 도시들은 대부분 광장이 있는데 그 바닥이 맨질맨질한 돌바닥이거든.

그러니 거기에다 붓글씨 쓰기가 좋지.

큰 물통에다 사람 키 반쯤 되는 붓을 담가서 글씨자랑이나 연습을 하는 사람들이 꼭 있어.

그럼 옆에 주욱들 둘러서서 구경을 하지.

그런데 저렇게 발가락으로 쓰는 사람은 첨봤네.

하긴 장강삼협 크루즈때는 입으로 글씨 써서 파는 사람도 있더구마는. 

 

 

 

 

 -  이 정도로 마치지 뭐.

담엔 용문석굴에서 기다릴께

걸루 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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