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콩트 (타짜)

2007. 8. 16. 21:07책 · 펌글 · 자료/예술.여행.문화...

 


 

 

 

 

 







이 경영하는 꽤 큰 가구점이 동대문 근처에 있는데

그 점포에서 몇집 떨어진 곳에 새로 기원이 생긴 것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의 일이다.  

어느 추운 날 우리의 준씨가 기원을 발견하고는

구경삼아 들러 기웃거리고 있는데 한 영감이 눈에 띄었다.  

나이는 오십이 좀 넘어보이는데 안색은 귤껍질처럼 우툴두툴 하면서 누우렇고

눈에는 총기라고는 전혀 없어 대뜸 보기엔 간경화증 환자 같은 인상을 주는데

하는 짓이 여간 앙증맞은 것이 아니었다. 

원장이라는 삼십대의 비쩍 마른 친구를 난롯가로 불러 놓고 슬슬 수작을 붙이는데

어찌보면 노련하기 짝이 없고 어찌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저어… 아주 초보자도 여기 출입할 수 있는지요?"

 

원장이라는 작자는 무조건 상술을 발휘하였다.  

"물론이지요. 누구나 처음에는 초보자가 아닙니까?"

 

그러자 그 영감은 저으기 안심했다는 듯이 신상얘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난 경상남도 산골에서 석달 전에 바둑을 배웠는데

이거참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닌 거 같아요.  

집안 살림살이는 큰 아들한테 넘겨준 터이니

어디 몇년쯤 바둑이나 배워볼까 하는데요."

 

"참 팔자좋으신 어른이시군요.

저희 기원에 계속 나와보시죠.

석달 배우셨으면 뭐 아주  초보자는 아닐거예요.

어디 저랑 한판 두어 봅시다."

 

원장이라는 친구는 그 영감더러 아홉점을 놓게 하고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원장은 3급이라고 했다.  

심심하던 참이라 준씨는 난롯가에 바짝 붙어앉아 그한판의 바둑을 관전하였다.  

결과는 영감의 만방패배였다.  

원장은 영감에게 13급이라는 판정을 내려주었다.  

영감은 감격한 듯이 말했다. 

"13급이라… 일등병 계급장을 단 기분인데…

한 8급쯤 두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뭐 반년이면 될 겁니다." 

 

"웬걸요. 우린 원래 둔짜라서요…

그나저나 실력이 비슷한 사람을 하나 만났으면 좋으련만…  

우리같은 초보자가 어디 있을라구요…." 

 

이때 준씨의 머릿속에 또 다시 섬광이 번쩍였다.  

준씨는 턱을 앞으로 쑤욱 내밀었다.   

"영감님, 참 반갑습니다. 저야말로 어디 초보자 없나 하고 찾던 길입니다." 

 

준씨의 실력은 4급 정도였는데

갑자기 장난기랄까 사기꾼 근성이랄까가 발동하여 아무렇게나 말한 것이었다.

 

서로가 겸손에 겸손을 거듭하다보니

누가 백돌을 쥐어야 할 것인가를 놓고 무려 오분 동안 싱갱이가 벌어졌다. 

우리의 준씨가 좀더 박력있는 사양을 하였기 때문에

흑돌이 준씨의 차지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두사람 사이의 기구한 대인관계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준씨가 시작한 실없는 장난이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고

무려 이년 가까이나 계속된 것은 영감이 상당한 재산가라는 것이 밝혀졌고

또 영감이 상당한 도박정신의 소유자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이유만이었다면 준씨가 계속 영감을 상대해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준씨가 유쾌한 마음으로 때로는 가슴설레며

때로는 이를 악물려 영감과의 줄다리기를 계속한 이유는 딴데 있었다. 

영감이 자신의 바둑실력을 엄청나게 속였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영감은 급수를 여간해선 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13급의 급수에 어울리는 진행을 보이는 데에 충실하였다.  

바둑돌 놓는 품도 어설픈 자세를 고수하였다.  

준씨가 영감의 기만을 눈치챈 것도 바로

영감의 바둑이 너무나도 늘지 않는 데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용의주도하게 관찰을 한 덕택이었다. 

준은 영감이 내기바둑꾼임을 알게 되었다.

 

준은 흥분을 감추고

이 괴이하고도 지루한 줄다리기에 온 정열을 바쳤다. 

만 일년이 지나자 영감은 10급이 되었고 준씨도 10급이 되었다.  

실은 되었다기보다는 행세하였다고 보아야겠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가는 제물의 규모도 제법 커져서

처음에는 담배 한갑이었다가  

짜장면 한그릇이었다가

드디어는 현찰내기가 되었고,

그 액수도 차츰 불어나서 드디어는 

금반지 한돈 값이 등장하게 되었다.

 

준씨는 되도록이면 이기지 않으려고 했었지만

몇달 지나지 않아 그 방침을 바꾸었다.  

영감이 의식적으로 액수키우기 운동을 벌이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영감은 계속해서 준에게 져주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게 되면 한판 크게 붙어서 한밑천 움켜쥐려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준씨는 구태여 이기지 않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미끼를 주는 대로 날름날름 받아먹고

나중에 죽기살기 내기 때에도 멋지게 이겨준다.  

이것이 준씨의 새로운 방침이었다.

 

  

디어 결전의 때는 왔다. 

만2년이 되는 어느날 밤,

남산기슭의 자그마한 호텔,

영감은 8급이었고 준씨는 7급이었다.  

각각 튼튼한 입회인을 두 사람씩 앉혀 놓고서 세기의 대결은 벌어졌다.  

제물의 규모는 한 방(10집)에 금 한 돈씩-. 

준씨는 생각했다.

요놈이 영감쟁이. 5급의 실력이 충분하면서도 8급으로 두겠다는 말이지.  

나는 그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3급도 강하단 말이야.

강한 3급이 5급을 선 접고 못 이길 리가 없지. 

황금은 나의 것 …. 이렇게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일어나는 일말의 불안과 미안함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준씨는 허리띠를 고쳐매고 또 고쳐매었다.

 

밤이 깊었다. 

준씨의 입회인 가운데 한사람인 최사장의 007 가방속에는 준씨가 따는 금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아직도 미끼인지도 몰라 준씨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드디어 새벽 여섯시.

준씨는 영감측이 준비했던 황금을 몽땅 건너받는 데에 성공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영감은 이 편을 그리 의심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귤껍질처럼 우툴두툴하고 누우런 얼굴이 끝까지 무표정하였다.  

손을 털고 일어서면서 영감은 준씨를 보고 싱긋 웃었다.  

준씨는 넉살좋게 마주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역시 우수한 사기꾼이야. 이 멍청한 영감님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것을 몰랐을 거외다….

 

 

  

렇게 해서 사기꾼적 소질이 농후한 준씨는

무사히 한밑천을 잡아 그의 가구점을 대폭 증축하였다.

가구점의 증축을 마치고 증축기념 막거리 파티를 주최한 자리에

친구인 최사장이 나타났다. 

"어서 오게, 최형.

이 유쾌한 파티가 열릴 수 있었던 것은 최형 덕택이라고도 볼 수 있어....  

최형! 뭐 새삼스럽게 나의 사기솜씨에 감탄할 필요는 없네."

 

연거푸 들이킨 막걸리에 불콰하니 취한 우리의 준씨가 이렇게 너스레를 늘어 놓았지만

최사장은 웃지않았다. 

준씨는 계속 지껄여대었다.

 

"최형. 내가 밑천이 짧아서 금 몇냥쭝밖에 못 이긴 것을 생각하면 공연히 약이 오르는구먼.  

최형 같이 바둑도 2급에다가 돈이 많아서 여기저기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 신분이었다면 

그야말로 톡톡히 한 몫 보는 건데 말이야… 끄윽!"

 

이때 최사장이 준씨의 두 귀를 꼭 붙잡고 말했다. 

"임마 난 망해버렸다. 그 영감하고 큰 판을 벌였다가 아파트 한덩어리가 날아 갔단 말이야."

 

준씨는 술이 버쩍 깨었다. 

"뭐라고? 최형은 2급이잖아?"

 

"영감은 1급실력이었어."

 

준씨는 최사장이 아무리 귀를 흔들어대도 도통 아픈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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