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관철동

2007. 7. 20. 11:09책 · 펌글 · 자료/예술.여행.문화...


 

눈물겹고 희극적인 행적

   - 유해수 편 -

  

 

 


한국기원 3층의 일반회원실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기원이다.  
2천원을 내고서 하루 온 종일 바둑을 둘 수 있는 곳.
그러니까 시중의 일반 기원과 똑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손님들의 대부분이 노인들이라는 것.
노인들은 한국기원이라는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의식하는 듯하다.
노인정이나 파고다 공원으로 출근하는 것보다
한국기원으로 오는 것에 어떤 등청의 기분을 맛보는 것으로 보인다.

노인들에게도 친구가 있고 라이벌이 있다.
담배 한 두 갑 상당의 돈을 걸고 노인들은 신선놀음을 한다.
때로는 개구쟁이 아이들처럼 멱살잡이를 하고 싸우기도 한다.

개는 곱게 늙은 분들인데 그 가운데는 왕년에 고관 대작을 지낸 사람도 있고
기업체의 명예회장도 있다.
정치깡패 출신도 있고 사기꾼 전력을 가진 사람도 있으며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다섯번 떨어진 사람도 있다.
저마다 진한 사연들이 있겠지만 바둑판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할 뿐이다.

과거에 손이 검었든 희었든지, 또는 힘이 세었든 약했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름진 얼굴에 하얀 머리카락. 이젠 피차 노인일 뿐이다.
꿈도 열정도 탐욕도 모두 빛을 바랬고
지난 날의 모든 끗발이 소용 없어진 노인들이 한 판 바둑을 두고 가는 곳.
한국기원의 일반 회원실.

희한한 것은 10년 넘게 마주앉아 바둑을 둔 사이면서도 상대방의 신분이나
환경에 대해 감쪽같이 모르는 예가 많다는 점이다.
그저 혜화동 산다는 박씨 숭인동 산다는 강씨... 이런 식이다.

나이가 70 이라지 아마...
어느날 갑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그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이사를 갔거나 이민을 갔거나 병들어 누웠거나 죽었거나...
이따금 노인들은 바둑두다 말고 피식 쓰러져 그대로 숨을 거두기도 한다.
1년에 한두 번은 그런 일이 목격된다.
피식 쓰러진 이웃을 바라보며 노인들은 자기가 갈 날도 멀지 않았음을 잠깐씩 생각한다. 

 

그러한 노인들 가운데 유해수 씨가 있었다. 

6척 장신에 큼지막한 손. 장난꾼인 강홍규씨(89년에 타계한 소설가)의 관찰에 의하면
남성의 상징물도 매우 웅대했다는 유해수.
60 년대에는 관전기를 쓴 일도 있으며
문예지에 수필을 발표한 일도 몇번 있다고 하는 유씨.
그는 81년 봄에 65세로 눈을 감았는데 말년의 12년 동안 감자국이나
동태찌게를 함께 들거나
나란히 앉아 남의 바둑을 구경한 것이 필자와의
인연이었거니와...

이 유씨의 눈물겹고도 희극적인 일련의 행적은
지금까지도 관철동의 전설이 되어 심심찮게 되뇌어진다.
그 하나는 그가 방 내기로 거금을 딴「남포동대첩」의 얘기이고,
또 하나는 그가
「언젠가는 백마를 타고 나타나줄 봉중의 봉」을 잡기 위해 개미귀신 처럼
줄기차게
거의 30년을 기다리다가 죽었다는 얘기이다. 

 

 

 

유해수는 쇼의 명인이었다.
무슨 쇼냐 하면 바둑의 고수이면서도 하수인 척하는 쇼였다.
그 방면에 관한 한 그는 천재적이었다.
그의 본래의 바둑실력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조남철 선생조차도 그의 실력을
제대로 모르겠다고 할 정도였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그가 만약 50 년대에 프로입단대회에
출전했더라면
입단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추리가 성립되는 그런 수준이었다.
그러므로 관철동의 표준1급으로 행세하는 강홍규나 필자는

2점 내지 3점을 놓고 두어야 비로소 승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군이나 필자는 유씨와 바둑을 둔 일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유씨는 한 두 번 손님과 바둑을 두어 본 후에 그 손님이
'봉적인 가치'가 전무해 보이면
다시는 바둑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늘 수입의 1백%를 술값으로 날리고 자주 차비 걱정을 하는 날건달인
우리에게
봉적인
가치가 있을 턱이 있었겠는가.
그것을 쉽게 간파한 유씨는 우리와 바둑두기를 단념했는데
그대신 날건달 동지로서 우정을 품어주었다.
연령을 초월하여 조성된 우정은 어느날 급기야 그의 고백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남포동 대첩의 고백이었다. 

 

 

 

때는 부산 피난 시절.
남포동의 어느 기원에 마카오 신사 하나가 나타났다.
척 보매 돈푼깨나 있어 보이는,

그러니까 유씨가 보기에「봉적 가치」가 있어 보이는 작자였다.

기력은 5급이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5급이면 상당한 고수에 속했다.
신사는 거드름을 피우며 매일 나타났다.
유씨가 그에게 접근하여 수작을 텄다.
차내기 한판 두자고 하며 두 점을 접어 보이겠다고 했다.
신사는 초면에 두점을 놓으라는 유씨가 매우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그 제안에 응했다.
결과는 물론 유씨의 불계패, 또 두었는데 역시 유씨 의 패배.

신사는 맞두겠다고 나섰으나 유씨가 고개를 흔들었다.
유씨는 날마다 조금씩 졌다.
실제로는 다섯 점을 접어주고도 이길 수 있는 상대였지만
유씨는 잠자코 패배하고 또 패배하면서 슬슬 내기의 액수를 높여 나갔다.

자그마치 3개월동안 꾸준히 액수를 높인후에 유씨는 슬그머니 철야 방내기 를 제안했다.
신사는 두말없이 응했다.
유씨는 지금으로 치자면 1천만원 쯤이든 저금통장을 내보이며
슬쩍 돈자랑을 했다.
귀하도 이 정도는 가져와야 내기가 성립된다는
암시였다.

 

여관의 조용한 한 방에서 봉 사냥이 드디어 벌어졌다.

냉철한 유씨는 우선 첫 판을 한 방 져주고 둘째 판도 한방을 져주었다.
그리고는 셋째 판을 만방으로 이겼다.
이 공식을 철저하게 지켜나갔다.
승리의 기쁨을 맛보는 횟수는 2대1로 신사가 많았다.
그러나 돈은 10대 2로 유해수가 계속 땄다.

새벽이 되자 신사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다.
자꾸 자기가 이기는 데도 돈은 나가고 있으니.
신새벽에 마지막 돈까지 몽땅 털린 신사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나가더니
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남포동 기원에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방의 충격으로 머리가 아주 돌아버렸다는 소식이 풍문에 들여왔다.

 

 

 

하룻밤에 일확천금을 한 유씨는 매우 보람을 느꼈다. 

그는 배전의 열성을 가지고 봉을 찾기 시작했다.
봉찾기에 인생을 걸었다.
매일 조석주야로, 일구월심으로 봉을 찾아 헤매기 시작하였다.

13급 행세, 하수 연기도 프로일확천금의 경험은 인간의 정신을 황폐하게 하는법.
유해수는 남포동에서의 하룻밤 대첩이래로 인생살이의 노선을 세웠다.
비록 프로기사로 입신양명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따금씩 봉을 잡기만 하면
일년내내,
아니 평생토록  우화등선으로 살 수 있으리라는 셈속이 선 것이었다.

 

환도후에 조남철씨가 명동에 송원기원을 차리자
유해수는 이 기원에 잠복하여
봉을 기다렸다.
그는 봉적인 가치가 있음직한 후보를 날이면 날마다 기다렸다. 

 

한편 그는 봉을 맞이할 준비태세를 가다듬었다.

실제로는 바둑에 관한한 그가 일류 강자였지만
원래 강자에게는 봉이 잘 붙지 않는 법 아닌가.
그는 하수연하는 연기력을 갈고 닦을 필요를 느꼈다.

 

송원 기원에서 그가 13급 행세를 하다가

원장인 조남철 씨에게 꾸지람을 들은 얘기 한토막을 하면...


어느날 촌로 하나가 찾아들었는데 13급이라면서 맞수와 두고 싶다는 것이었다.
유해수는 자기도 13급이니 마침 잘됐다고 하며 나섰다.
13급 하수들 특유의 서투른 손놀림,

한심무쌍한 행마,

완생인 상대방의 대마공격하기,
발등에 떨어진 불 못 본체하기...
그뿐인가. 물러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못 물러주겠다고 성을 내기도 하고...
그의 13급 연기는 실로 완벽 그것이었다.

세판쯤 두었을때 원장 조남철 씨가 그 광경을 보고 다가와 꾸짖었다.
"유선생, 장난이 지나치지 않소!"
민망해진 유해수가 슬그머니 일어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촌로가 유해수의
소매를 붙잡았다.
당신 같은 호적수는 난생 처음 만났으니 딱 한판만 더 두자는 것이었다. 

 

 

송원기원이 문을 닫자

유해수는 그의 잠복처를 관철동의 한국기원으로 옮겼다.
세월은 흘러
그의 나이 어언 환갑을 바라보게 되었건만

몽매에도 그리며 기다리던 봉은  나타나 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점점더 약아져 갔고

봉은 봉들끼리만 노는지 관철동에서는 도무지  만나지지를 않았다.

늙은몸에 병이 슬슬 찾아들었고 눈도 침침해졌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군자금이 없었다.
그는 초면의 손님에게는 무조건 져주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하루에 최소한 자금 3천원내지 1만원은 필요했다.
그런데 그 자신은 투자라고 생각하고 지불하는 3천원내지 1만원이 점점
부담스러워지더니
급기야는  조달 불능이 되고 말았다.

한 때는 수필가로 인정받아서 정통 문예지에도 심심찮게 글을 기고한 그였지만
그 수입이라야 실로 하찮은 것인데다 장마다 꼴뚜기 나는 것도
아니고.....

 

 

매우 빈한해진 말년의 그의 행적이 원근에서 풍문에 들려왔다.

미아리에서 9급 행세를 하더라고,
홍제동에서 7급 행세를 하더라고...
담뱃값이나 조히 따는 모양이더라고,

그리고 얼마 후에 별세의 소식이 왔다. 

결국 그는 남포동 대첩이후 거의 30년 동안을

일구 월심으로 봉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관철동의 디오게네스' 민병산은 유해수를 일러 말했다.
"유해수는 이승만 이래의 최고 인격자이다."
매일 져 주는 일은 범인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얘기였다.



- 굿바이 관철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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