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8. 5. 17:27ㆍ이런 저런 내 얘기들/네 얘기 · 쟤 얘기
긴 편지...석달 전 헤어진 당신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설사 그게 그 순간 진실이었더라도
당신이 이 편지를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내가 봄날 저녁 당신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생을 지나칠 확률이 훨씬 높겠지요.
그래요. 당신에게 말을 걸며 정작 들여다보는 건 나 자신이 될 것 같네요. 나는 지금 선운사에 내려 와 있습니다. 얼마전 술을 한 잔 하고선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온 후배가 내게 그러더군요. 한 자락 놓고 살라고, 봄이니까 이제 그래도 되지 않겠느냐고.
그 말이 가슴에 콕 박힌 채 떠나지 않고 있었는데, 선운사에 동백을 보러 가지 않겠냐는 그 이의 제안에
차마 엄두내지 못하고 있던 터라 조금은 두렵기도 했지만, 워낙에 남의 맘 헤아려 어루만져 주는데 한 가닥 하는 친구인지라 그저 믿고 따라내려 왔지요.
참당암, 도솔암 지나 낙조대에 올랐습니다. 거기엔 한순간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이곤 바다로 몸을 던져 숨을 거두는 붉은 해가 있더군요.
얼굴이 불콰해져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어제밤처럼 오늘도 우린 각자가 배낭 속에 넣어온 책을 꺼내어 읽고 있었습니다. 그이는 최명희의 혼불 세권째 권, 나는 하루키의 단편집이로군요.
그러다 문득 가슴이 먹먹해져서 펜을 들었습니다.
그래 봄이니까, 당신에게 한 자락 놓아버려도 되지 않을까 싶어 스스로를 달래며 당신을 생각해 봅니다.
당신과 헤어진 지 이제 석 달이 되어 갑니다. 지난 석 달간 내가 힘들어서 혼자서 울기도 많이 했다는 걸 당신은 알는지요? 당신이 보기엔 내가 씩씩하게 견뎌내는 걸로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원해서, 당신을 설득해서 헤어진 건 나였는데, 상처입고 쓰러진 것도 나였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또 그저 쓸쓸하게 웃기만 할건지요?
그리고 우린 가정을 꾸리기도 해서 1년 8개월 남짓 남은 생을 함께 갈 꿈을 꾸기도 했지요.
누군가와 함께 살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우위에 놓고 지내보지 못한 그 시간들. 한 번도 당신을 위해 나를 희생하거나 양보하지 않았던 시간. 사소한 내 삶의 습관조차 바꾸어 내지 못했으면서 당신에게 무리한 변화를 요구했던 시간.
당신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지요.
아파트 평수를 늘려가며, 가족들과 티격태격하며 소진하다가 세상을 뜨는 것이라는 걸... 그 모든 서걱거림과 결코 나누어지지 않는 자기만의 외로움을 다지고, 그저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만이 내게 남겨진 일이라는 걸 인정하기가 두려웠던 거지요.
반복되는 일상에 숨이 막혀 오고, 산 채로 박제가 되어가는 듯한 기분. 내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한국사회에서 결혼한 여성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덕목들의 부담스러움. 아직 포기하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는 한줌 남은 내 꿈과 욕망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걸 지켜만 봐야 한다는 게 무서웠습니다. 나 역시 내가 원하는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당신을 보는 게 힘들었습니다.
두려웠으니까요.
그렇지 않았겠지요. 당신의 신념과 행동을 일치시키며 살아온 보기 드문 남자라는 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는데, 내가 어떻게 그들을 설득할 수 있었겠어요?
'이건 내 길이 아닌 것 같아요.' '난 그저 자유로운 영혼으로 이 세상에 머물다 가고 싶어요' '난 결혼생활을 감당할 만한 품성의 소유자가 아니예요' 이런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는데 그걸로 누가 나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나를 가장 잘 아는 당신조차 오래도록 이해하지 못했는데...
주부와 며느리와 아내라는 내가 결코 해 내지 못할 것 같은 역할만 벗어난다면, 자유롭고 안정된 상태에서 내가 꿈꾸었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누구도 만나지 못하고, 혼자서 숨죽여 울고 있었더랬습니다.
침대에 쓰러져 다음날 출근시간까지 열다섯시간을 내리 잠에 빠져 있는 일이 한 주에 한 두 번은 일어나곤 했습니다. 아니면 잠들지 못하고 좁은 집안을 서성거리며 새벽을 맞아야 했지요. 보리차조차 끓이지 못해 생수를 사다먹는 날들이 이어졌고, 그렇게도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던 내가 주말 내내 집안에 틀어박혀 한 발자국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일들이 종종 있곤 했지요.
그래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서, 혹은 사회생활 하는 이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를 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러 나갈 땐, 늘 예상되는 질문과 답변들을 연습하곤 했습니다.
지극히 사적인 질문들을 그 무게를 생각하지도 않은 채 물어오지는 않겠지...
하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나는 지난 2년간 해 오던 답변들을 반복했을 뿐이었습니다. "예. 결혼했어요."
당신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에게는 "잘 지내요."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곤 했지요. 그게 얼마나 거북스러운 과정들이었는지, 솔직하지 못한 내 자신이 얼마나 싫었는지... 언젠가 버스를 타고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데 버스 안에서 이승환의 노래가 나오더군요. '...너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 나를 어렵게 만드는 얘기들...'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느라 입술을 깨문 채 서둘러 버스를 내린 저는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울었지요. 유행가 가사에도 눈물이 솟구쳐 오르고, 누군가의 스치는 말 한 마디도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러오길 몇 차례.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는 상처를 계속해서 드러내야 하는 일의 막막함. 혹, 당신도 견뎌내고 있는 일상인가요?
당신과의 관계에서 실패한 것이 세상 모든 관계에서 실패한 것처럼 여겨져 자꾸 움츠러들곤 했지요.
정신차려. 세상이 끝난 거 아니잖아. 너 혼자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마. 계속됐지요.
그건 인간성 전체가 의심당하는 치명적인 결함이 될 수 있음을, 그래서 결혼이라는 건 여성에게 기득권으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생생한 경험으로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TV의 소리였던 거 기억나지요. 우리 둘 다 유난히 사람들이 드나드는 걸 좋아해 집엔 늘 사람들이 북적대곤 했는데 난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소리는 잘 견뎌냈으면서도, 어쩌다 그들이 TV라도 틀어놓을 때면 그 소리가 너무 괴로워 얼른 돌아가 주기를 기다리곤 했을 정도였지요. 두려워질 때면, 우습게도 TV의 그 시끄러운 소음이 내게 위안이 되기도 하더군요. 몸을 일으킬 것만 같아요. 사라져버린 공룡의 척추뼈가 놓여져 있습니다. 내가 지질학과 선생님께 그걸 선물받고 당신에게 자랑하던 일이 생각나나요?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잠시 동안만 웅크리고 있는 것일 뿐, 넌 곧 깨어나 저벅 저벅 발소리를 내며 다시 지구 위를 걸어 다닐 수 있을 거야... 라고.
수 백통의 편지와 카드, 농활이며 모꼬지를 갈 때면 늘 한 줄씩 돌려쓰던 쪽지, 그리고 일기장들... 그 속에 물론 당신의 편지와 사진들도 있더군요. 가까이 머무는 이들에게 잘하자 순간 순간 다짐하며, 계획하며 살아가던 날들이었는지...
보여줘 왔지요. 그 날 밤 동생들과 비디오를 보다가 화장실을 다녀오는 데 안방 문 너머로 엄마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던 엄마는 울면서 그러시더군요. 내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라고.
한 밤중 숨죽이며 울음을 터트려야 하는 건지... 정말로 내 인생이 완전히 실패한 듯 느껴지더군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또 무엇이고요?
삶은 뜻하는 대로 가는 거라고,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기 마련이라고 믿고 살아왔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무언가를 얻지 못하는 건 그만큼의 노력이 부족하거나 간절히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개인의 의지부족을 탓하곤 했지요.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삶이 언제나 뜻하는 대로 풀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인생의 길엔 예기치 않은 복병이 숨어 있다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걸. 하나를 얻기 위해선 다른 소중한 것 하나를 내어 줄 수도 있어야 함을.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되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요. 서른 해를 살아오면서 섣불리 타인의 고통과 상처를 이해한다고 말해왔던 것. 용서를 구합니다. 설사 그것이 그 순간의 진실이었다 할지라도...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가까이 머물러 주는 것뿐임을, 때로는 그 일이 최고의 위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프게 깨닫고 있습니다.
그래도 내 곁에 남아 준 사람들이 있더군요.
당신에겐 지금 위안이 되는 이 있나요? 외롭고 지친 당신 곁에 누가 머무르며 상처를 더듬어주고 있나요?
당신과 함께 한 그 세월을 부정하려 하지는 않겠습니다. 10년 동안 내 곁에 있었던 당신이란 존재. 내 삶에 주어졌던 최고의 축복이었음을 인정합니다. 당신이 내게 가르쳐 준 것 가슴에 담지 못할 정도로 크고 가득하다고. 우리가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당신은 나를 부끄럽게 한 내 삶의 훌륭한 선생님이었다는 거. 당신의 생에 대한 낙관적 태도와 사람에 대한 그 깊은 이해의 폭을 질투했지만 사실은 존경했다는 거. 당신이 내게 해 준 그 모든 것들과 격려의 말, 나를 위로해 주던, 혹은 따스하게 비판해주던 모든 기억들 잊지 않고 살아가겠다고.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젠 너무 늦었지요?
가끔씩 잠 못들고 뒤척이는 밤에는 그런 생각을 하곤 해요.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신이 있다면 내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이런 삶을 선택할 자유의지를 주신 걸까. 이 길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끝까지 간 후엔 무엇을 가지게 될까. 이제 나에게 남겨진 건 그저 계속해서 걸어가는 일 밖엔 없는 걸까.
힘과 용기가 되는 그런 친구로 남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한 때 당신 가장 가까이 머물렀던 사람으로서 당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아직 나를 믿고 내 곁에 머물러주는 가까운 이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러나 머뭇거리지 않으며 살아가겠습니다. 그러니 이 편지는 그 길고도 숨막혔던 시간 속에서 빠져나와 세상 속으로 나가고자 하는 내 첫 발디딤인 셈이지요. 나, 이제 그만 울겠다고. 용감하고 정직하게 세상과 화해하고 대면하겠다는... 당신, 지켜봐 주시겠지요? 당신의 안녕을 빕니다.
|
'이런 저런 내 얘기들 > 네 얘기 · 쟤 얘기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람부는 날이면 (0) | 2007.08.24 |
---|---|
김남희 편지글 (0) | 2007.08.09 |
딸 이야기 (0) | 2007.07.30 |
황당 1 (0) | 2007.07.27 |
술의 찬가 (0) | 2007.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