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절규>'에 대한 해석

2020. 6. 24. 20:53미술/미술 이야기 (책)

 

 

 

 

 

작품에 내면을 드러낸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

 

1863년 12월 12일
1944년 01월 23일
노르웨이
〈절규〉, 〈병든 아이〉, 〈마돈나〉, 〈사춘기〉 등

 

 

 

 

 1  

 

 

“어느 날 저녁 나는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한쪽에는 마을이 있고 아래에는 피오르가 있었다.

피곤하고 지친 느낌이 들었다.

해가 저물고 있었고, 구름이 피처럼 붉게 변했다.

나는 자연을 뚫고 나오는 절규를 느꼈다.

그 절규는 마치 실제처럼 들렸다.”

 

마치 소설의 한 구절 같은 이 문장은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가 작품 〈절규〉를 작업하게 된 계기에 대해 토로한 것이다.

 

〈절규〉는 요동치는 선과 거친 붓질, 왜곡된 형상으로

현대인이 지닌 내면의 불안과 공포를 표현한 작품으로,

실존에 대한 고통을 형상화하며 독일 표현주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수많은 상품들로 복제되어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근대 회화 작품 중 하나이기도 하다.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 노르웨이 뢰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의관 출신 의사인 크리스티안 뭉크이며, 다섯 남매 중 둘째였다.

뭉크가 삶과 죽음, 인간 존재의 근원에 자리한 고독과 불안 등을 주로 표현한 것은

어린 시절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태생적으로 병약했고,

그가 5세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했으며,

14세 때에는 그가 잘 따랐던 누나 소피에가 결핵으로 사망했다.

어린 시절은 그에게 늘 죽음을 생각하게 만들었고,

또한 그와 누이동생은 불안장애와 강박, 공황장애를 앓기까지 했다.

 

“질병과 정신 착란, 죽음의 검은 천사들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요람 위에서 나를 굽어보았다.”

라는 말은 뭉크의 작품들이 지닌 절망적인 분위기와 고립에서 오는 불안감의 근원을 설명해 준다.

〈병든 아이〉, 〈죽음의 방〉, 〈죽음의 침상 곁에서〉와 같은

초기작에서 드러나는 질병에 대한 불안과 죽음에 대한 응시는 뭉크 작풍의 기저가 된다.

 

병약하여 주로 방 안에서 지냈던 뭉크는 종종 침대나 바닥에 누워 집 안 모습이나 약병 따위를 그렸다.

정식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고,

16세 때 아버지의 바람대로 공업기술학교에 들어가지만 잦은 병치레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8세 때 오슬로의 미술공예학교에 들어갔다.

이듬해에는 같은 학교에 다니던 동료 여섯 명과 함께 작업실을 빌려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에 뛰어들었다.

 

이때 노르웨이의 자연주의 화가 크리스티안 로크의 지도를 받았는데,

그로부터 프랑스의 인상주의를 처음 접했다.

무엇보다 그의 작풍에 영향을 끼친 것은 극단적 자유주의자 그룹인 '크리스티아나 보헤미안'이다.

1886년에 열린 화가들의 축제에서 뭉크는 소설가 한스 예게르를 만났고,

같은 그룹의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 등과 교류했다.

인습과 윤리, 예술에 있어 자유분방하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과의 만남은

뭉크에게 감정의 해방을 맛보게 했고,

이는 그가 표현주의적 화풍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885년, 뭉크는 〈병든 아이〉, 〈그날 이후〉, 〈사춘기〉 등을 완성했고,

이듬해 〈병든 아이〉를 오슬로 가을 전시회에 출품했다.

이 작품은 거칠고 암울한 묘사 방식으로 비평가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들로부터 물감을 터무니없이 많이 칠한 데다 형태도 제대로 표현되어 있지 않다는 혹평을 들었다.

그럼에도 뭉크는 이 작업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뭉크는 1889년에 개인전을 열었고,

이 덕분에 장학금을 받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로 유학 갈 기회를 얻었다.

에콜 데 보자르에서 뭉크는 레옹 보나에게 그림을 배웠지만,

그림 수업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몇 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그러나 2년간 파리에 체류하며 툴루즈 로트레크, 폴 고갱 등에게 매료되면서 화가로서 전환점을 맞이했다.

뭉크는 이들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두려움에 마주하는 도구로 그림을 대하게 되었고,

개인적 경험과 감정을 그림에 투영하여 현대인의 내면 심리를 묘사하는 화풍을 발전시켰다.

 

1892년,

뭉크는 베를린 예술가협회의 초청으로 베를린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약 55점의 작품을 출품한 이 전시회는 열리자마자 독일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으며 1주일 만에 막을 내렸다.

인습과 전통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분방한 회화적 형상들은

“대충 얼버무린 듯 그려 더러는 이게 사람을 그린 건지조차 분간이 안 된다.”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소란은 오히려 독일 예술가들이 뭉크를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는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인정받게 된다.

 

뭉크는 베를린에 거처를 정하고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4년간의 독일 체류를 거쳐 1908년 신경쇠약에 걸릴 때까지 뭉크는 화가로서 가장 중요한 나날을 보냈다.

독일에서 그는 그래픽 아트의 영향을 받아 판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에칭, 석판화, 목판화 등을 제작했으며,

그의 판화는 회화 작품들처럼 솔직하고 단순한 형상, 강한 주관성을 띠고 있다.

또한 그는 주요 작품 중 일부를 에칭과 석판화 등으로 다시 제작하기도 했는데,

그중 한 작품이 〈마돈나〉이다.

 

1893년, 뭉크는 〈생의 프리즈-삶, 사랑, 죽음에 관한 시〉의 연작 스케치를 시작했다.

사랑의 깨달음,

사랑의 개화와 죽음,

생의 불안,

죽음이라는 네 가지 주제로 이루어졌으며,

인간 존재의 다양한 면모를 담으려 한 이 시도를 통해 뭉크는 자신의 삶 전체를 되돌아보려 한 듯하다.

 

〈목소리〉, 〈사춘기〉, 〈키스〉, 〈남과 여〉, 〈폭풍우 치는 밤에〉, 〈재〉, 〈멜랑콜리〉, 〈병실에서의 임종〉 등으로 이루어진 이 연작은 1893년 작 〈절규〉와 1894년 작 〈마돈나〉로 유명하다.

〈마돈나〉는 뭉크가 지닌 여성에 대한 이중적인 의미가 표현된 작품이다.

그는 1885년 프란츠 탈로의 형수인 밀리 탈로에게 빠져 그녀에게 온 마음을 바쳤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닌 그녀와의 연애는

뭉크를 질투로 인한 신경쇠약과 정신착란 지경으로 몰고 갔고,

그 결과 그는 여성혐오증에 걸렸다.

뭉크에게 ‘마돈나’란 성스러운 마리아이자 남자를 유혹해 파멸로 몰아가는 팜므 파탈이었고,

유혹적인 동시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섹슈얼리티와 죽음이 순환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표현하는 이 작품을 그는 시로 표현했다.

 

 

〈마돈나〉

오슬로 뭉크 미술관

 

 

1899년, 뭉크의 여성혐오증을 심화시키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해 그는 상류 계층의 여성인 툴라 라르센을 알게 되는데,

그녀의 집착과 집요한 결혼 요구로 뭉크는 그녀와 얼마 안 가 헤어지고 만다.

그녀는 뭉크 앞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소동을 부리다 뭉크의 손가락에 총알을 관통시켰다.

뭉크는 이때의 경험을 후일 〈살인녀〉와 〈마라의 죽음〉 등으로 표현했다.

 

뭉크는 평소 조울증과 알코올 중독, 불안과 환각 증세를 지속적으로 겪었고,

1908년 결국 신경쇠약으로 코펜하겐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이듬해 요양을 마친 그는 노르웨이로 돌아갔는데,

이후 그의 작품은 좀 더 낙천적으로 변화했다.

자신의 고독과 불안을 묘사하는 데서 벗어나 직접 자연으로 나가 보고 느낀 풍경을 풍요롭고 힘차게 그렸다.

색채는 화려하고 풍부해졌으며 밝아졌다.

 

뭉크는 오슬로에 정착한 이후에도 베를린, 파리, 프랑크푸르트, 런던 등지를 여행하며 작품 활동을 계속했고,

베를린과 오슬로, 뮌헨, 코펜하겐, 취리히, 런던, 미국 등지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렸다.

1933년에는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성 올라브 대십자 훈장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화가로서의 경력이 시작된 독일에서도 큰 영예를 얻었다.

그러나 1937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해 그의 작품이 ‘퇴폐 미술’로 규정되면서 수난을 겪기도 했다.

 

말년에 뭉크는 오슬로 근처 에켈리에 마련한 저택에서 홀로 지내면서 그림을 계속 그렸다.

눈병을 앓고 실명 위기에 처했으나 그에게는 어떤 장애도 되지 않았다.

1944년 1월 23일, 뭉크는 자신의 모든 작품과 재산을 오슬로 시에 기증하고 고독과 평화 속에 눈을 감았다.

80번째 생일이 지난 지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1963년에 뭉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오슬로 시에 뭉크 미술관이 개관되었다.

 

 

 

 

 

 

 2  

 

 

영국박물관에 전시될 뭉크의 '절규' 판화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대표작 ‘절규’(Scream)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왔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림 속의 인물이 ‘절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절규’를 듣고 있다는 것이다.



20일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다음 달 대규모 뭉크 전을 준비 중인 영국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이 ‘절규’의 흑백판화를 전시하며 이 같은 해석을 내놓았다고 보도했다.

작품 속의 인물이 절규하는지, 아니면 절규를 듣고 있는지 지난 수십 년간 논란이 된 바 있다.

영국 대영박물관은 이번 뭉크 전에서 ‘절규’의 흑백판화를 전시하며 뭉크의 설명을 인용해 이런 해석을 내놨다.

이 박물관이 이번에 전시한 석판화에는 색채화와 달리 “나는 자연을 통해 거대한 절규를 느꼈다”는 뭉크의 영감을 표현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에 비춰볼 때 작품 속 모습은 사람이 절규하는 모습이 아닌 자연의 절규를 듣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번 전시를 준비한 영국 대영박물관 큐레이터로 줄리아 바트럼은

“뭉크는 1892년 오슬로 주변의 피오르를 산책 중 핏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보고 깊은 심리적 영향을 받았으며

'절규'를 통해 당시 감정이나 순간을 포착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람들은 작품 속 사람이 '절규'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당시 상황은 그렇지 않다”면서

“한 사람이 자신의 주위로부터 들려오는 자연의 절규를 느끼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상징적인 인물이 언덕에서 자연의 외부 힘에 반응하고 있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면서 “다만 뭉크가 표현한 부분이 실제적인 힘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심리적인 것이었는지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덧붙였다.

뭉크 절규에 대한 해석은 미술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오슬로 소재 뭉크미술관 군나르 소에렌센 전 관장은 “자연 속의 절규일 수 있고 사람이 절규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해석의 문제"라는 다소 모호한 입장을 밝혔다.

반면 후임자인 스타인 올라프 헨리셴 관장은 "영국 대영박물관이 옳다"면서 '절규'에 대해 많은 해석이 있으나 뭉크 자신의 설명대로 '절규'는 '자연의 절규를 들으며 자신의 귀를 가리는'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해석하든 개의치 않는다고 덧붙였다.

한편 영국 대영박물관은 오는 4월11일부터7월21일까지 '에드바르트 뭉크:사랑과 고뇌'라는 주제의 뭉크 전을 개최한다.

전시작품 가운데 단연 하이라이트는 '절규'로 판화의 흑백처리는 하늘의 물결 모양 라인을 강조하고 있으며 인물 주위로 소리굽쇠 반향 효과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박물관 측은 설명했다.

이민정 기자 lee.minjung2@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뭉크 '절규' 새로운 해석…“절규가 아닌 절규를 듣는 중”

 

 

 

 

 

 

 3  

 

뭉크의 그림들은 대부분 인간내면의 불안, 공포 등을 표현했기에 그를 표현주의 작가라고 한다.

그의 그림을 보는 순간 무언가 으스스한 다른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왜 그럴까?

그것은 그의 삶 자체가 불안하고 우울했기 때문에 그러한 내면세계가 화포 위에 토해져 나오게 된 것이다.

그의 몸은 여러 가지 병을 갖고 있었는데 결핵과 천식, 류머티즘, 불면증, 공황장애 등을 앓았다.

그의 가족사를 보면 뭉크가 6살 때 당시 30살이었던 어머니가 결핵으로 죽고,

14살엔 누나 소피에도 결핵으로 죽는다.

여동생 중 한 명은 어린 나이에 정신병 진단을 받았으며

그 동생을 평생 뭉크가 돌보아 주어야 했다.

5형제 중 유일하게 결혼했던 남동생 안들아 마저 결혼 후 몇 달 만에 죽었다.

거기에다가 그의 아버지는 신경질적이고 강박증이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계속되는 가난 때문에 더욱더 고통스러워하며

그 고통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려고 더 광적으로 변해갔다.

그가 훗날 회상하기를

“아버지로부터 나는 광기의 씨앗을 물려받았다.

공포, 슬픔 그리고 죽음의 천사는 내가 태어나던 날부터 나의 옆에 서 있었다”

“나는 인류가 가장 두려워하는 두 가지를 물려받았는데 그것은 병약함과 정신병이다”라고 말하였다.

“기억할 수 있을 때부터 나는 줄곧 깊은 우울과 고뇌에 빠져 있었다.

이 우울을 나의 미술 속에 표현하려고 했다.

만약 우울과 고통이 없었다면 내 미술은 키 없는 한 척의 배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이런 불행한 상황을 그림으로 표현하며 자신에게 위안을 주며 살아야 했다.

즉 그의 그림들은 자신의 내면적 고통을 그려낸 것이다.

     
 

이제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은 1893년 그의 나이 30세 때 마분지 위에 유채, 템페라, 크레용, 파스텔로 그렸다.

주변 풍경을 보면, 검푸른 강물 위에 붉고 노란 구름이 일렁이고 있다.

그리고 다리 위엔 세 사람이 걷고 있으며 둘은 무심히 걸어가고 있는데

한 인간은 무엇 때문인지 뒤돌아서서 겁에 질린 듯 귀를 막고 어마어마하게 큰 고함을 지르는데

그 소리가 공기를 진동하며 온 천지에 울려 퍼지고 있다.

눈동자는 죽어갈 듯이 동공이 쪼그라들었으며

머리는 벌써 죽은 오래 된 듯한 해골처럼 표현했다.

 

그는 곧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그걸 고스란히 표현해 낸 것이다.

파스텔을 순간적으로 그은 흔적과 거친 붓질이 조금도 정제되지 않은 것은

이러한 공포의 순간을 생생하게 전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급하고 절박했던 발작의 순간을 이렇게 거친 그림으로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었으리라.

세련되고 매끄럽게 그렸다고 상상을 해 보라. 느낌이 반감되고 만다.

 

이 그림이 탄생한 과정은 이러하다.

친구 둘과 교외의 다리 위를 걷고 있었는데

해가 지고 하늘은 아름다운 노을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노을이 뭉크에게는 갑자기 핏빛으로 보이면서 공황발작을 일으켰다.

그래서 잠시 섰는데

친구들은 멀어지고 혼자가 된 뭉크는

극도로 불안한 가운데 자연의 절규를 느끼면서 부르르 떨었다고 한다.

그 핏빛 하늘을 보자 갑자기 자연을 뚫고 나오는 비명이 고막을 찢을 것 같았다고 한다.

이 그림은 그 순간 자신이 겪은 심리상태를 가감 없이 그려낸 것이다.

 

뭉크는 이러한 불안과 우울로 괴로워하면서도 정신과 의사의 치료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유는 우울한 내면이 그의 예술에 필수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고.

 

뭉크는 이 그림 외에도 50여점이나 이 그림의 변형작품을 더 그렸다는 점이다.

이 그림 이외에도 자기의 그림이 팔려 나가면 똑 같은 소재의 작품을 다시 그려두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노르웨이 오슬로 미술관에 가면 한 곳에서 그의 그림들 대부분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1944년 80세의 나이에 자신의 모든 작품들을 시에 기증했다.

그리고 그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 조국 노르웨이는 1000크로네 지폐에 그의 초상을 넣었다.

 

최영달. 전 경주미협지부장, 전 경북창작미술협회장

 

 

 

 

 

 

 

 4  

 

 

 

 

 

 

 

 

 5

 

 

Edvard Munch (1863~1944), Norway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전시중인 에드바르드 뭉크입니다.

그의 작품 90여점을 전시중인데...

그는 한가지 주제를 여러번 반복하여 그리곤 했기 때문에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만 보아도 그의 거의 전작을 모두 감상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뭉크하면 바로 떠오르는 작품 '절규, Scream'

이번 전시에는 석판화로 제작한 '절규'가 왔습니다.

워낙 유명한 '절규'라서 기대를 가지고 보게 되는데,

흑백의 판화작품이었나?

분명 어디선가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하는 강렬한 '절규'를 본 것 같은데...

이런 궁굼증이 생길 수 있지요...

 

 

 

뭉크의 절규 역시 4가지 채색 버젼과 석판화 버전이 있습니다.

뭉크는 '절규'를 1893~1910년에 거쳐 제작했답니다.

그 중에서도 1893년 가장 먼저 그렸고 오슬로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버젼이 가장 유명합니다.

 

뭉크는 '절규'와 '마돈나'를 포함하는 22개 작품을 'Frieze of Life' 라는 타이틀 아래 제작했는데,

살면서 겪게 되는 세가지 테마 'Love, Anxiety, Death'를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절규'는 어디에 속했을까요?

저는 Anxiety를 꼽았는데,

뭉크는 'Love'에 넣었습니다.

"Desparate is ultimate outcome of love'라면서...

뭉크는 판화제작에도 큰 관심을 보였고 '생의 프리즈' 작품들을 1895년부터 모두 석판화로도 제작해 둡니다.

 

 

 

 

어떤 '절규'가 가장 맘에 드십니까?

네 가지 '절규'는 각각 여러가지 이야기 거리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첫번째 '절규'는 오슬로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중

1994년 2월 미술관의 허술한 경비를 틈타 도난사고를 겪습니다.

공교롭게도, 릴리함메르 동계올림픽 개회식과 같은 날이라 더 관심을 받게 된 이 사건.

다행히 3개월 뒤 거래를 위장한 경찰의 접근으로 그림의 훼손 없이 다시 되찾게 되었지만...

 

 

 

 

이것은 세번째 있는 '절규'로 1910년 제작되었고, 뭉크뮤지엄 소장 버전인데...

역시 도난사고를 겪습니다.

2004년 8월 대낮에 관람객들이 버젓이 있는 상황에서 복면을 쓴 강도들이 이 '절규'와 '마돈나'를 떼어 내

훔쳐 달아났답니다. 카메라에도 이들의 범행장면이 다 찍혔지만

이후 2년간 범인을 잡지 못했고

용의자를 체포한 후에도 그림은 회수하지 못하여,

범인들이 증거 인멸을 위해 그림을 태워버렸다는 끔찍한 소문도 돌았고

경찰은 그림에 2백만 크로나의 현상금을 걸기도 했는데,

2006년 8월31일에 그림을 찾게 됩니다.

 

'절규'는 왼쪽 아래부분에 습기가 차고,

'마돈나'는 오른쪽에 몇 군데가 약간씩 찢기고, 팔에 두 군데 구멍이 나는 훼손을 입은 채로...

 

 

뮤지움측은 그림 회수 후 9월27일부터 딱 5일간 훼손된 상태의 '절규;와 '마돈나'를 전시했고,

노르웨이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화가 뭉크의 대표작이고 또 도난사건으로 유명세를 탄 데다가,

극적으로 돌아왔는데, 훼손까지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큰 관심 속에 전시가 진행되었을지...

이후 복원작업을 거친 두 작품은 2008년 5월부터 재전시에 들어 갔다고 합니다.

 

 

 

'마돈나' 역시 이번 전시에는 석판화 버전이 왔습니다.

채색 석판화 버전의 테두리에 꼬물꼬물한 물체들은 '정자'들이고요...

왼족 아래 귀퉁이에, 당당하고 부끄럼 없는 자태의 마돈나에 대비되는 왜소하고 움츠린 남성은 뭉크 자신입니다.

 

다시 '절규'로 돌아가서....

 

네번째의 '절규'는 역시 1893년의 그 유명한 '절규'와 같이 제작되었으나,

색이 어둡고, 완성도가 떨어져 한동안 과연 뭉크의 작품이 맞나 의심을 받기도 했고

미완성 작품으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뭉크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Despair/1894

 

 

 

Despair/Sick Mood at Sunset/1892

 

위의 두 작품처럼 뭉크는 절규와 유사한 그림도 여러 점 그렸고,

절규의 배경만 그려 놓은 것도 있어서,

네 가지 버전중 1893년의 완성도 떨어지는 버전에 대해서

미완성작이라는 해석이 나올 법 했지요? 게다가 그의 싸인도 없었다니...

 

 

 

 

두번째 버전을 보면 색채가 가장 밝고 화려하며

뭉크 뒤에 보이는 두명의 친구들의 포즈가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그려졌습니다.

이 그림은 유일하게 개인소장 작품인데...

이 그림 틀에 뭉크가 이 '절규'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시로 써 놓았지요.

 

"I was walking along the road with two friends

The Sun was setting-The Sky turned a bloody red

And I felt a whiff of Melancholy- I stood still,

deathly tired- over the blue-black Fjord and City hung Blood and Tongues of fire.

My friends walked on - I remained behind- shivering with anxiety-

I felt the great Scream in Nature.

 

1910년 카드보드지에 파스텔로 그려진 이 '절규'는 노르웨이 사업가 페테르 올젠

(그의 부친이 뭉크의 후원자)이 소유하고 있다가

2012년 소더비 경매에서 당시까지 최고가 경매기록이던

피카소의 그림(Pablo Picas's Nude, Green Leavs and Bust) US$106.5 million을 깨고,

US$120 million에 팔렸는데, 페테르 올젠은 이 수익금은

새로운 뭉크 미술관등을 건립하는데 쓰겠다고 했답니다.

 

뭉크는 그 자신 몹시 병약했고

다섯 살에 어머니의 죽음을,

곧 이어 누나 소피의 죽음을 겪어 일생동안 불안과 두려움을 품고 살았습니다.

1908년에는 정신분열 증상으로 8개월간 덴마크의사 야콥슨의 집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는데...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관객에게 심리적 불안감을 조성하는 대각선 구도가 자주 나타납니다.

 

병약한 뭉크가 짧고 비극적인 삶믈 살았을 것 같지요?

당시로선 장수한 80세까지 살았고, 일찍부터 재능있고 유망한 화가로 알려져 어려움없이 살다 갔답니다.

 

뭉크의'절규'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는데..

전시에 가 보시면 이렇게 절망적이고 극적인 작품만 그린 화가가 아니라,

밝은 색채도 많이 사용했고,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 작품들도 다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당이 기획한 '대규모' 전이라니...

꼭 보세요~

 

 

 

* 책 중에 뭉크의 단편소설 두 편과 그의 편지들을 모은 책이 있습니다. 그리 재미있지는 않습니다..

(에드바르드 뭉크지음/다빈치 출판사/2000년)

그리고 네이버 도서관이 가지고 있는 네권의 뭉크 화집! 그의 채색화 거의 전 작품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시기별로...

재미있는 설명까지 곁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