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2. 11:21ㆍ미술/미술 이야기 (책)
[오마이뉴스 김윤주 기자]
사람들은 그를 '멋진 수염, 윤기 나는 금발 머리칼, 유행에 민감한 세련된 옷차림, 자유롭고 쾌활한 성격에 신사다운 매너, 날카로운 언변과 카리스마, 품위 있는 거리의 방랑자' 등으로 기억한다. 사교계에서의 유명세는 물론이고 카페나 화랑을 중심으로 한 문화 예술 모임에서도 그는 늘 중심에 있었다. 그것이 인기였든, 조롱이었든.
"나는 남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 것을 그린다"며 평생 고집을 피웠던, '인상주의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 이야기이다. 실제로 오르세 미술관에 걸려 있는 앙리 팡탱 라투르의 그림 <들라크루아에게 경의를 표하다>(1864)와 <바티뇰의 스튜디오>(1870)에 묘사된 마네의 모습을 보면 당대 문학과 예술계의 진보적 모임에서 그가 차지한 리더로서의 위치와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들라크루아에게 경의를 표하다>에서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였던 샤를 보들레르 옆에 서서 왼손을 주머니에 찌르고 있는 모습이나, <바티뇰의 스튜디오>에서 르누아르, 에밀 졸라, 바지유 등에 둘러 싸여 한 손엔 파레트를, 한 손엔 붓을 들고 이젤 앞에 앉아 작업하고 있는 모습에는 자기 확신과 열정이 가득한 예술가의 신념이 엿보인다.
▲ <바티뇰의 스튜디오>, 앙리 팡탱 라투르, 1870년, 오르세 미술관. 가운데 작업 중인 화가 마네, 그를 둘러싼 르누아르, 에밀 졸라, 바지유 등이 보인다. |
ⓒ 김윤주 |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로 향한 이 항해는 아버지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열여섯 살의 마네에게 화가의 꿈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되고 만다. 선원으로서 경험해야 했던 '바다와 하늘뿐인 늘 똑같은 따분한' 생활,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몰입한 드로잉과 수채화 작업,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이국적인 풍광은 이후 그의 화가로서의 삶에 어떻게든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풍경화를 잘 그리지 않은 그가 유독 이 시기 기억을 바탕으로 한 풍경화들을 남긴 것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마네가 살았던 시기는 파리가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이다. 그가 태어난 1832년은 빅토르 위고가 대작 <레미제라블>의 배경으로 삼은, 실패로 끝나버리는 6월 학생봉기가 있었던 바로 그해이다. 1848년 2월 혁명과 1851년 쿠데타, 1852년 제2제정 선포와 나폴레옹 3세의 황제 즉위, 근대적 자본주의와 식민지 팽창, 1870년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 등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나폴레옹 3세 치하의 제2제정기 파리는 오스망의 대대적인 도시개발 사업으로 새로운 도시로 거듭나고 있었다. 중세 도시의 흔적을 깨끗이 들어내고 새롭게 닦은 세련되고 현대적인 도시, 그 도시의 새로운 주인인 근대 부르주아 계층의 교양 있는 문화생활, 그들의 교양 속에 숨겨진 위선과 가식, 도심에서 밀려난 피곤한 서민의 고독하고 남루한 일상 따위를 화폭에 그려낸 최초의 화가. 그가 바로 마네이다.
마네가 평생 들어야 했던 비난은 그림의 소재가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라는 점, 그림 속에 묘사된 장면이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직접적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다 만 것 마냥, 혹은 덜 배운 어린애가 제대로 흉내를 못 낸 것 마냥 색감과 기교가 어설프다는 것이었다.
당대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역사 속 인물이나 신화 속 장면 등을 통해 감동과 교훈을 주어야 하는 것이 회화의 마땅한 책무인데 그것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한심할 노릇이었다. 정성을 다해 그리고 칠하고 덧입혀 마무리를 해도 모자랄 것을 그리다 만 것 마냥, 칠하다 만 것 마냥 표면도 거칠고 선도 무디고 색감의 배치와 대조도 영 낯설기만 한 그림들뿐이었으니 딱할 노릇이었다.
▲ <풀밭 위의 점심>, 에두아르 마네, 1863, 오르세 미술관. |
ⓒ 김윤주 |
그도 아니면, 초등학생이 타로 카드를 보고 베껴 그린 것 같은 수준의 원색 가득한 <피리 부는 소년(1866)>이나, 심지어 아스파라거스 한 다발로 떡하니 화면을 한가득 채워 버린, 주제도 없어 보이고 색감도 기교도 어설픈, 무성의하기 이를데 없는 그런 그림들뿐이었으니 그의 그림이 환영받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대 심사위원이나 관람객들 눈에는 마네의 끊임없는 살롱전 출품이 오히려 어이없어 보였을지 모른다.
51세에 생을 마칠 때까지 스무 차례나 출품을 했으니 그의 살롱전 집착은 가히 놀라울 지경이다. 단 세 번 정도 호평을 들었을 뿐 대부분은 비난과 조롱의 중심에 있어야 했으니 상처도 컸을 터이다. 마침내 49세이던 1881년 2등상을 수상하며 평생 살롱전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2년 후 세상을 떠나고 만다.
▲ <피리 부는 소년>, 에두아르 마네, 1866, 오르세 미술관. |
ⓒ 김윤주 |
그에게 영향을 받아 새로운 화풍을 선도한 클로드 모네와 같은 젊은 인상주의 화가들과 진취적인 예술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열한 살이나 많은 시인 보들레르나 말라르메, 에밀 졸라 등 문학가들은 그의 작업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글로 그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어릴 적부터 학창시절을 함께한 친구였으며 나중에 문화부 장관에 오르는 앙토냉 프루스트는 헌신적인 우정을 보여주며 그의 장례식까지 맡아 치른 평생의 친구였다.
정작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회에는 단 한 차례도 그림을 내 건 적이 없으며 평생토록 공식적인 살롱전 입상만을 꿈꾸었던 그가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것은, 당대로선 혁명에 가까웠을 파격적인 표현과 기법, 작품에 투영된 특유의 반항적인 주제와 메시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쉬지 않고 자신만의 작품을 창작해 낸 그 지독한 고집 때문일 것이다.
거절은 언제나 유쾌하지 않다. 그 불쾌함은 익숙해지기도, 가벼워지기도 쉽지 않은 감정이다. 언제가 되었든 누구에게든 거절은 분노와 좌절을 유발하기 쉽다. 끊임없는 낙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도 끝까지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표현하고, 기어이 그것으로 인정받으려 했던 화가 마네.
오르세 미술관을 나오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마네는 자신이 성공한 예술가로 불리길 원했을까, 자유로운 영혼의 화가로 불리길 원했을까, 아니면 미술사의 혁명가로 기억되길 원했던 걸까?
펌 2))
마네, 바티뇰 그룹의 새 리더가 되다
앙리 팡탱-라투르의 <들라크루아에 바침 Hommage a Delacroix>, 1864, 유화, 160-250cm.
젊은 예술가들에게 우상과도 같았던 외젠 들라크루아가 1863년 8월 타계하자 팡탱-라투르가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새로운 리더가 필요했고, 마네가 들라크루아를 대신해서 리더로 부상했음을 이 그림에서 볼 수 있습니다. 들라크루아의 초상화를 중심으로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미국 화가 휘슬러이고, 오른쪽이 마네입니다. 흰 셔츠를 입은 사람이 팡탱-라투르이고, 마네 오른편으로 화가 발레로아와 판화가 브라크몽, 그리고 시인 보들레르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르노블 태생으로 마네보다 네 살 어린 팡탱-라투르는 1851년에 파리로 상경하여 미술학교를 다닌 뒤 1861년에 살롱에 입선했습니다. 루브르 뮤지엄에서 티치아노와 베로네세 등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회화를 익혔고, 마네와 쿠르베와 교류했습니다.
마네가 1864년에 그린 그림이 1872년 살롱에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그 동안 그의 작품에 대한 여론이 별로 좋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젊은 진보주의 예술가들은 마네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여겼습니다. 앙리 팡탱-라투르Henri Fantin-Latour(1836-1904)는 <들라크루아에 바침 Hommage a Delacroix>에서 마네를 중앙에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대들보와도 같은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프레데리크 바지유Frederic Bazille(1841-70), 앙리 팡탱-라투르, 폴 세잔Paul Cexxane(1839-1906),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1841-1919) 등 젊은 화가들은 마네의 화실과 그들이 자주 모이던 카페 게르부아, 누벨아텐, 드 바드가가 있는 동네 이름을 따 ‘바티뇰 그룹’ 혹은 ‘마네파’로 불렸습니다. 마네가 1864년 새로 이사한 아파트는 카페 게르부아에서 아주 가까운 곳으로 바티뇰 불바드 34번지였습니다. 클리쉬 애비뉴 19번지로 엔느퀭의 미술품 재료상 맞은편에 있던 카페 게르부아는 바티뇰 그룹의 본부와도 같았습니다. 이들은 1863년부터 1875년까지 주로 이곳에서 만났습니다. 금요일이면 카페 주인은 문 입구 왼쪽의 두 테이블을 그들을 위해 비워두었습니다.
앙리 팡탱-라투르의 <바티뇰의 화살 Un Atelier aux Batignolles>, 1870, 유화, 204-273.5cm.
팡탱-라투르가 1870년 국전에서 소개한 <바티뇰의 화실 Un Atelier aux Batignolles>에 나타난 것처럼 중앙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모습의 마네는 이 그룹의 공식 리더였습니다. 동일한 인물들을 모델로 바지유가 자신의 화실 장면을 그릴 때도 마네는 여전히 이젤 앞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프레데리크 바지유의 <콩다미느 가의 화실 L'Atelier de la rue La Condamine>, 1869-79, 유화, 98-128.5cm.
중앙에 서서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사람이 바지유인데, 키가 무척 텄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문 밖으로 시가지가 내려다보이고 오른편에 피아노가 있어 화실이 놃고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네의 <페레 라툴르에서 At PereLathuile's>, 1879, 유화, 93-112cm.
카페 게르부아 바로 옆에 있는 레스토랑 정원에서 햇볕을 받고 앉은 레스토랑 주인의 아들가 여인의 다정한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오른편 뒤에 주전자를 들고 서 있는 웨이터의 모습이 마치 스냅사진처럼 한 순간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마네가 1860년대와 1870년대 파리 카페의 분위기를 묘사한 것으로 그는 매일 오후 늦게 들리곤 하던 바티뇰의 카페들 중 하나인데 카페 게르부아로 짐작됩니다. 이런 것이 카페문화입니다.
인상주의를 연구한 미술사학자 존 르왈드는 “소심한 예술가들이 카미유 코로의 영향을 받은 반면 대담한 예술가들은 쿠르베와 마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마네는 바티뇰 그룹의 리더였지만, 그들과 더불어 유파를 결성하지는 않았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였지만 마네가 “한 유파의 우두머리라는 뜻은 아니었다. 마네에게는 보스 기질이 없었으며 잘난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아르망 셀베스트르가 훗날 회상했습니다.
클로드 모네도 이때 카페 게르부아에서 마네와 자주 어울린 예술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모네가 마네를 처음 만난 것도 카페 게르부아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곳에 자주 간 예술가들로는 1863년에 마네의 초상을 그린 르그로, 팡탱-라투르, 르누아르, 드가, 나중에 레그로와 함께 런던에 안주한 휘슬러, 바지유, 그리고 세잔이 있습니다. 이들의 모임에는 작가이자 평론가인 이들도 있었는데, 이폴리트 바부, 세잔의 고향 친구 에밀 졸라, 에드몽 뒤랑티, 필립 뷔르티였습니다. 이들은 술은 많이 마시지 않고 대화를 많이 했습니다. 살롱에 관해 주로 대화하면서 새로운 경향의 미술에 관해 의견을 나눴습니다. 파리에서의 문인과 예술가들의 교류는 그때부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문학과 미술이 함께 발전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출처 :7인의문화읽기 원문보기▶ 글쓴이 : 김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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