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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미술 이야기 (책)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개정증보판)(HY Collection 20)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

(개정증보판)



 

책소개

1500여 페친의 열광적인 성원 속에 3개월간 페이스북에 연재된 반 고흐 이야기를 책으로 만난다
인권법 교수인 저자 박찬운은 지난 2014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약 90일 동안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그의 그림에 푹 빠져 지냈다. 저자는 “이 그림을 그릴 때 당신은 어떤 생각을 했는가요.”라는 물음에 대한 빈센트 반 고흐의 말을 떨리는 손으로 받아 적으며 매일 새벽을 열었고, 독자들에게 그 내용을 전달했다. 글이 페이스북을 통해 발표된 뒤 많은 독자들의 성원으로 2015년 여름 이 책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가 출간되었다.
어느덧 출간된 지 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이번에 개정증보판을 출간하게 되었다. 개정증보판은 많은 부분에서 초판과 달라졌다. 우선 새로운 디자인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리고 글을 추가했으며,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색인 항목 또한 추가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초판과의 큰 차이는 초판본에 실린 독자 댓글을 삭제한 것이다. 이 책은 독자와의 교감 속에서 탄생한 것으로, 저자는 그 생생한 흔적을 남기고 싶어 독자들의 댓글 일부를 초판본에 옮겨 놓았었다. 그랬던 것을 이 개정증보판에서는 이 책을 순수한 빈센트 반 고흐 그림 에세이집으로 출판해야겠다는 고심 끝에 삭제했다는 점이다.
이 책을 통해 순수한 삶을 사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청량한 위로를 받고, 그 위로를 통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작은 힘을 얻길 바란다.




저자 박찬운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20대 초반에 법률가가 되었다. 20대 후반과 30대의 대부분을 변호사로 일하면서 시국사건에 연루된 양심범, 감옥에 갇힌 수용자, 그리고 사형수의 인권을 위해 변호했다. 40대 중반에는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정책국장으로서 사형제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 인정 등 인권위의 대표적 인권정책 권고에서 실무 책임을 맡았다. 바쁘게 살면서도 배우고 익히는 것에 남다른 관심이 있어 미국, 일본, 유럽을 오가며 전공인 인권법을 연구했고, 인식의 지평을 넓혀 보편적 인간이 되고자 노력했다. 2006년에 대학으로 옮겨 지금까지 법학 교수로 일하는 동안 최대 관심사는 딱딱한 법학에 인문학적 감수성을 불어넣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세계 문명 발상지를 찾아가거나 미술 작품을 감상한 뒤 그것들을 강의실로 전달하고 있다. 현재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 교수로 일하고 있으며, 전공과 관련해 『인권법』(2015)을 비롯해 다수의 저서를 냈다. 그 밖에도 젊은이들에게 폭넓은 독서를 권면하는 책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2011), 세계 문명 유적지를 돌아보고 쓴 여행기 『문명과의 대화』(2013), 자신만의 독특한 독법으로 쓴 로마 문명 이야기 『로마 문명 한국에 오다』(2014)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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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정증보판을 내며
머리말
프롤로그



1 내가 페북에 빠진 이유에 대하여
2 독서광 빈센트 반 고흐
3 빈센트 반 고흐와 변시지
4 또 하나의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5 자고새를 아시나요


6 천재 화가 고흐를 만들어낸 테오와 요한나
7 굳은 살 박인 손, 농부의 정직함을 그리다
8 나도 언젠가 거기에 가고 싶다
9 태양의 화가 고흐가 사랑한 해바라기
10 마시자 한 잔의 술 마시자 마셔버리자


11 천재 화가의 마지막 여정, 오베르 쉬르 우아즈
12 천재를 알아본 멜랑콜리, 폴 가셰
13 흔들리는 성당, 흔들리는 고흐
14 밀레는 밀레, 고흐는 고흐
15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


16 오직 한 점을 꼽는다면?
17 조카를 사랑한 삼촌
18 어머니란 이름의 세 글자
19 사랑을 하지 못한다면 얼음이 되든가 돌이 되겠소
20 아버지를 떠난 고흐, 그도 아버지의 가슴에 안기고 싶었다


21 고흐와 에로티시즘
22 아를의 소크라테스, 룰랭의 우정
23 야만성의 상징인가? 아를 원형경기장
24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25 고흐, 비참한 자본주의를 그리다


26 고흐의 파리 사랑, ‘물랭 드 라 갈레트’
27 혁명의 용사 탕기 영감을 그리다
28 고흐, 파리에서 새 여인을 만나다
29 밀밭에서 삶의 진실을 그리다
30 사이프러스여, 타올라라! 하늘로 솟아올라라!


31 왜 우리는 반 고흐에 열광하는가
32 노동자의 친구, 직조공을 그리다
33 화려한 꽃의 향연 - 고흐, 네덜란드인의 피를 잇다
34 고뇌하는 사람들이여, 당신의 자화상을 발견하라
35 고흐, 인류 역사상 최초의 해골 자화상을 그리다


36 의자로 그린 두 천재의 초상화
37 고흐의 그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팔리다
38 고흐, 자포니즘의 세례를 받다
39 갇힌 자가 그린 영혼의 그림
40 고독한 천재의 최후


41 프로방스, 내 친구 빈센트를 찾아 - 고흐의 숨결이 살아 있는 아를과 생레미




에필로그
빈센트 반 고흐 연보
참고 문헌
도판 목록
찾아보기



















1.

"에밀 졸라, 볼테르, 플로베르, 콩쿠르 형제, 리슈팽, 도데, 위스망스 같은 프랑스 자연주의자들의 작품은 정말 훌륭해.

그런 소설을 읽지 않으면 우리 시대에 대해 마무것도 알지 못하지."  - 1887년 여름 또는 가을,. 여동생 빌에게 보낸 편지


※ 쥘 미셀레 같은 역사가의 책, 발자크, 조지 엘리엇, 샬럿 브론테, 찰스 디킨스, 키츠 . . . . .



2.

"분명 형은 살아 있을 때 성공을 거두게 될 거야. 일부러 나서지 않아도 형의 아름다운 그림들 때문에 저절로 이름이 알려지게 될 거라고."  - 1890년 1월 22일 테오의 편지



"테오 반 고흐의 초상(좌),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우)"




최근 새로운 연구에 의하면 고흐가 작품활동할 때 그렇게 가난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체부 조세프 룰랭의 한 달 월급이 135프랑이었다고 한다. 테오는 형에게 매달 200프랑을 보내주었고, 물감과 화구는 따로 사 주었다.

테오는 당시 파리에 본사를 둔 유럽 촤고의 화랑 '부쏘발라동' 화랑의 책임자급 간부였다. 아주 잘 나가는 화상이었고 돈도 꽤 벌었다. 고흐가 자살할 무렵엔 독립적인 사업을 하려던 참이었다.


고흐는 죽기 직전 무명의 화가가 아니었다는 주장도 대두된다. 이미 파리 화단에 이름이 알려지고 전시회에도 초대되는 상황이었다. 1889년과 1890년에 몇 차례 인상파 화가들과 전시회를 가졌고, 꽤 유명한 전시회인 벨리에 브뤼셀에서 열린 <20人展>에도 초대될 정도였다. 테오가 10여 년에 걸쳐 형에게 그 많은 돈을 주었다는 것은 이런 장래가 촉망되는 화가를 알아보고 어쩌면 최고의 투자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同書 p47)




3

1887년 파리시절에 그린 해바라기는 마른 해바라기 송이를 바닥에 뉘여놓고 그렸다. 우리가 흔히 보는 화병 속의 해바라기는 1888년이후 아를 시대 이후의 작품이다.



4


 라마르틴 광장의 밤의 카페 

아를, 1888년 9월 / Oil on canvers, 70cm x 89cm / 뉴 하펀, 예일대학 예술 갤러리

 


"카페는 사람들이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고, 미칠 수도 있으며,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해. <밤의 카페>를 통해서 그런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어. 부드러운 분홍색을 핏빛 혹은 와인 빛이 도는 붉은 색과 대비해서, 또 부드러운 녹색과 베로네즈 녹색을 노란빛 도는 녹색과 거친 청록색과 대비해서, 평범한 선술집이 갖는 창백한 유황빛의 음울한 힘과 용광로 지옥 같은 분위기를 부각하려 했지." 


"인상파 화가 중 가장 겸손하고 예민한 시슬레의 작품을 보고 '화가가 술에 취해서 그린 것 같다'고 했던 테르스테이흐 씨가 이 그림을 본다면 정신착란 중에 그렸다고 할 거야." 


- 1888년 9월 8일 편지




5

고흐는 1890년 5월 오베르에 도착해서 가셰 박사를 만난다. 그는 60이 넘은 노인이었지만 유명한 정신과 의사로서 이미 많은 돈을 번 사람이었다. 가셰 박사는 고흐가 오기 전에 고흐를 알고 있었고 그의 재능을 익히 알고 있었다.

가셰 박사는 일찌감치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아마츄어 화가이기도 했다. 사실주의 화가아르망 고티에와 가깝게 지내면서 그를 통해 쿠르베와도 교유했고 그림 수집에도 나섰다.

나이 마흔이 되어 결혼해서 딸과 아들을 두었는데 부인이 아들을 낳고 2년 만에 결핵으로 사망하여 직업에 대한 의욕도 잃었을 즈음, 인상파 화가 피사로를 만난 것이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 피사로와의 인연으로 세잔, 기요맹, 모네, 마네, 르누아르, 시슬레 둥과도 교류했다.




가셰 박사의 초상 (Portrait du Docteur Gachet)

                            <가셰 박사의 초상> (1890. 6.)  67cm× 56cm





6

고흐가 밀레의 그림을 모사한 것은 화가 초년시절부커이지만 특히 많이 그렸던 시기는 1889년 5월 프로방스의 생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한 이후이다.

"누군가 베토벤의 작품을 연주하면 자신의 해석을 덧붙이지. 원곡의 작곡가만이 연주해야 하는 것은 아니야. 나는 지금 病中에서 나를 위로할 그 어떤 것을 창조하려고 해. 모티프로 내 앞에 있는 밀레나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보면서 검은색과 흰색을 칠하고 있어. 희미한 기억 속에서 그 작품들의 색깔과 추억을 더듬는 거지. 그게 나의 해석이야.   - 1889년 1월 19일 편지


※ 그에게는 밀레의 원화가 없었다. 아마도 흑백 도판 정도의 도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7

탕기(영감) 파리코뮌(1871년) 당시 혁명에 참가한 역전의 용사였다. 고흐보다 서른 살이나 많은 이 영감은 몽마르트에서 畵具商을 하는 인상파 화가들의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화가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림을 받고 화구를 주거나 자주 밥과 술을 사주며 그림도 전시를 해주는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다. 

고흐는 탕기영감을 세 번에 걸쳐 초상화를 그렸다. 고흐가 인상파 화가들을 만난 것도 대부분 탕기영감의 가게에서였다. 폴 시냐크도 만났고 에밀 베르나드도 만났다. 




8

"아직도 사이프러스에 매달려 있어. 그것을 해바라기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싶어. 왜냐하며 어느 누구도 여태 내가 보았던 대로 그리지 못했다는 것이 놀랍거든. 그 선과 비례는 오벨리스크처럼 아름다워. 그 푸름이 아주 독특해. 해질녘 풍경 속에서 그것은 검은 조각 같이 보이지만 정말로 흥미로운 검은 점이야. 정확하게 그리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지."


- 1889년 6월 25일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의 풍경’ (1890년, 90.6×72㎝)


빈센트 반 고흐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의 풍경’ (1890년, 90.6×72㎝)




9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이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고뇌야.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이 화가는 깊이 고뇌하고 있다고, 정말 격렬하게 고뇌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싶어."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칠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벽스러운 사람,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 사회적 지위도 없고 앞으로도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갖지도 못할, 한마디로 최하 중의 최하급 사람...... 그래, 좋아, 설령 그 말이 옳다해도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기이한 사람, 그런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주겠어."


- 1882년 7월 21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