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 전 시집》

2020. 1. 22. 20:07詩.






윤동주 전 시집(증보판)  2019. 8. 15


윤동주 전 시집(증보판) 윤동주 100주년 기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책소개


이제까지 발간된 윤동주 시집 및 작품집은 많지만, 윤동주의 작품 전체를 한 권에 담은 책은 없었다.

이에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윤동주의 전체 작품을 담은 작품 전집을 발간하게 되었다.

『윤동주 전 시집』에는 소실되지 않은 윤동주의 시와 수필 전체뿐만 아니라,

윤동주를 위해 쓰여진 서문과 후기와 발문 등도 모두 취합하여 실었다.

『윤동주 전 시집』에 모두 살려 놓은 정지용, 유영, 강처중 등의 추모 글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문학작품이다.

『윤동주 전 시집』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에는 1948년 초판본 전문을 실었고,

2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는 1948년 본에 실려 있는 시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을 실었으며,

3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79」는 역시 1948년 본과 1955년 본에 수록된 작품 외의 시 작품을 담았다.

4부 「나중에 발굴된 시」에는 기존 윤동주 시집에 실리지 않은 작품 8편을 실었다.

1부부터 3부까지의 시들은 당시 발간된 본문 순서대로 실었으며,

4부는 작품이 쓰인 해를 알 수 없는 경우 외에는 창작 년도에 따라 실었다.



독립운동 100주년, 윤동주의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아야 한다


1. 중국은 윤동주 시인을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이라하고

옌볜의 조선족자치주에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커다란 표지석을 세웠다.

그러나 조선족이라는 용어는 1952년에 만들어진 말로

윤동주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조선족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을 뿐더러

윤동주는 한 번도 중국어로 시를 쓴 적이 없고,

‘별 헤는 밤’ 시 내용 중 같은 반 친구인 폐, 경, 옥을 이국 소녀라고 분명히 기술했다.


2. 일본은 윤동주의 사인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용 주사를 맞고 숨졌는데

그의 친구 송몽규도 똑같은 주사를 맞고 윤동주가 숨지고 나서 20일 후 숨졌다.

일본 정부는 이들의 사인을 확실히 밝히고 죄인 신분도 해제해야 한다.


3. 한국은 금년 초등학교 6학년 도덕교과서에 윤동주를 “재외동포 시인”으로 수록하였다.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로 제2의 독립운동을 온 국민이 외치고 있는 이 시점에, 독립운동 100주년이 정말 부끄럽다.

윤동주는 광명중학교 학적부, 연희전문 학적부, 일본재판 판결문에 똑같이 함경북도 청진부 포항정 76번지로 기술하고 있으며

일본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한국인 시인 윤동주로 수록되어 있고,

90년 8.15에는 ‘건국훈장 독립장’까지 추서 받은 독립운동의 시인이 어떻게 재외동포 시인인가?

초등학교 6학년 도덕교과서를 폐기하고 윤동주를 국적을 신속하게 바로 잡아야 한다.




윤동주

윤동주 시인


1917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출생하여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였고 일본 동경 동지사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36년부터 여러 지면의 학생란에 동시, 시, 산문 등을 발표하던 중

1941년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간행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45년 구주 복강 형무소에서 의문의 병사를 당했다.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가 간행된 이후 지금껏 무수한 판본의 '윤동주 시집'이 나왔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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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보판에 부쳐 - 『윤동주 전 시집』 증보판을 내는 이유


머리글 - 전 시집으로 만나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부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서(序) 정지용
서시

1.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자화상
소년
눈 오는 지도
돌아와 보는 밤
병원
새로운 길
간판없는 거리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
무서운 시간
십자가
바람이 불어
슬픈 족속
눈감고 간다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2. 흰 그림자


흰 그림자
사랑스런 추억
흐르는 거리
쉽게 씌어진 시



3. 밤



유언
아우의 인상화
위로

산골물
참회록


창밖에 있거든 두다리라 - 유영
발문 - 강처중



2부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


3
팔복
못 자는 밤
달같이
고추밭
사랑의 전당
이적(異蹟)
비오는 밤

바다
비로봉
산협의 오후
명상
소낙비
한난계
풍경
달밤

황혼이 바다가 되어
아침
빨래
꿈은 깨어지고
산림
이런 날
산상(山上)
양지쪽

가슴 1
가슴 3
비둘기
황혼
남쪽 하늘
창공
거리에서
삶과 죽음
초 한 대

4
산울림
해바라기 얼굴
귀뜨라미와 나와
애기의 새벽
햇빛?바람
반디불
둘 다
거짓부리

참새
버선본
편지

무얼 먹고 사나
굴뚝
햇비
빗자루
기왓장 내외
오줌싸개 지도
병아리
조개껍질
겨울

5
투르게네프의 언덕
달을 쏘다
별똥 떨어진 데
화원에 꽃이 핀다
종시(終始)
후기 - 정병욱
선백의 생애 - 윤일주 



3부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79


5
식권
종달새
이별
모란봉에서
오후의 구장(球場)
곡간(谷間)
그 여자
비애
코스모스
장미 병들어
공상
내일은 없다
호주머니

고향집
가을밤
비행기
나무
사과 ...


할아버지
만돌이


암흑기 하늘의 별 - 백철
윤동주의 시 - 박두진
동주 형의 추억 - 문익환
인간 윤동주 - 장덕순
추기(追記) - 윤일주
3판을 내면서 - 정병욱



4부 / 나중에 발굴된 시


가슴 2
창구멍
개 2
울적
야행
비ㅅ뒤
어머니
가로수



부록
이바라기 노리코의 일본 교과서 수록 수필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이웃나라 말의 숲」

윤동주 연보











1


윤동주의 <自畵像>을 그림으로 바꿔보려고 합니다. 바로 이 대목을



1)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2)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3)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자화상」1939..9)


4)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1941. 11)


내 美術의 窮極의 終着地는 이처럼 그림 속에 詩와 音樂이 들리는 경지라 할까......











2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무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져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 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내려 덮어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1939「少年」/

 1941「눈 오는 地圖」전문)


※ 줄 바꿈 없이 쓴 詩인데 내가 行을 나누었음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 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思想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1941. 6. 「돌아와 보는 밤」끝行)

※ 줄 바꿈 없이 쓴 詩인데 내가 行을 나누었음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꼽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과 내 건강이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그 자리에 누워본다.


(1940. 12. 「病院」을 마구 삭제 편집함.)








무서운 시간

                            윤동주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잎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어 있소.


한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1941. 2. 7)








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時代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1941. 6. 2)









또 다른 故鄕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白骨이 따라와 한 房에 누웠다.


어둔 房은 宇宙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風化作用하는

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魂이 우는 것이냐


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쫒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쫒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故鄕에 가자



(1941. 9)










별 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청춘이 다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 잠' '라이너 마리아 .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1941. 11. 5.)


윤동주의 다른 시에 비해서 이 詩, <별 헤는 밤>이 압도적이군요.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1942년)










위로(慰勞)



거미란 놈이 흉한 심보로 병원 뒤뜰 난간과 꽃밭 사이

사람 발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

옥외 요양을 받는 젊은 사나이가 누워서 쳐다보기 바르게 ─


나비가 한 마리 꽃밭에 날아 들다 그물에 걸리었다.

노-란 날개를 파득거려도 파득거려도 나비는 자꾸 감기우기만 한다.

거미가 쏜살같이 가더니 끝없는 끝없는 실을 뽑아 나비의 온몸을 감아버린다.

사나이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이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할 말이 ─

거미줄을 헝클어버리는 것밖에 위로의 말이 없었다.


(1940.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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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야 하느냐 東이 어디냐 西가 어디냐 南이 어디냐 아차! 저 별이 번쩍 흐른다.

별똥 떨어진 데가 내가 갈 곳인가 보다. 하면 별똥아! 꼭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져야 한다.


(「별똥 떨어진 데」 끝 부분)







개나리, 진달래, 앉은뱅이, 라일락, 민들레, 찔레, 복사, 들장미, 해당화, 모란, 릴리, 창포, 튤립, 카네이션, 봉선화, 백일홍, 채송화, 달리아, 해바라기, 코스모스, ㅡ 코스모스가 홀홀히 떨어지는 날 우주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여기에 푸른 하늘이 높아지고, 빨간, 노란 단풍이 꽃에 못지않게 가지마다 물들었가가 귀또리 울음이 끊어짐과 함께 단풍의 세계가 무너지고 그 위에 하루밤 사이에 소복히 흰 눈이 내려, 내려 쌓이고 화로에는 빨간 숯불이 피어오르고 많은 이야기와 많은 일이 이 화롯가에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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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계관, 인생관, 이런 좀더 큰 문제보다 바람과 구름과 햇빛과 나무와 우정, 이런 것들에 더 많이 괴로워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이 말이 나의 역설이나, 나 자신을 흐리우는 데 지날 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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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 코스모스가 홀홀히 떨어지는 날 우주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단풍의 세계가 있고, ㅡ 이상이견빙지(履霜而堅氷至) ㅡ 서리를 밟거든 얼음이 굳어질 것을 각오하라 ㅡ 가 아니라 우리는 서릿발에 끼친 낙엽을 밟으면서 멀리 봄이 올 것을 믿습니다.

노변에서 많은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 윤동주 「화원에 꽃이 핀다」(산문) 중에서






















선백(先伯)의 생애

                                      윤일주 ( 註. 윤동주 시인의 친동생 )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


이런 전보 한 장을 던져주고

29년간 시와 고국만을 그리며 고독을 견디었던 사형 윤동주를 일제히 빼앗아가고 말았으니

이는 1945년 일제가 망하기 바로 6개월전 일이였습니다.


 

   1910년대, 북간도 명동 ( 註. 현주소 : 中國 吉林省 延邊朝鮮族自治州 龍井市 明東村 )

- 그곳은 새로 이룬 흙냄새가 무럭무럭 나던 곳이요, 조국을 잃고 노기에 찬 지사들이 모이던 곳이요, 학교와 교회가 새로 이루어지고 어른과 아이들에게 한결같이 열과 의욕에 넘친 모든 기상을 용솟음치게 하던 곳이었습니다.

   

   1917년 12월 30일, 동주형은 이곳에서 교원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생가는 할아버지가 손수 벌재하여 지으신 기와집이였습니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함북 회령이요, 어려서 간도에 건너가시여 손수 황무지를 개척하시고 기독교가 도래하자 그 신자가 되시여 맏손주를 볼 즈음에는 장로로 계시였습니다.

 

   동주형의 근실하고 관용함은 할아버지에게서, 내성적이요 겸허함은 아버지에게서, 온화하고 치밀함은 어머니에게서 각각 물려받은 성품이라고 생각됩니다. 그의 아명은 해환이였고 그 아래로 누이와 두 동생이 있었습니다.

 

 

   얌전한 소학생 해환은 兒童紙 《어린이》의 애독자였고 그림을 무척 좋아하였다고 합니다. 1931년에 '명동소학'을 마치고 '대립자'라는 곳에서 중국인 관립학교에 1년간 수학하였으니, 시 “별 헤는 밤”의, , 이란 묘한 이국소녀의 이름은 이때의 추억에서 얻어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1932년 그가 룡정 은진중학교 (1932~1935) 에 입학하자 저희 집은 룡정에 이사하였습니다. 중학교에서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였습니다. 축구선수이던 그는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네임도 혼자 만들어 유니폼에 붙이고 기성복도 손수 재봉틀로 알맞게 고쳐 입었습니다. 낮이면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초저녁에는 산책, 밤늦게까지 독서하거나 교내잡지를 만드느라 등사글씨를 쓰거나 하던 일이 기억됩니다. 끝까지 즐기던 이 산책은 이때로부터 비롯되였습니다.

 

   운동복이거나 문학서적만 들고 다니는 그의 성적에 뜻밖에도 수학이 으뜸가는 것에는 다들 놀랐습니다. 특히 기하학을 좋아함은 그의 치밀한 성품에서였다고 짐작됩니다.

 

 

   1935년 봄, 3학년을 마칠 즈음, 그는 불현듯 고국에로의 류학을 꿈꾸고 겨우 아버지의 승낙을 얻어 평양 숭실중학교 (1935~1936 ) 에 옮겼습니다. 그의 습작집으로 미루어 평양시절 1년에 가장 문학에의 의욕이 고조된 듯합니다. 이즈음 백석시집 《사슴》이 출간되었으나 100부 한정판인 이 책을 구할 길이 없어 도서실에서 진종일을 걸려 정자로 베껴내고야 말았습니다. 그것은 소중히 지니고 다닌 모양으로, 지금은 나에게 보관 되어 있습니다. 평양 류학도 끝을 맞게 되었으니 숭실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폐교케 되었던 까닭입니다. 1936년 다시 룡정에 돌아와 광명중학교 (1936~1938)  4학년에 들었습니다. 이때 당시 간도에서 발간되던 《카톨릭소년》지에 동주(童舟)라는 필명으로 동요 몇 편을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그의 비운은 중학교 졸업반에서부터 비롯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둔 그는 진학할 과목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때 벌써 많은 동요와 詩稿를 가지고 있던 그에게 문학 이외의 길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외아들인 아버지는 젊어서 문학에 뜻을 두어 북경과 도꾜에 류학하고 교원까지 지내셨건만 자기의 생활상 실패를 아들에게까지 되풀이시키고싶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의사가 되기를 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굳이 듣지 않고 아버지의 퇴근 전부터 산이고 강가이고 헤메다가 밤중에야 자기 방에 돌아오는 날이 계속되였습니다. 한숨이 늘고 가슴을 두드리는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반년을 두고 아버지와의 대립이 계속되다가 졸업이 닥쳐오자 그는 이기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 권고로 아버지가 양보하신 것입니다. 소학과 은진중학 동창이며 고종사촌이며 또 동갑인 송몽규형과 동행하여 서울로 온 것은 1938년 봄이였습니다.

   상경하자 두분 다 연희전문(1938~1941) 에 입학하고 그후부터 집에 오기는 1942년까지 매년 2회 여름과 겨울 방학 때뿐이였습니다. 따라서 그 시절의 나도 추억도 단편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눈앞에 선한 그 정답던 모습은 사각모에 교복을 입은 형님이 아니라 베 바지, 베 적삼에 밀짚모자를 쓰고 황소와 나란히 서 있는 형님입니다. 고향에 돌아오면 그날로 양복은 벗어놓고 우리 옷으로 바꾸어 입고는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을 도왔습니다. 소꼴도 베고 물도 긷고 때로는 할머니와 마주앉아 맷돌도 갈며 과묵하던 그도 유머를 섞어가며 서울이야기를 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속에서도 남몰래 쉬는 한숨을 나는 옆에서 가끔 들은 듯합니다. 그것은 사소한 일로 상함을 입어 끓어오르는 시흥 집안 어른들의 일을 돕지 않고는 마음을 놓지 못하였습니다. 관유함이 그의 의지를 지탱케 못하였을지나 결코 우유부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룡정은 인구 10만명에 가까운 작지 않은 도시였으나 대학생인 그는 아무 쑥스러움 없이 베옷을 입은 채 거리로 소를 이끌고 다녔습니다. 그럴 때에도 그는 릴케나 발레리의 시집 또는 지이트이 책을 옆에 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초저녁이면 의례 하는 산책에 동생인 나는 그의 손목을 잡고 같이 거니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가로수가에서 북원백추(北原白秋)의 “고노미찌”를 콧노래로 부르기도 하고 숲속에 앉아 새로 뜨는 별과 먼 강물을 바라보며 손깍지를 낀채 묵묵히 앉았을 때에는 그의 얼굴에 무슨 동경과 감정이 끓어오름을 년소한 나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작로를 걷다가도 부역하는 시골아낙네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고 싶어하고, 골목길에서 노는 아이들을 붙잡고 귀여워서 함께 씨름도 하며, 한포기의 들꽃도 차마 못 지나치겠다는 듯 따서 가슴에 꽂거나 책갈피에 꽂아놓군 하였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註. 1941. 11. 20. 作, "서시" 中에서 )

  

   하는 연약한 것에 대한 애정의 표백은 그의 천품의 기록이였습니다. 방학때마다 짐속에서 쏟아져나오는 수십 권의 책으로 한 학기의 독서의 경향을 알 수 있습니다. 나에게 고가와 동화집을 주며 퍽 좋다고 하던 일과 수필과 판화지《백과 흑》 7, 8권을 보이며 판화가 좋아 구독하였으며 기회가 있으면 자기도 목판화를 배우겠다고 하던 일이 기억됩니다. 이리하여 집에는 근 8백 권의 책이 모여졌고 그중에 지금 기억할수 있는 것은 앙드레 지이드 전집 기간분 전부,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서적, 발레리 시전집, 프랑스 명시집과 키에르케고르의 것 몇 권, 그밖에 원서(原书) 다수입니다. 키에르케고르의 것은 연전 졸업할 즈음 무척 애찬하던 것입니다.

  

   1941년 12월, 연전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졸업장과 함께 정성스럽게 쓴 시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들고 왔었습니다. 그것은 초판 77부로 출판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채 소중히 지니고 다녔습니다.

 

     

                  










 

          서 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더 공부하고 싶었던 그는 1942년 “참회록”이란 시를 써놓고 渡日하여 립교대학에 적을 두었습니다. 그간 마지막으로 집을 떠난 것은 그해 7월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그때에는 병환으로 누워계시는 어머님의 침대에 걸터앉아 이야기 동무로 며칠을 보내다가 뜻밖에 속히 떠나게 되었습니다. 동북대학에 있던 한 친우의 권유로 이 학교 입학수속 치르러 오라는 전보 까닭이였습니다. 놀이터에서 돌아온 나는 그가 떠났음을 알자 눈물이 글썽하였습니다. 늘 정거장에서 맞고 바래주던 그와 그렇게 헤어짐이 최후의 작별이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떠나면서도 어머님 걱정을 뇌이고 또 뇌이더랍니다. 아마 운명 때까지 눈앞에 어머님의 모습만 어른거렸을것입니다.

  

   동북대학 (註. 1942, 당초 일본 미야기현 東北대학이 아닌 東京 릿교대학 영문과에 입학) 에 간 줄 안 형에게서 무슨 의도에서였는지 동지사 (註. 1942~1943, 京都 同志社대학) 영문과로 옮겼다는 전보가 오자 아버지는 좀 노여운 기색이였습니다. 


   도꾜와 교또에서의 그의 고독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태평양에서는 战火가 들끓고 존경하던 선배들은 붓을 꺾거나 변절하였고, 사랑하던 친구들은 뿔뿔이 헤여졌고 하숙방에서 홀로인 듯한 자기를 발견하고 스스로 눈물 짓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  ……   

     륙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쉽게 씌여진 시”에서

     

  

     

   그러나 홀로 “새로운 아침”을 기다리며 그의 고독만으로 항거하기에는 현신의 물결은 너무 거센것이였습니다.

  

   1943년 7월, 歸鄕 日字를 알리는 전보를 받고 역에 나갔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매일 같은 마중 끝에 한 열흘 후에 온 것은 우편으로 보내온 차표와 그 차표로 찾은 약간의 수화물 뿐이었습니다. 차표를 사서 짐까지 부쳐놓고 출발 직전에 경찰에 잡혔던 것입니다. 교또대학에 있던 몽규형도 함께 잡혔습니다.

  

   압천서(川署)에 미결로 있는 동안 당시 도꾜에 계시던 당숙 영춘선생이 면회했을 때는 “고오로기”란 형사의 담당으로 일기와 원고를 번역하고 있었으며 매일 산책이 허락된다고 하더랍니다. 곧 나갈 것이니 안심하라고 하던 형사의 말은 결국 거짓이 되고말았습니다.

  

   동주와 몽규 두 형이 각 2년 언도를 받고 후꾸오까 형무소에 투옥된 1944년 6월이래, 한 달에 한 장씩만 허락되는 엽서로는 그의 자세한 옥중생활은 알길이 없었으나 《英和对照新约》을 보내라고 하여 보내드린 일과 “붓끝을 따라온 귀뚜라미 소리에도 벌써 가을을 느낍니다.”라고 한 나의 글월에 “너의 귀뚜라미는 홀로 있는 내 감방에서도 울어준다. 고마운 일이다.” 라고 답장을 주신 일이 기억됩니다.

  

  

   판결문의 결론은 결국 한민족에 대한  애착이 반제국주의 행위이기에 치안유지법 위반이 되었다고 명기하고 있다. 그 판결문에는 윤동주에 대한 치안유지법 위반 피고 사건에 대하여 당 재판소는 검사 에지마 다카시가 참여하여 심리를 한 결과 징역 2년의 판결을 내리고, 구류되었던 120일은 징역일수에 산입 처리한다고 밝히고 있다. 징역형의 이유는 윤동주가 어릴 때부터 민족 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감화 등에 의해 치열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갖고 있었으며, 일본의 조선 통치 방침을 비판하고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에 직면해 열세한 일본의 패배를 몽상하고 그 기회를 틈타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는 것이 이유로 적혀져 있다.


   

   매달 초순이면 꼭 오던 엽서 대신 1945년 2월에는 중순이 다 가서야 상기한 전보로 집안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고 말았습니다.

  

   유해나마 찾으러 갔던 아버지와 당숙은 우선 살아있는 몽규부터 면회하니 “동주!” 하며 눈물을 쏟고 매일같이 이름 모를 주사를 맞노라는 그는 피골이 상접하였더랍니다.

  

   “동주선생은 무슨 뜻인지 모르나 큰소리를 웨치고 운명했습니다.” 이것은 일본인 간수의 말이였습니다.

  

   아버지가 후꾸오까에 가신 동안에 집에는 한 장의 인쇄물이 배달되었으니 그 내용인즉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는 가져가거나 불연(不然)이면 구주제대(九州帝大)에 해부용으로 제공함. 속답 바람.”이라는 뜻이였습니다. 死亡 電報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백골 몰래 또 다른 고향에”가신 나의 형 윤동주는 한줌의 재가 된채 아버지의 품에 안겨 고향땅 간도에 돌와왔습니다. 약 20일후에 몽규형도 같은 절차로 옥사하였으니 그 유해도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동주형의 장례는 3월 초순, 눈보라치는 날이였습니다.

  

   자랑스럽던 풀이 메마른 그의 무덤우에 지금도 흰눈이 내리는지-

  

   10년이 흘러간 이제 그의 유고를 판각(板刻)함에 있어 師弟로서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으며 시집 앞뒤에 군것이 붙는 것을 퍽 싫어하던 그였음을 생각할 때 졸문을 주저하였으나 생전에 무명하였던 고인의 사생활을 전할 책임을 홀로 느끼며 감히 붓을 들었습니다. 이로 하여 거짓 없는 고인의 편모(片貌)나마 전해지면 다행이겠습니다.

  

1955년 2월

사제 일주 근식(谨识)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82~191쪽, 윤동주, 연변인민출판사, 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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