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작품설명 (1) ─ 일본 우키요에 두 점

2019. 5. 30. 19:37이런 저런 내 얘기들/내 얘기.. 셋





전시회 때 작품설명用으로,

A4용지 크기로 해서 50작품 정도를,

한 면에는 작품 사진을 풀로 넣고

다른 면에는 설명글을 써넣는 방식으로 하면

가격이 얼마나 매키겠냐 물어봤더니,,

하나에 2만원씩 쳐야겠다며

곱하기 50을 하니깐,

"아니, 여보슈! 그럼 100만원 아니요?!?"

안되겠던지,

65만원으로 어림잡아 부릅디다.

내가 10부 만들어 엮을 거 라니깐......

두루뭉수리~ 아퀴 짓지 않고 얼버무리고 말았는디.,

내가 전시회 리플렛 주문하면서

300장에 15만원 (포스터 5장 포함) 줬거던.

작업공정이 그거나 이거나.

종이값은 얼마 안되니깐. ... ,

자, 계산기를 두드려 봅세다.

?????

(총액은 접어두고서라도,) 

‘비교가격’으로 치면 많이 싼 거 같은디?

암튼,

그렇게 만들면 도록보다야 백 배 천 배 낫지요.

그림이 뿔뿔이 흩어져도 저것만 있으믄......


........

........


저깟거, 글 쓰는 거야 별 건 아닌디.

(이미 다 써 놓은 거 편집만 하면 되니깐.)

번거로워서리... 만일에 한다면 서둘러야만 ─.

근데 진짜, 내게 과연 의미성이 있을까?


........




말하자믄, 이런 식으로 하겠다는 거지비.








1









1794년, 6월 5일 어느 날, 에도의 극장가에 28점의 오쿠비에(大首繪-초상화)를 들고 흘연히 나타난 화가 한 명이 있었다.  그는 10개월 남짓 140여 점의 작품을 제작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어느 날 불현듯 자취를 감춰 행적이 묘연해졌다. 혜성처럼 왔다가 사라져버린 화가 토슈사이 샤라쿠(東洲齊 寫樂) ─


그는 생몰년도 알려진 바가 없다. 그가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버렸는지 등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았다. 그가 사라져버린지 200년이 지났건만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라곤 알다가도 모를 아이러니한 작품들과 그를 둘러싼 난무하는 추측들 뿐이다.


그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1910년이다.  독일의 동양미술 연구자 '쿠르트(Julius Kurth)'가 유럽에 흩어져 있는 그의 작품을 모아《SHARAKU》라는 책을 펴내면서부터였다. 그는 샤라쿠가 '노가쿠(能樂) 배우'일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일본인들에게 서양인이 샤라쿠를 발견해냈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깜짝 놀란 일본인들은 그제야 그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지금은 그에 관한 단행본만 해도 40종이 넘는다고 한다. 1869년에 출판된  [新浮世繪類考]에 의하면 쿠르트의 주장처럼 그는 '사이토 쥬로베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노가쿠 배우와 동일 인물이며 아와 영주의 비호 아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설적인 이야기 또한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할 수 없어 사실로 입증하지는 못했다.

 

일본에서는 샤라쿠를 연구하는 학자들 숫자만큼 샤라쿠가 많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그런데 최근에 이영희(한일 비교문화 연구소장)에 의해『또 하나의 샤라쿠』가 도쿄에서 발간되었다.  이영희는 이 책에서 그가 바로 조선의 풍속화가인 단원 김홍도라고 주장해서 관심을 끌었지만, 아직까지 그에 대해 설득력 있고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의 주장으로는 단원이 1794년에 정조의 신임을 받아 연풍현감으로 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정조의 밀명을 수행하는 한편 토슈사이 샤라쿠란 이름으로 활약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기간에 단원의 국내활동이 알려진 바가 없다는 점이 샤라쿠가 단원이라는 학설을 한몫 거든다.


샤라쿠의 오쿠비에(≒초상화)는 인기 배우에서 단역에 이르기까지 그 모델의 내면을 파헤치는 듯한 예리한 시선으로 그 속내를 포착한 리얼리즘으로 일관하고 있다. 샤라쿠의 그림에 나타나는 얼굴은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지만 그 얼굴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말하자면 그는 배우라는 인간의 얼굴을 통하여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을 그리려고 애썼던 것이다.


(※ 가부키에서는 극이 진행되다가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 정지 자세를 얼마간 취하게 되는데, 이 자세를 '미에(見得)'라고 한다. 주연배우는 각자의 대표적인 미에 자세를 갖고 있었다. 토요쿠니는 배우가 무대 위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인 이 미에 자세를 전신상으로 그렸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이 당대에 널리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좋아하는 배우의 얼굴이 이토록 형편없이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면 웬만한 골수 마니아가 아닌 이상 이런 야쿠샤에를 사려들지 않을 것이다. 이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배우의 멋진 모습이 담긴 그림이 좋을 수밖에‥‥‥. 그래서 샤라쿠가 10개월 만에 사라진 이유를 무한경쟁에서의 '자연도태'로 보는 의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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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파리의 에콜 드 보자르에서 열린 일본판화전에서 애호가들이 소장하고 있던 샤라쿠의 판화가 공개되었다. 이때 화가 로트레크는 찬탄을 금치 못한 나머지 소장가들을 찾아다녔다. 그는 기메 미술관에서 어느 유대인 소장가의 그림을 통해 샤라쿠와 더욱 깊은 만남을 가졌다.

(후략)



출처 : 인터넷에 떠도는 글






2



 

우타가와 히로시게, <간바라 역 주변의 눈 내리는 밤>

《東海道 53경치》 중에서 / 1833년/  다색목판, / 22.6 × 35.1 / 미네아폴리스 미술관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豊重 1797~1858)

- 안도 도쿠타로(安藤德太郞), 안도 히로시게(安藤廣重)


19세기 우키요에 판화의 대가 중 한 사람인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고흐가 사랑했던 화가로도 유명하다. 일본이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하면서 파리 사교계와 문화계에는 일본 열풍이 불어 닥쳤고, 유럽 서양 미술 전반에 그 영향을 떨쳤다.

이를 '자포니즘(Japonism)'이라고 하는데, 우키요에는 마네, 모네, 로트렉, 보나르, 고흐 등 수많은 화가들을 매료시켰다. 특히 고흐는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탕기 영감의 초상〉,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의 초상〉 등의 배경에 우키요에를 그려 넣었을 뿐만 아니라 우타가와 히로시게를 좋아해 〈에도 명소 100경(名所江戶百景)〉을 유화로 모사할 정도로 심취해 있었다.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일본의 풍경을 서정적이고 시적으로 그려 낸 화가이다. 그는 1797년 에도의 변두리인 아즈마지에서 하급 무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안도 도쿠타로로, 안도 히로시게라고도 불린다. 그는 13세 때 부모를 연이어 잃고 가장이 되었고, 아버지의 직업을 세습하여 에도 성의 소방일을 담당하는 무사로 일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그는 15세 무렵 우타가와 도요히로(歌川豊廣)의 문하에 들어갔다.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이듬해 스승에게서 우타가와 히로시게라는 이름을 받았고, 22세 때인 1818년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 장짜리 판화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도요히로의 문하에서 약 17년간 가부키 배우와 미인을 소재로 한 판화를 제작하면서 여타 우키요에 화가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그러나 화가로 활동하면서도 무사의 일은 계속했다. 그는 1823년 조부인 주에몬의 아들 나카지로에게 일을 물려주고 우키요에에 전념했다. 


1828년 스승 도요히로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 2대 도요히로의 자리를 물려받을 것을 권유받았지만 자신만의 작품을 그리고 싶었던 히로시게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2년 후 히로시게는 '이치유사이(一遊齋)'라는 호로 〈동도명소(東都名所)〉를 발표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풍경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일본 풍경화에 서구의 원근법과 빛의 변화를 표현하는 기술을 적용한 대담한 것이었다. 그는 교토, 나라, 에도 전역을 두루 여행하면서 현장에서 직접 관찰하고 사생한 바를 토대로 현실의 풍광을 그려 냈다. 특히 섬세한 필치와 차분하고 조화로운 색상으로 서정적이고 시적인 분위기를 묘사하는 데 뛰어났다.



도카이도의 53경치(東海道五十三次) <간바라>


히로시게의 대표작 〈도카이도의 53경치(東海道五十三次)〉는 1832년 가을, 왕실에 말을 진상하는 막부 관리로 선발되어 교토에 올라가면서 한 스케치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다. 도카이도는 에도에서 교토에 이르는 도로인데, 이 길을 통해 에도와 교토 간에 물자와 사람이 이동했다.

히로시게는 여행에서 돌아온 즉시 작품을 시작했다. 이 연작은 에도의 니혼바시에서부터 교토의 가모가와 삼조대교까지 53개 역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계절과 날씨,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풍광을 섬세한 필치와 따뜻한 색감으로 표현한 걸작이다. 이 작품은 훗날 파리의 살롱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면서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히로시게는 〈오미 8경〉, 〈오사카 명소 그림〉, 〈교토 명소 경치〉, 〈기소가도의 69역참〉 등 수많은 명소를 그렸으며, 이 중에는 이미 간행된 그림을 토대로 그린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은 〈도카이도의 53경치〉와 같이 스스로 관찰한 바를 토대로 한 작품들이다.


그는 사물을 직접 보고 묘사한 것을 토대로 현실 세계를 옮겨야 진실한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직접 답사하여 눈으로 확인한 후 이를 자신의 내면 세계와 조화시켜 표현했다. 히로시게는 직접 관찰을 토대로 지형을 세세히 묘사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원근법을 사용하여 화면을 구성했다.

또 계절과 날씨, 시간의 흐름에 따른 광선 변화를 표현해 서정적인 분위기를 부여했다. 그는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시적인 감수성을 발견해 내는 감성적인 인물이었는데, 그의 그림은 이런 특유의 감수성에 전통 일본화풍이 조화된 것으로 평가된다.


평생 일본의 전통적인 자연관을 담은 풍경화를 그린 히로시게는 '눈과 달과 꽃의 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말년에 발표한 〈설월화〉 3부작 〈기소지의 산천〉, 〈가나자와 8승지의 야경〉, 〈아와나루토 풍경〉 때문에 생긴 별칭인데, 이 연작은 일본의 자연을 가장 일본적인 감수성과 색채로 표현한 동시에 보편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히로시게는 말년에 〈명소 에도 100경〉을 비롯해 〈에도 근교 8경〉, 〈가나자와 8경〉 등 에도와 근교의 풍광을 그렸다. 특히 〈명소 에도 100경〉은 에도 토박이로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친밀하게 여겼던 에도의 100가지 풍경을 그리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세계적인 문화유산 우키요에



우키요에()는 글자 그대로 우키요(), 즉 속세의 모습을 목판에 새겨 찍어낸 그림을 말한다. 우키요에는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일본인의 감각은 그림에서 뛰어나게 표출되어 있다.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 기모노를 입은 여성, 분홍 · 보라색 등 파스텔조의 환상적인 색깔······. 오늘날 일본화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으로, 대단히 일본적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일본은 이미 10세기에 벚꽃, 달, 눈과 같은 일본의 독특한 자연을 그렸다. 이어 11, 12세기에는 〈겐지모노가타리〉에서 각 장면을 마치 영화처럼 농염한 색채로 두루마리 형태의 그림으로 표현했다. 15세기 자연을 박력있게 묘사함으로써 일본적인 수묵화를 창조한 셋슈()의 그림은 세계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당연히 목판화 우키요에에는 이러한 일본 그림의 전통이 녹아들었지만, 민중의 정서와 꿈이 보다 진솔하고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우키요에는 처음에는 〈호색일대남〉 같은 이야기책의 삽화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이 인기를 끌면서 감상용 판화로 독립적으로 제작되었다. 판화 기술은 처음에는 단순한 색으로 처리하는 데에 불과했으나, 차츰 미묘한 음영과 다양한 색채를 지닌 인쇄 기법을 고안해냈다.

 이러한 다색 판화는 밑그림을 그리는 사람, 목판을 새기는 사람, 목판에 물감을 칠하여 찍어내는 사람이라는 3사람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목판화도 그림인 이상 화가가 가장 중요시되며, 실제로 완성된 판화에는 화가 이름만 나타난다.

그러나 아름다운 우키요에는 밑그림을 그리고, 목판을 파고 물감을 칠하여 찍어 내는 기술자의 협력 없이는 세상에 나올 수 없다. 하나의 밑그림에 수십 개의 판목으로 나누어 색채와 음영을 채워서 완성된 작품을 찍어내기까지, 고난도의 기술적 숙련 없이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우키요에는 총기획을 담당하고 흥행의 최종 책임을 맡는 발행인도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판화로 대량 찍어냈기 때문에 대중도 쉽게 구입할 정도로 저렴했다. 도시로 여행 왔던 지방 사람이 우키요에를 선물로 가져가 전국 곳곳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우키요는 당대 풍속을 의미하지만, 실상 그 풍속의 중심은 단적으로 말하면 호색이었다. 그래서 우키요에는 성적 결합을 그린 춘화를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초창기 우키요에를 대표하는 화가, 히시카와 모로노부()의 경우, 그의 전 작품의 3할 정도가 춘화일 정도이다.

다양한 체위의 남녀 자태를 육감적으로 그렸는데, 육감적인 것을 넘어 음란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춘화는 대단한 인기였고, 춘화첩은 시집가는 딸의 혼숫감으로 넣어줄 정도였다. 그 외에도 히시카와는 가부키 극장과 유녀의 거리 등 유락가를 즐겨 그렸고, 행락지에 모이는 많은 사람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렸다.



기타가와 우타마로(麿, 1753?~1806)는 전성기에 유녀나 찻집의 여인 등 실제의 미녀를 모델로 하여 수많은 여성을 그려 미인화에 일가를 이루었다. 여인의 표정에서 미세한 변화를 포착하여 그렸으며, 미인화 시리즈를 발표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육감적인 묘사에 주력하여 퇴폐미를 지닌 미인을 주로 그렸다.

도슈사이 샤라쿠()는 수수께끼 인물이다. 그는 1794년 5월부터 다음 해 1월 사이에 공연된 가부키의 등장 배우와 당시 스모 선수의 모습을 소재로 우키요에를 집중적으로 제작했다. 그 후, 갑자기 활동을 접고 홀연 종적을 감춰버린다. 샤라쿠의 작품은 얼굴 모양을 대담하게 재구성하여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과장되어 있지만 심리묘사가 뛰어나다는 특징이 있다.

그는 이 같이 전례 없이 개성 있는 작품으로 '우키요에의 귀재', '천재 화가'로 추앙받고 있다. 그런데 '샤라쿠가 누군가?'라는 의문에 수많은 설이 떠돌았는데, 그가 김홍도라는 설도 있다. 화풍이 김홍도의 것과 비슷하고 김홍도가 어느 시기에 행방불명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김홍도가 조선통신사행의 일환으로 비밀리에 일본을 방문하여 활약하다가 조선으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것이다. 샤라쿠는 아직도 정확히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안도 히로시게(, 1797~1858)는 풍경화의 대가이다. 히로시게는 가부키 배우 그림, 미인도 등을 그렸으나 빛을 못 보다가 37세에 〈동해도오십삼차()〉에서 자신의 독자적이고 서정적인 풍경화를 그려 기록적인 판매 부수를 올리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히로시게의 풍경화는 계절, 날씨, 시간 등 자연의 모습이 여러 가지 다른 설정으로 변화되며, 동일한 비오는 장면이라 해도 다양한 상황들을 표현한다.

가쓰시카 호쿠사이(, 1760~1849)도 특수한 묘사법을 사용한 풍경화의 대가이다. 그의 대표작은 〈부악삼십육경()〉이 있다. 호쿠사이의 명성은 서양에서 드높아 프랑스 작가 에드몽 드 공쿠르는 1896년 그의 기상천외한 발상에 존경을 나타내면서 〈호쿠사이 연구서〉를 발간했으며, 유명한 작곡가 드뷔시는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에 영감을 얻어 자신의 작품 〈바다〉를 완성했다고 고백했다.





우키요에는 당시 서양에 수출되던 도자기 포장지로 사용되다가, 높은 예술성에 경탄한 유럽 미술상에 의해 서양에 소개되었다고 한다. 모네는 방 안을 우키요에로 가득 채울 정도로 열렬한 수집광이었으며, 고흐는 우키요에와 똑같은 작품을 만들며 우키요에의 나라 일본을 평생 동경했다.

당시 유럽의 회화는 주제와 상관없이 원근법과 명암으로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에 유럽 회화계는 또 다른 가능성을 찾고 있었는데, 우키요에가 보여준 자유롭고 강렬한 색채, 과감한 시점과 구성은 마치 가뭄의 단비처럼 경탄을 자아냈다. 우키요에는 특히 인상파에게 영향을 끼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들을 존재케 한 원천이라 할 수 있다.

많은 한국 사람은, 어려서부터 따라 배우고 존경해 마지않던 고흐, 마네 같은 인상파가 우키요에에 숭배에 가까운 경의를 나타냈다는 점, 또 우리가 대단하게 여기던 인상파 그림이 실상은 일본 화풍을 모방했다는 점을 뒤늦게 알고는 큰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세계 문화 구도를 얼마나 서양 패권 중심주의 시각으로 보아왔는지, 또 부지불식간에 우리가 얼마나 서양 문화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말해 준다. 외견상 별 볼일 없이 보여도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도저히 흉내 내기 어려운, 자신만의 색깔이 있고 장점이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볼품없어 보이는 문화라도 그 땅의 풍토에서만 빚어낼 수 있는 독특한 빛깔과 그 빛깔만의 독보적인 문화 분야가 있다.

우키요에는 똑같은 일본적 특성을 표현하면서도, 다른 어떤 분야의 일본 문화도 줄 수 없는 감동을 준다. 일본 문화는 도덕적 속박에 구애되지 않는 거침없는 상상력을 갖고서, 세속적 세계의 특수한 장면을 포착해 내는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

우키요에는 그러한 일본 문화를 가장 잘 표현한다. 일본 문화의 정수를 표현해 낸 우키요에가, 서양 문화의 하나의 흐름에 불과한 인상파를 압도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우키요에는 일본이 낳은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