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20. 18:21ㆍ산행기 & 국내여행
선암사의 사계절
선암사는 1년 365일 꽃이 없는 날이 없다. 春三月 생강나무, 산수유의 노란 꽃이 새봄을 알리기 시작하면 매화, 살구, 개나리, 진달래, 복숭아, 자두, 배, 사과, 영산홍, 자산홍, 철쭉이 시차를 두고 연이어 피어난다. 그것도 여느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늘름한 고목에서 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감히 예쁘다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때가 되면 선암사는 열흘마다 몸단장을 달리한 것처럼우리를 새롭게 맞이한다. 봄의 빛깔이란 어제와 오늘은 비슷해도 열흘을 두고 보면 확연히 다르다. 옛사람들은 花無十日紅이라고 했지만, 선암사는 열흘마다 다른 꽃을 선보이며 꽃이 지지 않는 절이 되었다.
신록의 계절에는 온 山이 파스텔톤의 연둣빛으로 물드는 것이 꽃보다 아름다운데, 백당나무 불두화는 주먹 만한 하얀 꽃을 불쑥 내민다. 이때 계곡 한쪽에서는 산딸나무 층층나무의 새하얀 꽃이 청순한 자태를 조용히 드러낸다. 절마당에서는 泰山木이 연꽃봉오리 같은 탐스런 하얀 꽃을 오늘은 이 가지, 내일은 저 가지에서 한 달 내내 피웠다 떨어뜨린다.
이처럼 신록의 계절에는 나무꽃이 하얗게 피어난다. 그러다 여름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오동나무는 보랏빛 꽃대를 높이 세우고, 자귀나무 빨간 꽃은 뼘을 재듯 가지마다 옆에서 뻗어나온다. 여름이 깊어지면 배롱나무꽃이 피기 시작해 장장 석 달 열흘을 위부터 아래까지 온몸을 붉게 물들인다. 그때가 되면 선암사 한쪽 구석에는 모감주나무의 노란 꽃, 치자나무의 하얀 꽃, 석류나무의 빨간 꽃이 부끄럼을 빛내며 우리에게 눈길을 보낸다.
봄이 나무꽃의 계절이라면 여름은 풀꽃의 세상이다. 선암사 뒤안길 돌담 밑에는 봉숭아-채송화-달리아가 돌보는 이 없이도 해마다 그 자리에서 그 모습으로 잘도 피고 진다. 그러나 절집의 꽃으로는 역시 사녀린 꽃대에 분홍빛으로 청순하게 피어나는 상사화가 제격이고, 여름이 짙어가면 삼인당 섬동산은 빨간 꽃술의 꽃무릇으로 환상적으로 뒤덮인다.
가을은 은행잎이 떨어져 절마당을 노란 카펫으로 장식하고 청단풍이 새빨갛게 물들어갈 때가 절정이다. 가을이 깊어가면 밤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가 온 산을 마치 캔버스에 바탕색 칠하듯 차분한 갈색으로 뒤덮으며, 들국화 ·구절초 · 쑥부쟁이· 코스모스 ·감국이 여름꽃의 바통을 이어받아 선암사 화단을 장식하면서 호젓하고 스산한 정취를 자아낸다. 가을을 심하게 타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 계절 선암사에 오면 누구나 여린 감상에 물들게 된다.
사람들은 곧잘 겨울은 삭막하다고 말한다. 겨울나무는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있다며 꽃 피고 잎 돋던 그때와 비교하며 깊은 정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선암사의 겨울은 그렇지 않다. 소나무 전나무 같은 늘푸른바늘잎나무야 우리 산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선암사는 남쪽 끝자락 남해 가까이 있어 늘푸른넓은나무의 난대성 식물이 잘 자란다. 동백나무· 후박나무· 녹나무· 태산목· 팔손이나무· 붉가시나무· 종가시나무· 호랑가시나무가 여전히 절마당 곳곳에서 초록을 빛내고 있다. ( …… )
남쪽이어서 눈이 드물 것 같지만 선암사에는 눈도 많이 내린다. 눈 덮인 선암사 진입로 산자락을 뒤덮은 산죽밭의 모습은 환상의 겨울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초록과 흰색의 향연이다. 내가 선암사에서 다른 것보다 이들 나무의 이름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려고 애쓰는 것에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다. 그것은 나무의 이름을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에는 너무도 차이가 많기 때문이다. ( …… )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열심히 나무마다 이름을 말해주지만, 나의 학생들은 그것을 별로 귀담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장담한다. 두고 봐라, 너희도 나이가 들면 반드시 나무를 좋아하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니, 그때 가서는 반드시 나를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선암사 최고의 볼거리는 역시 꽃이다. 그중에서도 선암사를 대표하는 꽃은 매화이며, 선암사 매화 중에서도 제일가는 것은 20여 그루가 줄지어져 있는 무우전과 팔상전 담장길의 매화다. 한쪽은 백매, 한쪽은 홍매가 만발할 때면 오직 그것만 보기 위해서라도 선암사를 찾아갈 일이다. 나가 선암사에 간 것이 수십 차례인데 그중 절반이 春三月 매화꽃 필 때였다.
청수하여 高士에 비할 것이 梅花의 好品일지는 모르되, 화사하면서도 농염한 것이 탐스러운 부잣집 새색시가 곱게 차려입은 화려한 복장에 고급향수를 기구껏 차린 듯한 매화도 결코 못쓸 것이 아님을 알았다. 매화다운 매화도 좋지마는, 桃花 같은 매화도 또한 일종의 정취가 있는 것이다. 하물며 桃花일 성불러도 매화의 기품이 있을 것이 다 있음에랴. 매화인 체 아니하는 매화, 매화티를 벗어난 매화가 어느 의미로 말하면 진짜 매화라 할 매화일지도 모른다.
─ 육당 최남선,《심춘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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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오죽헌의 율곡매,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 구례 화엄사의 백매, 그리고 선암사의 무우전매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무우전매(無憂殿梅)란 정확히 말하면 원통전 담장 뒤편의 백매와 각황전 담길의 홍매 두 그루로, 천연기념물 488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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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보니
내가 수채화 배우면서 처음 그려봤던 겨울 풍경화,
김제 금산사 입구의 매점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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