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드미트리에비치 폴레노프

2019. 1. 12. 11:11미술/ 러시아 회화 &




바실리 폴레노프 - 러시아 미술에 외광파 기법을 최초로 소개하다

프리츠 타우로프 - 노르웨이 미술과 프랑스 미술의 연결 고리가

언제부터 해보고 싶었던 러시아 화가들 작품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고자 합니다. 3~4명의 러시아 화가들 이야기가 더해지면 모두 10명 정도의 화가를 만나보게 되는 셈인데, 오늘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가는 저의 꿈을 토닥거리고 있습니다. 러시아에 처음으로 외광파 기법을 소개한 바실리 드미트리에비치 폴레노프(Vasily Dmitrievich Polenov, 1844-1927)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초야권 primae noctus, 1874


젊은 여자를 대동하고 노인이 영주를 보고자 찾아왔습니다. 한눈에 봐도 고약한 인상을 가진 영주는 허리에 손을 척하니 올리고 한 계단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불안한 눈으로 영주를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처녀의 눈빛은 겁에 질려 있습니다. 곧 결혼을 앞둔 처녀가 초야권을 영주에게 바치러 온 것이죠. 중세 스위스에서는 남편이 아내 될 여자의 초야권을 갖기 위해서는 ‘초야세’라는 세금을 내야 했다는 기록도 있다는데, 지금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성직자나 그 지방의 영주가 그 권리를 행사하는 곳이 많았다고 하지요. 권력은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일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어린 소녀의 가느다란 한숨소리, 음흉한 영주의 웃음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고 하루를 마감하는 해는 건물의 흰 벽에 불안한 붉은 그림자를 남기고 넘어가는 중입니다. 그건 그렇고 눈에 거슬리는 개 두 마리― 왜 권력자들은 개를 데리고 나타나는 모습이 많을까요? 하는 짓이 개와 닮아서 그런가요?


폴레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높은 계급의 장교였고 한편으로는 고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미술을 좋아하는 아마추어 화가였는데, 이런 부모의 재능은 두 사람 사이의 아이들이 미술과 과학을 좋아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콩 심으면 콩 나는 것이 맞지요.


할머니의 정원 The Grandmother's Garden, 54.7cmx65cm, 1878


이제는 허리가 구부정해져 지팡이와 옆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하는 할머니가 정원 산책을 나섰습니다. 뒤로 보이는 건물도 할머니만큼의 나이를 먹었겠지요. 어쩌면 훨씬 그 이전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정원의 나무와 꽃들은 여름의 햇빛 아래 푸르름이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 길을 걷는 할머니의 머릿속에는 무수한 상념이 떠오르겠지요.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나만 늙어가는 것일까? 분홍색 옷을 입은 젊은 여인에 비해 할머니가 입고 있는 검은색 옷은 이제는 되돌아갈 시간이 없음을 알려주는 징표 같아서 마음이 언짢아집니다.


열두 살부터 체계적으로 드로잉을 배운 폴레노프는 3년 뒤 풍경화가인 치스타코프에게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웁니다. 1863년 열아홉의 폴레노프는 법률을 전공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 입학하는데 왕립 아카데미에도 입학을 합니다. 법학과 미술을 같이 전공하기로 한 것이죠. 성격이 서로 다른 두 개의 분야를 함께 공부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폴레노프는 해내고 맙니다.


숲이 무성한 연못 Overgrown Pond, 1879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어딘가 낯이 익은 풍경입니다. 수련이 떠 있는 연못, 작은 선착장은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고 우거진 숲의 품에 안긴 듯한 벤치가 보입니다. 숨은 듯 만 듯한 여인은 벤치에 앉아 책을 펼쳤습니다. 고요하고 싱그럽습니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한, 언젠가 본 듯한 풍경화를 ‘무드 풍경화’라고 한다지요. 흰 들꽃이 듬성듬성 피어 있는 길은 여인이 앉아 있는 곳으로 이어졌습니다. 조명을 흐리게 하고 음악이 있다고 해서 ‘무드’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괜찮으시면 저하고 연못을 천천히 둘러보시면 어떨까요? 저라면 벌건 대낮이지만 그렇게 ‘무드’를 잡아보겠습니다.


1871년 스물일곱의 폴레노프는 변호사 자격증을 따며 대학을 졸업합니다. 또한 왕립 아카데미에서는 ‘야이로 딸을 일으키심’이란 작품으로 금메달을 수상합니다. 이렇게 되자 폴레노프의 고민이 시작됩니다. 금메달에 대한 부상은 유럽 여행을 정부가 지원하는 것이었거든요. 몇 달을 고민한 폴레노프는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다보면 ‘하느님도 편애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보트를 타고. 아브람체보 on the boat. Abramtsevo, 1880


앞 작품 속 여인일까요? 녹색의 한가운데를 흘러가고 있는 여인에게 마치 무대의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듯합니다. 도드라져 보이지만 보트의 색과 주변의 수련으로 점차 엷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여름 한철 조금씩 흔들리는 배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좋겠다 싶습니다. 아브람체보는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철도왕’ 사바 마몬토프의 집이 있는 곳입니다. 당시 마몬토프는 러시아의 젊은 화가들을 아낌없이 후원하던 사람이었죠. 때문에 화가들이 자주 모이던 곳이었습니다. 그들 중 잠시 머문 화가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눌러앉기도 했습니다. ‘아브람체보파’가 형성될 정도였습니다.


1년간 독일과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폴레노프는 수많은 스케치와 드로잉을 제작합니다. 그 후 파리에 정착, 4년간을 머무는데 이 기간 동안 폴레노프는 역사화와 풍속화, 초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제작합니다. 그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가장 감명을 받았던 것은 야외에서 작업하는 프랑스 화가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작품에 매료되었는데, 폴레노프가 풍경화에 마음이 기운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래된 방앗간 Old Mill, 1880


숲속 물방앗간이 한여름을 나고 있습니다. 방앗간 벽에는 군데군데 지나온 세월의 흔적들이 머물고 있습니다. 한때는 힘차게 수레가 돌아갔고 사람들 소리로 소란했겠지만 이제는 줄어든 물의 양으로 물레방아는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를 숲들이 조금씩 대신하고 있습니다. 낚싯대를 물에 드리우고 있는 소년이 보입니다. 방앗간은 움직임의 상징이지만 낚시는 고요함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아이가 커서 세상으로 나가고 나면 물방앗간, 저만 혼자 외롭겠습니다.


이때부터 폴레노프의 작품 속에는 두 가지 요소가 나타납니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받은 고전교육과 아카데미에서 배운 기법은 그를 고상한 역사화를 그리는 길로 이끌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풍경화였습니다. 결국 이 두 가지 요소가 오랜 기간 동안 그의 작품 속에 혼재되어 나타나는데, 1880년대 후반 그러니까 30대 후반부터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불타버린 숲 The Burnt Forest, 89.7cmx170cm, 1881


예전에는 화전을 일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계층이었지요. 그림 속 숲은 화전의 모습은 아닙니다. 자연 발화로 타버린 숲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화마가 훑었던 지역이었지만 자연은 다시 생명력을 회복했습니다. 검게 그을렸던 땅에는 풀들이 자라기 시작했고 사이사이 나물들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무너지지 않는 생명력, 그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큰 가르침이지요. 나물을 향해 뻗은 여인의 손과 등에서 끝나지 않은 인간의 생명력을 보게 됩니다.


5년간의 외국 여행을 끝내고 서른둘의 폴레노프는 러시아로 귀국합니다. 세르비아와 불가리아가 터키에 대한 독립을 주장하고 나서자 터키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는 범슬라브족을 보호한다는 이름 아래 터키를 침공하는 러시아-터키 전쟁이 일어납니다. 폴레노프는 이 전쟁에 종군화가로 참여합니다.


모스크바 뒷마당 Moscow Backyard, 1878


어느 도시건 뒷골목에 가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 사는 냄새는, 반듯하게 화장을 하고 있는 큰길의 얼굴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쌩얼’을 보여주는 뒷골목에 가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멀리 보이는 교회의 건물들도 말쑥한 모습이지만 모스크바의 뒷마당에도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닭의 모이를 주러 나온 아주머니, 풀밭에서 혼자 우는 아이, 놀기에 바빠 동생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하는 신이 난 아이들― 모두 우리 사는 모습입니다. 근사하고 멋진 교회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있지만 세월을 이겨내고 있는 낡은 집은 땅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습니다. 햇빛 가득한 마당 위로 폴레노프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부르는 찬가가 흐르고 있습니다.


다음 해 전쟁이 끝나고 귀국한 폴레노프는 왕립 아카데미 시절부터 교류를 맺고 있던 화가들과 함께 이동파 전시회에 참가합니다. 이때 출품한 ‘모스크바 뒷마당’은 러시아의 전통적인 풍경에 서정을 듬뿍 담아 외광파 기법을 이용하여 제작한 것이었습니다. 외광파 기법이 러시아 최초로 소개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타이비어리드 호숫가 on the Tiberiad Lake, 1888


이스라엘 북부 골란 고원 아래에 있는, 요즘 이름으로는 타이비어리어스* 호수입니다. 주변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의 모습이 많이 익숙합니다. 폴레노프가 예수님과 관련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림 속 인물은 예수님을 상상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제우스의 모습에서 가져와 조금씩 변형된 것이죠. 생각해보면 유대 지방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모습은 그림 속 남자의 모습과 많이 닮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길옆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있습니다. 길은 그 사이로 이어지겠지만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도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도 돌이 많은 길인 것은 분명합니다.

*‘타이비어리어스’는 영어 Tiberias의 발음을 그대로 적은 것 같네요. 우리말 표기로는 ‘티베리아스’ 또는 ‘티베리우스’라 적어야 할 것 같고요. 히브리어로는 ‘티베랴’. 본래 이스라엘 갈릴리 지방의 갈릴리 호수 서안에 있던 마을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로마 2대 황제 티베리우스에서 따왔습니다. 그러니까 타이비어리어스 호수는 곧 갈릴리 호수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때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폴레노프는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깨끗하고 밝은 색, 색깔이 있는 그림자, 자유로운 붓 터치와 같은 기법을 소개했고 이 무렵부터 러시아 회화의 전통에 따라 사실적인 풍경화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는 풍경화를 통해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삶과 어우러진 러시아의 시적인 풍경들 전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의 기법은 그의 뒤를 이어 등장하는 풍경화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예수와 죄인 Christ and the Sinner, 1888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요한복음서 8:1~11


여전히 돌을 던지고 있는 저를 보면, 천당 가기에는 애당초 글렀습니다.


1881년부터 다음 해까지 폴레노프는 독일과 중동 여행길에 오릅니다. 이미 러시아 최고의 풍경화가라는 이름을 얻은 그는 그가 좋아하는 풍경과 신약성서의 내용을 합하고자 하는 시도를 합니다. 특히 성경 속 풍경을 연구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 지방을 두 번이나 방문해서 그곳의 풍경과 건축, 사람들을 연구했습니다. 당대 러시아 화가 중 가장 많은 해외여행을 한 화가라는 말이 붙었는데, 현장을 중요시하는 사람에게 많이 나타나는 모습이지요.


아브람체보의 가을 Autumn in Abramtsevo, 1890


여름은 위대했다고 릴케는 노래했습니다. 위대한 이유는 다가올 계절에 대비해 생명력을 극에 이를 때까지 끌어올리기 때문이지요. 가을은 그 생명력이 몸 깊숙이 숨는 계절입니다. 한여름 녹색 범벅이었던 숲에도 생명들이 깊은 곳으로 숨어들고 있습니다. 더러는 붉게 더러는 노랗게 숨고, 떠난 흔적을 나타내고 있는데 숲을 가득 안고 흐르는 물도 그만 숲을 닮아버렸습니다.


1882년 폴레노프는 모스크바 예술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그의 제자로는 레비탄과 코로빈처럼 훗날 러시아 미술사의 큰 별이 되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폴레노프가 러시아에서는 화가이자 훌륭한 스승이었던 것으로 높이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폴레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의 회원이 됩니다.


바람 Dreams, 1894


꿈이 모이면 바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상(理想)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광야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습니다. 약한 사람은 끝없이 약해지고 권력을 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권력을 잡습니다. 설사 영혼을 악마에게 판다고 해도 그 자리를 지키고자 합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그림 속 젊은이는 30대 초반의 나이로 사형을 당합니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던진 사람이 역사 속에 한둘이었겠습니까? 그래도 세상에 대한 그의 바람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고 시간은 지금까지 흘렀지요. 그러나 여전히 바위 위 젊은이는 오늘도 저렇게 앉아서 세상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제쯤 훌훌 털어버리고 크게 웃으며 저잣거리로 내려올 수 있을까요.


그림뿐만 아니라 극장의 장식에도 폴레노프는 재능을 발휘해서 여러 극장의 개보수 작업에 참여하여 많은 성과를 이룹니다. 그의 여동생 폴레노바도 화가였는데, 오랜 기간 명성을 얻은 최초의 러시아 여류화가였고 도자기, 판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 진출해 성과를 이루었다고 하니까 타고난 피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이른 눈 Early Snow


아직 잎들이 다 지지도 않았는데 눈이 내렸습니다. 지평선을 건너온 찬바람은 미처 떨어지지 못한 잎들을 흔들고 있고 아스라한 지평선은 파란색으로 남아 다가올 겨울을 더욱 차갑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직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합니다. 크게 휘어 나가는 강 위로 쌓인 눈은 조만간 강물도 덮을 기세입니다. 겨울은 침묵해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침묵해야 할 시간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지요. 침묵 뒤에 오는 고요함은 다시 그 뒤를 이을 생명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되거든요.


83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 해에 폴레노프는 공화국 인민화가의 칭호를 받습니다. 러시아의 풍경화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그에게 어울리는 영예였겠지요.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느님의 편애를 받은 것 맞지요?


숲길을 산책하는 여인 paziergangerin auf eneiem Waldweg, 114.5cmx67.3cm


가을 속에서 여인이 걸어 나오는 것일까요, 여인의 뒤를 가을이 따라오는 것일까요?

 

프리츠 타우로프 - 노르웨이 미술과 프랑스 미술의 연결 고리가 되다

 

프리츠 타우로프

노르웨이 미술과 프랑스 미술의 연결 고리가 되다

_레스까페(Rescape) 선동기

http://blog.naver.com/dkseon00/140147304470  

네이버 파워블로그 <레스까페>의 쥔장 선동기님은 블로그에 올린 글과 그림을 모아 2009년 <처음 만나는 그림>이라는 책을 아트북스에서 펴냈습니다.

 

금방 그림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몸에서 끓어오르는 열기가 다 날아간 탓도 있지만 다 여물지 못한 마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다시 그림을 뒤적이게 됩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화가들이 보기에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유럽의 변방이었습니다. 19세기 후반이 되면 ‘변방의 화가들’이 파리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들만의 문화가 섞이면서 파리나 이탈리아 화가들과는 또 다른 맛을 주는 작품들이 등장합니다. 노르웨이의 프리츠 타우로프(Frits Thaulow, 1847-1906)의 작품을 볼까 합니다. 그런데 이 화가의 이름을 프리츠 테우로브라고 하는 자료도 있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노르웨이 대사관에라도 문의를 해봐야 할 모양입니다.

  

함부르크 엘방크에서 In The Elbank, Hamburg, pastel on paper, 35.6x50.8cm, 1886


아무리 사전을 뒤져도 Elbank라는 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지명인지 또 다른 명사인지 알 수 없지만 지명으로 보기로 했습니다. 공원 벤치에 눈이 소복이 내렸습니다. 인적 없는 공원에는 적막함이 가득하고 모든 것을 덮은 눈 위로 언뜻 바람 한 줄기가 느껴집니다. 문득 두툼하게 차려입고 나가 벤치 위 눈을 조금 치우고 앉아서 겨울나무를 보고 싶어집니다. 방금 만들어진 발자국 위로 내리는 눈을 본 적이 언제였던가요?


타우로프는 부유한 약사의 아들로 오슬로 근처 크리스타냐에서 태어났습니다. 스물세 살 때부터 코펜하겐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했는데 처음에는 바다 풍경을 그리는 화가가 되고자 했습니다. 2년간의 공부를 끝내고 한스 구드 밑에서 다시 2년간 그림 공부를 하고는 미술의 중심인 파리로 건너갑니다.


시모아 강의 겨울 Winter at Simoa River


노르웨이 시모아 강이 겨울의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습니다. 적지 않게 내린 눈을 헤치고 허리 굽은 여인이 강가에 섰습니다. 여인 뒤의 나무 한 그루가 뒤에서 여인의 모습을 따라하고 있습니다. 앙상하게 남은 가지가, 겨울이어서 그럴까요, 더욱 힘들어 보이는데, 강물은 흰 산을 가득 안고 천천히 흘러가고 있습니다. 강 건너 지붕 위, 푸른색 연기는 강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딘가 눈 속에 묻혀 있을 배가 보였다면 덜 쓸쓸하지 않았을까요?


타우로프는 4년간 파리에 머물면서 바다와 해안 풍경을 그린 작품 몇 점을 살롱전에 출품합니다.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그는 파리에서 당시 유행하던 프랑스의 사실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가 보기에 사실주의는 노르웨이 화가가 꼭 배워야 할 것이었습니다. 특히 바스티엥 르파주를 존경했는데,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의 민족성 같은 것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대리석 계단 The Marbles Steps, 1903


방금 배에서 내린 붉은 치마의 여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출렁거리는 물을 건너와 단단한 대리석 포장길을 걷는 여인을 불러 세우고 싶습니다.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시는지요? 흔들리지만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물인가요? 아니면 단단하게 내 발을 지탱해주지만 정해진 곳으로만 열려 있는 대리석 길인가요? 여인은 말이 없고 화가가 툭툭 던져 놓은 붓 자국 따라 물결이 출렁거리고 있습니다.


1879년 파리 생활을 마친 타우로프는 덴마크의 스카겐을 찾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스칸디나비아 반도 출신 화가들이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죠. 다음해에 오슬로로 돌아온 그는 본격적으로 노르웨이 화단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는 타우로프 개인뿐만 아니라 노르웨이 미술계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프랑스의 도르도뉴 강 The River La Dordogne in France, 1903


마을을 크게 돌아 나가는 강 위로 해가 졌습니다. 하늘에 걸린 남은 햇빛은 강을 거울삼았고 건너편 산은 이제 푸른색으로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얕은 물가에는 새 한 마리가 저녁 맞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잔잔한 물소리가 가득한 강둑에서 마을을 건너다봅니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고요하게 저무는군요. 한 해의 끝도 이렇게 저물었으면 좋겠는데, 제가 사는 곳은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타우로프는 1880년대 노르웨이에 보다 진보적인 미술가들의 모임을 만들고 전시회를 여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런 노력으로 1882년 제1회 노르웨이 미술전시회가 열리게 되었죠. 또 그가 고향인 오슬로의 거리와 공원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은 노르웨이 풍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사람들은 타우로프를 당대 노르웨이의 미술계를 이끄는 화가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의 강이 있는 풍경 A French River Landscape


숨은 그림 찾기처럼 사람을 찾았습니다. 꽃이 흐드러진 나무 밑, 짐을 진 여인이 밭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풍경입니다. 화면을 채우고 있는 것들 중에 화사한 색을 가진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원색과 원색의 중간색들이 모이면 이렇게 소박하고 편한 느낌을 주는군요. 튀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세상에 익숙해 있다가 이런 작품을 만나면 내가 얼마만큼 멀리 왔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참 많이 멀리 왔네요.


1889년, 마흔두 살이 되던 해 타우로프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석해서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게 됩니다. 훗날 모네, 로댕과 친구가 되는데 이때 그들을 만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친분들이 프랑스와 노르웨이의 미술을 연결하는 고리가 됩니다.


프로그너 만의 저녁 Evening at the Bay of Frogner, Oil on panel, 1880


오슬로 프로그너 만의 저녁이 찾아왔습니다. 일을 끝낸 사내들은 농기구를 어깨에 매고 긴 둑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루를 보낸 사내들이 귀가하는 모습은 정말 멋지지요. 물론 도시에서는 저런 모습이 이제 ‘삭제’되었지요. 집에 가야 할 때가 되었는데도 한 아이는 일어설 생각이 없습니다. 이제 그만 가야 하는 아이가 일어서서 재촉을 해보지만 쉽게 일어설 모습이 아닙니다. 별이 뜰 때까지 놀다가 엄마 팔에 끌려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때가 생각납니다. 하늘에 걸린 구름, 잔광으로 황금색이 되었습니다.


만국박람회에 참석한 3년 뒤, 타우로프는 파리로 거처를 옮깁니다. 그곳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게 되는데 막상 파리로 자리를 옮긴 그는 파리가 자신의 작품 소재가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됩니다. 결국 그의 대표작들은 몽트뢰유 쉬르 메르, 디에프, 보리유 쉬르 도르도뉴와 같은 작은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신부 Le  Curé, 65x81cm


녹음 우거진 길을 따라 검은 사제복 차림의 신부님이 등장했습니다. 멀리 높은 첨탑의 교회에서 출발하셨겠지요. 길 옆 빨간 지붕의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니 식사 때가 가까운 것 같은데 어디를 가시는 길일까요? 신부님이 가는 길과 우리들이 사는 집 사이에는 나무들이 마치 벽처럼 서 있습니다. 잠시 그 길에서 내려와 식사라도 하고 가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외롭고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우선 배가 든든해야 하거든요. 불과 몇 달 전 초록의 세상을 한참 즐겼는데 아주 오래된 풍경처럼 보이는 것은 지금 창밖이 겨울이어서 그렇겠지요.


타우로프의 작품의 많은 부분은 대단한 기교로 강물을 묘사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시적인 감흥이 가득한 배나 도시, 항구, 아름다운 다리 그리고 바다 풍경도 있습니다. 물에 관한 묘사는 제 기억에 아이바조프스키에 필적할 만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비 온 뒤 디에프의 시장 Marketplace in Dieppe, After a Rainstorm, 66.04x87.63cm, 1894


한바탕 비가 내리고 난 뒤 하늘이 걷히고 있습니다. 구름 사이로 별이 보입니다. 비가 왔으니 별빛은 또 얼마나 맑을까요? 텅 빈 시장 광장 건너, 상점 몇 곳이 불을 밝히고 있고 건물에 걸어놓은 등은 점차 짙어지는 어둠을 몰아내고 있습니다. 고개를 들어 멀리 보니, 아! 달이 뜨고 있습니다. 하늘 저편이 환한 것을 보니 오늘 저녁의 어둠은 금방 부서지겠군요.


타우로프는 자신이 그리는 그림의 주제가 늘 비슷한 분위기를 갖는 것을 피하기 위해 끝없이 여행을 합니다. 프랑스와 스페인, 벨기에와 네덜란드, 그리고 노르웨이의 곳곳이 대상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여행만큼 사람을 키우는 것도 없습니다. 물론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이지만 모든 여행의 마지막은 돌아오는 데 있습니다. 돌아오지 못하는 여행은 의미가 없다고 말하면 너무 가혹한 것이 될까요? 천천히 흐르는 강물과 그 위에 다양하게 반사되는 것을 그리는 전문가가 되다시피 한 타우로프는 1년에 50점 정도의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물론 그 크기가 작았다고는 하지만 1주일에 한 편 꼴이니까 적은 양은 아니죠. 그런 그에게 프랑스와 튀니지에서는 훈장을 수여했고 그 외에 수많은 영예가 주어졌습니다. 화가로서 확실히 성공한 것이지요.


자정미사 Midnight Mass, 90.17x116.84cm, 1901


자정미사는 보통 성탄 때 많이 올립니다. 미사가 끝나고 보면 대개 자정이 가깝습니다. 성당에 불이 켜 있기는 하지만 성당으로 가는 길은 마치 대낮처럼 환합니다. 신을 만나러 가는 길, 늘 저렇게 환했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 호인수 신부님의 시를 시화로 담은 작품을 한 점 얻었습니다.


 나에게 향을 드린다

  _호인수


  꽃 같은 젊은 수녀님 종신서원 미사에

  복사가 내 앞에 와서

  나에게 향을 드린다

  으흐

  향 연기 맵지 않아도

  눈 못 뜨겠다

  고개 못 들겠다


다음 주에는 고해성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고해할 것이 산더미 같으니 걱정입니다.


타우로프는 두 번 결혼합니다. 그가 스물일곱 살 때 스물두 살의 잉게보르그와의 결혼이 첫 번째였습니다. 그러나 이 결혼은 12년 만에 이혼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해 노르웨이의 유명한 공증인의 딸인 알렉산드라와 재혼합니다. 타우로프가 서른아홉, 알렉산드라가 스물네 살이었습니다. 조강치처를 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면 지나친 상상의 결과일까요?


얼음에 뒤덮인 강 근처의 공장 건물

A Factory Building near an Icy River in Winter, pasetel on paper, 64.8x100cm, 1892


오늘은 바람 끝이 매서웠습니다. 한편으로 겨울이 온 것이 반가웠지만 다름 한편으로는 불편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모진 시간이 되겠지요. 얼마나 추웠는지 그림 속 강물 위로 살얼음이 내려앉았습니다. 그래도 머지않아 얼음이 녹을 것 같습니다. 떠오르는 햇볕이 벌써 지붕 위까지 도착했거든요.


타우로프의 몇몇 작품에서는 인상파의 느낌이 있지만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었고 기본적으로 그는 사실주의의 틀 안에서 활동한 화가입니다. 그는 쉰아홉의 나이로 네덜란드의 볼렌담에서 세상을 떠나는데, 프랑스에서 거주했던 것을 생각하면 혹시 여행 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그렇다면 여행의 끝은 돌아오는데 있다는 말이 다시 생각납니다.



출처 . [레스까페 2011.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