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화가, 바실리 베레시차긴의 전쟁이야기

2018. 12. 11. 21:51미술/ 러시아 회화 &




바실리 베레시차긴

군인이었을까? 화가였을까?

_레스까페(Rescape) 선동기

http://blog.naver.com/dkseon00/140172126463      2012.11.07

네이버 파워블로그 <레스까페>의 쥔장 선동기님은 블로그에 올린 글과 그림을 모아 아트북스에서 <처음 만나는 그림>(2009)과 <나를 위한 하루 그림>(2012)을 펴내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았습니다.


 

얼마 전 전쟁에 대한 그림을 소개하고 나서 기분이 좀 우울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특이한 그림 한 점을 보게 되었습니다. 현대 화가의 작품인 줄 알았는데 100여 년 전 러시아 화가의 것이었습니다. 궁금해서 화가를 찾아보았더니 전쟁을 주제로 작품을 그렸지만 전쟁을 증오했던 작가였더군요. 다시 우울해질 것을 각오하고 작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러시아의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베레시차긴 (Vasily Vasilievich Vereshchagin, 1842-1904)의 작품은 보시기에 견디기 힘들 수도 있지만, 이것도 우리가 겪었던, 겪고 있는 것들 중 하나입니다.

 



전쟁의 화신 The Apotheosis of war, 1871, Oil on canvas, 127x197cm



소름끼치는 장면입니다. 쌓아놓은 해골들이 작은 산을 이루었습니다. 까마귀들은 하늘에서, 해골 위에서 햇빛 아래 탈색되고 부서져가는 해골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멀리 보이는 마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요? 그리고 몸은 다 어디에 가고 머리만 모여 있는 것일까요? 전쟁이 끝나고 미처 치우지 못한 주검들은 푸른 하늘 밑에서 풍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너무 맑은 날이어서, 너무 밝은 때여서 더 처참합니다. 전쟁은 살아 있는 영(靈)을 파멸시키기도 하지만 죽은 혼(魂)도 비참하게 만드는 모양입니다.

베레시차긴은 러시아의 체레포베츠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땅을 소유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집안은 부유했고 지주나 귀족의 아이들이 장교가 되거나 외교관이 되던 당시의 풍습대로 그의 부모도 그가 여덟 살이 되던 해, 알렉산드르 예비 사관학교에 그를 입학시킵니다. 이 학교를 졸업하면 정식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예비학교를 졸업하고 베레시차기은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도시 성벽에서, ‘안으로 진격’  At the city wall, ‘Let them enter’, 1871, Oil on canvas, 95x160.5cm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의 한 구석이 허물어졌습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이 그 틈으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맨 앞줄의 병사들은 혹시 있을지 모를 적의 공격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성급하게 덤비는 병사를 손으로 막는 병사는 분위기로 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처럼 보입니다. 벽 너머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 짐작을 하고 하겠지만 그 위험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애써 피하고 싶겠지요. 뒤쪽에 줄을 지어 계속 행진하고 있는 병사들을 보며 전쟁터에서의 인간의 목숨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 베레시차긴은 학교 재학 시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고 때문에 앞으로 잘 나가는 장교가 될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순간에 길을 바꾸기도 합니다. 군사 미술에 관심을 보였던 그는 사관학교를 다니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 야간반에서 그림을 배웁니다. 열여덟 살 되던 해 베레시차긴은 우등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 종일반에 입학합니다. 장교가 되는 길을 걷어차고 화가가 되기로 한 것이죠.



전쟁 포로의 길 The Road of the War Prisoners



눈 쌓인 길 위로 주검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그 사이로 주인을 잃어버린 짐들이 보입니다. 크게 돌아 언덕 사이로 빠져 나가고 있는 이 길은 아마 전쟁 포로들이 끌려갔던 길이었겠지요. 부상을 입은 포로들이 이 혹한의 길을 무사히 가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낙오된 포로들은 버려졌거나 살해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포로로 끌려가는 길은 그래도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길이었지만, 길 위의 주검들은 희망의 끝자락도 잡지 못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길은 문명을 가져오는 통로가 되기도 하지만 야만도 함께 오는 곳이죠. 길 옆 전봇대의 전선 위 까마귀 떼, 마치 진혼곡의 음표처럼 걸려 있습니다.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지만 후기 고전주의 기법을 원칙으로 하는 학교의 교수법이 베레시차긴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오디세우스(율리시즈)가 그의 아내를 치근덕거리는 사람을 쓰러뜨리는 장면이 주제인 그림으로 은메달을 수상했지만 ‘다시는 이런 작품을 그리지 않겠다’고 말하고는 작품을 부셔버리고 맙니다. 상상이나 환상의 세계가 그에게는 맞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스물두 살이 되던 해, 베레시차긴은 파리로 미술 유학을 떠납니다.



찬양하다 They celebrate, 1872, Oil on canvas, 195.5x257cm



많은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가운데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그 결과를 알리는 모양입니다. 결과만 자신에게 유리하게 되었다면 과정은 어떻게 되었든 상관없는 것이 전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고 했겠지요. 혹시 사람들 사이로 우뚝 솟은 장대에 걸린 것이 보이시는지요? 사람의 머리입니다. 적의 머리를 베어 전리품처럼 세워 놓았습니다. 제3자가 보기에는 야만이지만 당사자에게는 통쾌하기 이를 데 없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인간은… 어떤 생물인가요?

파리에 도착한 베레시차긴은 장 제롬에게서 그림을 배웁니다. 그러나 스승인 제롬의 가르침 역시 그가 배우고자 했던 화법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주제를 찾아 캅카스(코카서스)를 여행하면서 그곳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스케치하며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1867년, 스물다섯 나이의 그는 투르키스탄에 있는 러시아 군대에 지원합니다. 그리고 사마르칸트 방어전에서 영웅적인 활동으로 그는 러시아 최고의 훈장을 받게 됩니다. 이때 참전했던 내용을 그림으로 제작합니다.



아그라의 진주 모스크 Pearl Mosque in Agra, 1874~1876



작품의 무대가 궁금해서 찾아보았더니 인도 북부 아그라에 있는 아그라 요새의 진주 모스크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모스크의 강 건너에는 그 유명한 타지마할이 있다고 합니다. 티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아래 흰 대리석이 눈부십니다. 건물의 그림자마저도 푸른색을 담았습니다. 계단 아래에서 건물과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도 그 아름다움에 취한 모습입니다. 문득 그 사람의 몸이 아주 가볍게 떠오를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런 곳에 혼자 있다면 그리고 이렇게 푸른 하늘 밑이라면 몸도 마음도 깃털 같아질 것 같거든요.

전쟁을 묘사한 베레시차긴의 작품은 그에게 상당한 명예와 함께 그의 이름이 러시아 상류 사회에 알려지는 기회를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러시아를 떠날 수밖에 없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쟁의 참상과 러시아 병사들의 비극적인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죠. 그의 몇몇 작품은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2년 간 러시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야만성과 병사들의 죽음, 그리고 모든 전쟁의 파국적인 결과에 대해 그는 깊은 인상을 받았고 철학적인 고민이 그의 작품에 담기기 시작했습니다.



아그라에 있는 타지마할 영묘 Taj Mahal Mausoleum in Agra, 1876



어려서 타지마할이 왕궁인 줄 알았습니다. 커서 무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이 견디기 힘들었던 남자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22년에 걸쳐 이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어찌 보면 무덤을 남긴 것이 아니라 아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남긴 것이죠. 말년에 막내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감옥에 갇혔지만 다행히 그 감옥에서는 타지마할이 보였다고 합니다. 아들에 대한 배신을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처음 전쟁에 참여한 10년 뒤 베레시차긴은 러시아-터키 전쟁에 다시 참여합니다. 전쟁에는 반대했지만 전쟁의 참상은 꼼꼼하게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죠. 전쟁 중 여러 번 부상을 당하면서도 그는 전쟁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차질 없이 해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전쟁의 희생자들이 등장합니다. 전쟁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병사들이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죠.



죄수들의 휴식 장소 A Resting Place of Prisoners, 1878~1879, Oil on canvas



눈보라가 치는 길, 전쟁에서 포로가 된 죄수들이 잠시 가던 길을 멈췄습니다. 가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들판에서 그냥 주저앉아 쉬는 것이 전부입니다. 불어오는 바람은 쌓인 눈을 하늘로 올리고 있습니다.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상황, 모두가 팔에 얼굴을 파묻고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지만 제 눈에는 아무리 봐도 휴식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전쟁에 참여했고 이 지경에 이른 것일까요? 고장이 나서 눈 속에 버려져 있는 바퀴가 마치 역사를 움직이는 바퀴처럼 보입니다. 전쟁은 역사를 주저앉게 하거든요.

러시아-터키 전쟁을 주제로 한 베레시차긴의 작품들에는 무능하고 무모한 러시아 장군들이 묘사되었습니다. 결국 러시아 정부와 갈등이 생겼고 알렉산드르 2세는 그를 가리켜 ‘인간쓰레기가 아니면 미친놈’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다시 러시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에서의 그의 작품 전시회는 성공을 거두었고 군 관련 위정자들은 병사들과 학생들이 그의 작품 전시회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시켰다고 합니다. 전쟁이 있어야 그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시프카 고개의 전쟁터 Battlefield at the Shipka Pass, 1878



자료를 보니 시프카 고개는 불가리아의 발칸 산맥을 넘는 고개로 러시아와 터키 전쟁 당시 격전지였다고 합니다. 전투 중에 죽은 병사들의 모습이 처참합니다. 푸른 색 옷과 밝은 색 옷을 입을 주검들이 하늘을 향해, 더러는 땅을 향해 얼굴을 눈 속에 파묻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환성을 지르고 있지만 눈 쌓인 고개에서 젊은 나이를 마감한 혼들은 아득한 산 너머를 향하고 있겠지요. 혼들이 넘어 는 산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산 전체가 흘러내릴 것 같은 느낌입니다. 안타까움이 극에 달하면 산도 흘러내릴 수 있을까요?

러시아를 떠난 후 베레시차긴은 인도와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여행합니다. 인도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인들에 대한 인도인들의 저항과 건축물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여행을 통해 제작된 신약성경 관련 작품은 그 표현이 가톨릭교회와 문제를 일으켜 결국 빈에서 전시회를 할 때는 광신도들에 의해 작품 두 점이 염산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납니다. 참 대단한 베레시차긴입니다.


망자를 위한 의식 Service for the Dead, 1879



망자를 위해 사제는 향을 피워 흔들었습니다. 군인이 되기 전에 각자의 삶이 있었겠지만 세상을 떠나는 순간은 모두 군인이었습니다. 편안한 어딘 가에 앉아서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이 사람들을 전장으로 몰아낸 그 사람들은 이 광경을, 이 느낌을 알 수 있을까요? 하늘은 온통 회색입니다.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내리는 빛은 망자들이 하늘로 오르는 길처럼 보입니다. 전쟁은 인간의 본능일까요? 정말 그렇다면 신께 요청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본능은 필요 없으니까 거두어 달라고 말입니다.

1890년이 넘어서야 베레시차긴은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모스크바에 정착한 그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제작하는데 여전히 냉정한 사실주의 기법이 사용되었지만 초기에 비해 훨씬 낭만적이고 애국심이 담긴 작품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길은 화가가 아니라 군인의 모습이었습니다. 러일 전쟁 중 그는 러시아 기함 페테르 파블로브스키 호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이 쏜 어뢰에 의해 이 배와 함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예순둘의 나이였습니다. 전쟁을 증오했지만 두 번이나 전쟁에 참여했고 그리고 전투함과 생을 마감한 그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그의 몸속에는 화가의 피가 더 강했을까요? 아니면 군인? 오직 그만이 알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