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를 위한 미술사』

2019. 1. 9. 20:33미술/미술 이야기 (책)





깜짝 놀래키는, 아주 아주 훌륭하게 잘 쓴 책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본 중에 최고의「美術史」책입니다.

─  베껴쓰지 않고, 버벅거림 없이, 핵심 요약을 잘했습니다.

     알고 쓰는 사람과 모르고 쓰는 사람의 차이라고나 할까?

강추! 강추!

─ 이런 내공으로 어째, 책을 한 권만 썼을까???





혼자를 위한 미술사 2018. 6. 1



저자 정흥섭은 아주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낭시 국립예술학교와 스위스 제네바 고등예술학교에서 순수예술을 전공했다. 다수의 기획 전시와 국제비엔날레에 참여한 바 있으며 현재 다양한 문화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이자 문화기획자이다. 아트디렉터로서 비둘기 암살단(복합문화공간), 똑바로 걷는 게(복합창작공간) 등을 기획 운영했다. 지금은 <공간디자인 사각사각>의 대표이자 목수로 일하고 있으며 근현대미술 관련해 대학 및 일반 강연을 하고 있다. 프랑스 예술가 쥘리앵 프레비외의 『입사거부서』를 번역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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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되고자 했던 예술가들의 몸부림은 하나의 흐름으로 근현대미술의 역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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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반쪽의 답 찾기


밀레, 마네 등 우리는 교과서를 통해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만나왔다. 교과서에서는 그들의 작품을 평화로운 농촌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목가적 회화, 빛의 연금술사들에 의해 재발견된 일상의 아름다움이라고 평하며, 주로 시각적 소재나 표현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해석이 그저 반쪽짜리 답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현재 한국의 교육은 갑오개혁 때부터 영미식으로 시작해 일제강점기, 미군정 시대를 거쳐 완성해왔고 미술 역시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배워온 예술 작품이 실제로 존재했던 유럽 사회에서는 이를 다르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직접 살고 작업해왔던 프랑스에서 밀레의 '만종'은 전원 풍경의 넉넉함이 아니라 배고픔과 질병에 허덕이다 자식을 땅에 묻은 농부 부부의 이야기이다. 인상파 화가로 잘 알려진 모네는 ‘빛의 연금술사’라는 수식어 대신 눈에 비친 주관적 세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선구자적 현대인이라 불린다. 그러니 만약 예술 작품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폭이 작품의 외형적 특성에만 머무르게 될 경우, 작품의 반쪽만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혼자를 위한 미술사』는 교과서에서 언급한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서 우리가 찾아야 하는 나머지 반쪽의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반쪽 이야기, 나머지 반쪽의 답, 그곳에는 예술가들의 지극히 사적인 ‘혼자’만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열쇠


오늘날 현대미술은 복잡하고 난해하다는 누명을 여전히 벗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미술은 그저 돌연변이인 걸까? 여기 『혼자를 위한 미술사』에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열쇠가 있다. 이 책의 저자이자 현재도 활동 중에 있는 예술가 정흥섭이 프랑스에서 직접 공부하며 발견해낸 미술사에서 근현대미술의 가치와 방향성이 현재 현대미술이 지향하는 점을 또렷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현대미술의 가치, 그 원류를 찾아 18세기 사실주의 미술의 시대로 거슬러간다. 그리고 예술가의 아주 사적인 방(작가주의)부터 눈(망막주의), 몸(감각주의), 머리(인지주의), 심장(표현주의), 감성(추상주의)과 무의식(초현실주의)까지 점점 더 인간의 내면을 향하는 미술의 방향성을 핵심적으로 짚어냈다. 이를 따라 근현대미술의 방향성을 좇다보면 비로소 현재의 미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게 된다. 약 150년 전부터 예술가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현대 예술가 역시 여전히 ‘개인의 존재’ 가치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근현대미술의 핵심과 역사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살면서 만날 많은 예술 작품에서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저자의 말



1장. 우리의 미술 교과서

 
오르세 미술관 /

한국의 미술 교과서 /

영국식 근대화 vs 유럽식 근대화 /

유럽의 근대미술 /

반쪽짜리 답안지



2장. 근대미술의 터, 파리

 
낭만주의, 계몽에서 낭만으로: 장 발장과 자베르 /

신고전주의와 계몽주의, 그리고 낭만주의 /

낭만주의 영웅 /

낭만주의의 두 얼굴 /
사실주의, 이상에서 현실로 :젖가슴과 생식기 /

사실주의와 사회주의 / 수평적 세계관
작가주의, 땅 위에서 예술가의 방 안으로 :
개별 지성과 작가주의 /

마네의 올랭피아 /

나는 고발한다! /

사실주의와 작가주의 /

파리 살롱전과 낙선전 /

인상주의의 기원 /

예술가의 방



3장. 파리의 지역 예술, 몽마르트르의 3색 깃발

 
인상파의 망막주의, 예술가의 방 안에서 예술가의 눈으로: 객관에서 주관으로 /

망막주의


야수파의 감각주의, 예술가의 눈에서 예술가의 몸으로: 진실의 얼굴 /

촉각, 또 하나의 주관 /

에로틱한 예술


입체파의 인지주의, 예술가의 몸에서 예술가의 머리로: 폴 세잔이라는 이름의 예술 /

생각 속의 사과 /

콜라주 /

몽마르트르의 새 주인



4장. 유럽 지역으로의 확산


표현주의, 예술가의 심장으로: 밀레와 고흐 /

독일 표현주의의 심장, 콜비츠 /

북유럽 표현주의의 심장, 뭉크


추상주의, 예술가의 감성으로: 사라진 피사체 / 안으로 안으로 /

뜨거운 추상? 차가운 추상? /

한 그루의 나무, 몬드리안 /

감성 세계의 언어, 칸딘스키


초현실주의, 예술가의 무의식으로: 비논리의 논리, 마그리트 /

무의식의 대지, 달리 /

초월적 세계의 예술, 샤갈
다다이즘, 주체적 인간의 완성: 우연의 법칙, 한스 아르프 /

기성품과 예술 작품, 마르셀 뒤샹



5장. 영미권 세계로의 확산


미국 사실주의: 부유하는 현실, 에드워드 호퍼 /

뉴욕, 이민자, 예술가


추상표현주의: 마르쿠스 로스코비츠 /

멜팅 팟, 마크 로스코 /

시그램 빌딩 vs 로스코 채플


팝아트: 팝POP / 다다와 팝의 실천가, 앤디 워홀



6장. 포스트모더니즘


1960~197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잃어버린 세대 /

광장 위에 솟은 엄지손가락 /

히스테리 /

철근, 콘크리트, 그리고 미술


1980~1990 년대의 포스트 모더니즘: 베이비부머 세대 /

 미디어 산업 /

기성품 카메라



7장. 21세기의 포스트모더니티

 
차용 기술의 진화: 외연적 확장 /

부디 저를 채용하지 말아주십시오 /

지구-달-지구 /

비판적 차용 기술의 진화


자기 희화: 병맛 /

누군가의 자동차, 아흐멧 외위트 /

8848-1.86, 쉬전 /
이쑤시개가 된 조조의 화살: 다원주의의 딜레마 .../

메시지 중첩 /

구전 예술 작품 /

콜럼버스의 달걀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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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중에서)

이제 예술가들은 '누가 봐도 아름다운 것들'을 묘사하는 것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다. '美術이란 아름다움을 사고하는 기술'이 된 것이다. 아름다움을 사고한다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과정이다. 現代美術이 쉽게 공감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 바탕이 되는 개인의 경험은 서로 같을 수 없고, 서로 알려고 하지 않는 한 알 수가 없다. 現代美術은 한 사람 한 사람, 혼자가 된 개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現代美術은 곧 개별적 자아이 만들어내는 무한한 '혼자의 宇宙'이다.

그렇다면 現代美術은 언제부터 개인에게 집중하게 되었는가? 예술가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혼자가 되었는가? 그 答을 찾기 위해 미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탐구하고 정리한 결과물이『혼자를 위한 미술사』이다.




2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들의 소재는 대자연과 풍경이다. 인상주의 작품들을 보면 수려한 유럽 도시의 모습과 천혜의 자연환경, 목가적인 전원 풍경을 예찬하는 듯하다. 오르세 미술관이 일본 한국을 비롯한 동양권의 사람들에게 서구문명을 전파하는 일등 전령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들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예술가들도 21세기의 제3세계 사람들에게 유럽이 가진 천혜의 자연환경과 근대 유럽 도시의 아름다운 모습을 전하고자 작품을 남겼을까? 그 후손들도 마찬가지 이유로 작품을 보존해온 것일까?


대한민국의 미술교과서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걸까? 1894년 갑오개혁을 전후로 최초의 근대식 교육개혁이 英美 선교단체와의 긴밀한 공조 속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후 35년 간을 압제한 일본제국의 근대화 개혁모델은 영국이었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에 도입된 의무교육 교과과정 역시 美軍政時代에 만들어졌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사회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近代美術史를 화려하게 수놓는 동안 英美사회는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만일 우리의 미술 교과서가 영미식 교육제도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유럽대륙을 중신으로 성장한 근대 미술사조들을 심도 있게 이해하는데 상당한 제약이 될 수도 있다.


영국의 근대화는 봉건세력과 신흥 부르주아, 그리고 시민계급 사이의 타협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적 민주개혁, 즉 행정적 개혁으로 이루어졌다.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하는 상업주의적 개혁을 유지한 것이 영국과 미국의 근대화 특성이다. 반면에 유럽 대륙이 프랑스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필두로 100년 가까운 동안 시민계급과 봉건계급 간에 치열한 정치적 투쟁기를 겪는다. 즉 프랑스는 영국의 행정개혁과 달리, 시민혁명을 기반으로 모든 종류의 진보적 가치와 도전적인 실험정신을 동반한 정치개혁을 이룩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파리는 비판적 사회의식과 반성적 지성을 기반으로 하는 모든 미술사조의 발원지였다.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던 진보적 예술가들은 파리로 모여들면서 프랑스 파리는 근대미술의 성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진보적 사고와 사상를 포용하는 말 그대로의 新藝術이 시작되었다.


<만종>을 통해 밀레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전원의 목가적 풍경예찬이 아니라 배고픔과 질병에 허덕임이었다. 무분별한 도시개발과 산업화의 그늘이었던 것이다. 인상파 화가 모네는 빛의 연금술사라는 수식어와는 달리, 그들은 근대 이념 사화의 전체주의적 가치관에 맞서 각자의 눈에 비친 주관적 세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개인의 중요성을 설파한 선구자적 현대인이었다.




3


낭만주의



19세기 初 신고전주의와 계몽주의 그리고 낭만주의가 삼파전을 벌이며 격돌하고 있던 유럽. 1)향락적인 귀족문화를 비판하며 상류층으로부터의 개혁을 부르짖던 신고전주의, 2)사회 지식층이 주도했던 중간계급으로부터의 민중개혁운동인 계몽주의, 3)더 낮은 시민게급과 최하층민(레미제라블)으로부터의 개혁의 가능성을 부르짖던 낭만주의가 뒤엉켜 있었다. 위고의 小說『레미제라블』은 이러한 19세기 유럽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계급의식도, 지적 능력도 아닌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주어져 있는 양심과 연민, 그리고 사랑과 박애, 이러한 내면적 가치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자유와 평등과 박애라는 이름의 프랑스 三色旗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의 경직된 어깨 위에 돋아나기 시작한 날개라고 할 수 있다. '民衆'이라는 이름의 보편적 인간을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으로 날아오르게 할 원동력이 되었다.


(※ 낭만주의, 선동과 독선, 독재의 딜레마)





4


 



 





 


 이처럼 사실주의는 근대사회의 수직적인 가치관들을 수평적인 가치관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미술사조이다.






5


사실주의- 작가주의


낭만주의가 계몽주의에 대한 반동이었다면 사실주의는 낭만주의에 대한 반동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주의가 계몽주의로의 회귀는 아니다. 계몽주의가 추구했던 것이 보편적이며 과학적 객관적 이성이었던 반면에 사실주의가 지향한 바는 개인이 가지는 주관적 이성에 가까웠다. 현실세계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지성으로 서 말이다.


사실주의와 작가주의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에 익숙해 있던 근대시민사화에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보여주고자 시도된 최초의 현대적 미술사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무명의 예술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는 예술가로서의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는 일이었다. 그 차별성과 특수성만이 미래 시민사회의 발걸음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PM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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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막주의


"모네는 가슴도 없고 머리도 없고 눈만 있는 작가다. 하지만 이 얼마나 대단한 눈인가!" - 폴 세잔


모네는 대중과 더 직관적이고 쉬운 소통의 방식을 원하고 있었다. 그의 예술세계는 개체성과 주관적 관점의 중요성을 설파하고자 하는 사실주의 기반의 예술적 흐름을 위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생각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적극적인 시도다. 이로써 모네는 근대미술사 안에서의 중요 변곡점들 중 하나가 되었다.

인상파 = 망막주의는 近代美術史의 중대한 변화를 증언하는 역사적 증표이자 개인 한 명 한 명의 존재 중요성을 설파하는 모든 현대적 사상의 등장을 알린다. 이렇게 혼자의 주관은 전체의 객관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에프트 강의 굽은 길(Bend in the River Ep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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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주의



'눈에 보이면 만지고 싶다' , 피사체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간 야수파(감각주의) 예술가들은 피사체를 자신의 감각기관과 연결시키고자 노력했다. 야수파의 미술은 일반적으로 원시적인 형태, 강렬한 색, 거친 붓터치, 감각적인 표현 등으로 이해된다. 모두 표현 기술에 대한 담론 일색이다. 물론 예술에서 아름다움을 기술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 아름다움을 기술하는 방식 이전에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더 근원적인 질문이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언제나 이 두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각자가 내린 답이 바로 그들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그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답한 예술가들의 생각을 그들의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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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주의


몽마르트라는 연못 위에 寫實主義라는 이름의 돌멩이가 떨어졌다. 그 돌멩이가 남긴 파장은 꽤나 묵직했다. 인상파(망막파), 야수파(감각주의), 입체파(인지주의) 순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프랑스 근대미술의 물결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어 점차 유럽의 예술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바로 '표현주의'이다. 표현주의는 프랑스의 사실주의가 독일과 북유럽으로 확산하면서 나타난 최초의 미술사조라 할 수 있다.


표현주의는 근대미술사에서 사회적 소외층에 대한 관심이 적극적인 예술적 소통의 의지로 결실을 맺은 美術史潮라는 의미도 갖는다. 물론 그와 같은 관심은 이상주의자들의 공허한 이년논쟁과 전체주의적 발상에 일침을 가했던 현실론자들의 사실주의에서 시작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절규> 캔버스 유화 91 x 73.5 cm 오슬로 국립 미술관

 


"어느 해 질 녘에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한쪽으로는 시가지가 펼쳐져 있고 밑으로는 강줄기가 돌아나가고 있었다. 마침 해가 떨어질 때여서 구름이 핏빛처럼 새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그때 나는 하나의 절규가 대자연을 꿰뚫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절규하는 소리를 분명하게 들었다."


고흐와 콜비츠, 서유럽의 표현주의가 산업화, 게급간의 갈등, 부의 불평등 등의 문제로 희생당한 집단의 절규를 표현했다면, 북유럽에서 시작한 뭉크의 표현주의는 사회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가 혼자 견뎌내는 불안함과 본능적인 절규를 등장시킨 것이다.


북유럽의 표현주의는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近代美術史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줘야 할 주제이다. 당시 유럽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이념주의와 같은 전체주의적 사상이 들끓었고, 산업화와 도시와의 열기 속에 모든 풍경이 획일화되어가고 있었다. 계급투쟁과 진영의 논리에 갇혀 자칫 선동예술로 변질될 수도 있었던 표현주의의 위기에서 이를 구하고 그 방향성을 유지할 수 있는 사상적 기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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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주의


피사체의 형상을 완벽하게 배제한 상태에서 무언가를 표현하겠다고 하는 이 놀라운 발상이 '추상주의'의 시작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연한 일도 급작스러운 변화도 아니다. 입체파의 인지주의와 표현주의를 거쳐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인지주의 예술가들의 머리와 표현주의 예술가들의 심장에 이어 추상주의가 찾아간 곳은 바로 인간의 심연의 바다인 감성의 세계였다. 추상주의 예술의 세계에는 바다를 닮은 감성세계의 언어만이 존재한다.


과학분야 특히 화학이라는 연구분과를 좋아했던 예술가, 그리고 과학적 사고 속에 깃든 예술적 감흥과 감화능력, 이 두 개가 바로 몬드리안의 예술세계이자 추상주의 회화를 이해하는 열쇠다. / 칸딘스키의 작품에는 인간 혼자만의 내면세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심연의 바다가 있다. 그 속에 몸을 담그고 유유자적하는 탈이념적인 모습, 이념의 장으로 전락해버린 사화에서 두 눈을 감고 감성의 바다에 뛰어든 한 사회구성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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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


비논리적이며 비이성적인 이야기, 이것이 바로 초현실주의 미술의 시작이다. 초현식주의 작품은 거울 속에 비친 세계와 같다. 내가 오른팔을 올리면 거울 속의 나는 왼팔을 든다. 이상하고 어색하지만 거울 속의 나와 익숙해지면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익숙해지면 유용하다는 점에서 예술도 마찬가지다.


샤갈의 작품 전반을 이끌고 있는 것은 분명 그의 동화적 상상력이지만, 그 속에는 그가 겪었던 잔혹한 현실세계의 어둠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샤갈의 상상력은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귀도의 상상력과 닮았다.


달리, <기억의 영속성> : 이념 사회의 광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적 사고 능력은 물론 감성 세계의 순수성마져 의심받기 시작함으로써 예술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을 맞이했다. 입체주의가 이야기했던 직육면체의 땅도, 추산주의가 심은 한 그루의 나무도, 커다란 눈을 가진 예술가의 얼굴도, 모두 창백한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다. 더 이상 갈 곳도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던 예술이 초현실주의로 다시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들의 영양분을 머금은 무의식의 대지 위에서 화려한 반전의 드라마가 다시 시작돴다.

 



푸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1. 소감

 

이 책은 적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꽤 난해하다. 단순한 예술론이 아니라 언어 문제와 결합된 예술론이라 더욱 그렇다. 언어는 일상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철학의 영역으로 넘어올 때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된다. 그만큼 근원적 구조를 밝히는 사유는 쉽지 않은 것이다. 푸코가 이 책에서 주목한 것은 언어의 지시적 측면이다. 텍스트는 우리에게 대상을 지시해준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도 텍스트는 여전히 지시의 의무를 행하지만, 그 지시는 관습적 용태에서 벗어나있다. 멀쩡하게 그려져 있는 파이프를 두고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니? 평범한 회화에 써진 단 한 줄의 텍스트가 모든 것을 혼돈에 빠뜨린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해를 못할 텍스트도 아니다. 푸코가 책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려진 파이프가 실제의 부피를 가진 파이프는 아니니까 말이다.

 

이런 탈관습적인 텍스트와 이미지의 배치가 발생시키는 예술적 효과에 대해 푸코는 말하고 싶어한듯하다. 그는 클레와 칸딘스키의 예술적 업적, 곧 재현으로서의 서양 회화 전통을 분쇄시킨 것을 마그리트가 더욱 급진적으로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탈근대 철학의 범주에 속하는 철학자인만큼, 푸코의 예술적 관심 또한 기존 예술에의 전복과 관련이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푸코가 재현으로서의 회화 전통을 마그리트의 그림을 토대로 전복시키는 미학적 작업은 예술의 영역에 만족하지 않고 곧 그의 권력 비판이라는 철학적 작업과도 관련을 맺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2. 의문사항

 

1)푸코는 재현에 관한 두 가지 예술원칙이 15c에서 20c까지의 서양 회화를 지배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푸코가 말하는 재현이란 것은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물질적 대상에 대한 모방만을 뜻하는가, 아니면 예술작품 외부에 실재한다고 여겨지는 도덕 원칙 등과 같은 추상적 원리를 재현하는 것도 포괄하는 개념인가? 만약 전자의 범위에만 한정된 재현이라면 피라네시의 <장식문자>와 같은 이념적 그림은 재현의 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되지 않나?

 

2)푸코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흐트러진 칼리그람으로 보았다. 즉 일단 칼리그람의 속성을 기본적으로 공유하되, 전통적 도식을 비튼 형태의 칼리그람이란 것이다. 그 근거로서 일단 회화에 써있는 글자는 실상 그려진 글자이며, 파이프 데생은 써진 데생이요 글자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상당히 비약적인 주장이지 않을까? 텍스트는 그려지는데, 같은 종이에 있는 이미지는 써진 것이라니, 한 평면 위에 묘사된 텍스트와 데생을 굳이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일관성이 떨어지는 설명방식이 아닌가? 텍스트가 그려진 것이라면 데생도 그려진 것이어야하고, 데생이 써진 것이라면 텍스트도 써진 것이라고 보는 게 더 마그리트의 그림의 내적 논리에 부합하는 해석은 아닐까?

 

3)“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언명이 데생으로서의 파이프와 현실세계의 파이프를 완전히 단절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가? 그 한 줄의 텍스트가 발생시키는 부정의 효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그림을 볼 때면 어쩔 수 없이 일상에서 경험해 온 목재 파이프가 떠오른다. 이것을 부인하는 예술론은 어딘가 부자연스럽지 아니한가? 마그리트의 그림은 현실의 재현을 거부한 그림일지라도, 감상자는 여전히 뇌 속에서 호출하는 파이프의 기억으로 인해 결코 재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닐까? 

 

3.<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 드러난 푸코의 예술론           

 

푸코는 마그리트의 그림으로부터 자신의 미학을 호출한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칼리그람을 비튼 형식을 취하고 있다. 칼리그람은 대상을 표현하기 위해 텍스트와 이미지를 중복적으로 사용한다. 사물을 “이중적 서기라는 기법으로 사로잡”는 것인데, 텍스트 자체가 형상을 담지하는 표의문자와 비슷한 개념이다. 이는 말이나 그림만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사물 자체에의 접근을 위한, 다시말해 물자체에의 접속을 위한 강렬한 인식론적 욕망의 투영이라고 할 수 있다. 텍스트와 이미지, 말과 그림의 겹겹 그물 안에서 주체의 인식 대상인 객체의 모습은 온전히 포획되는 듯하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표면적으로는 칼리그람과 무관해보인다. 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면, 텍스트는 이미지로 된 텍스트로서 그려진 언표이며, 데생은 쓰여진 이미지로서 글씨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렇듯 즉각적으로 인식되지는 않는 “칼리그람적 조작이 글씨와 데생을 교차”시켜 놓았다. 그리고는 평화롭게 칼리그람의 기능을 수행하려던 찰나, 어떤 강렬한 부정과 부인에 의해 칼리그람은 흐트러진다. 응당 데생을 지시하는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텍스트가 데생과의 연관성을 부정한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로써 텍스트와 형상의 이중적 사슬로 사물 자체를 단단히 가둬놓으려던 칼리그람 본연의 기획은 좌절된다.

 

이와 함께 흐트러진 칼리그람에서는 데생과 텍스트 사이의 상호 배제를 통해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공통된 공간이 없어졌다. 형상의 위치와 텍스트의 위치가 엄격히 떨어져 있으면서 각자의 왕국을 자율적으로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형상과 텍스트 사이에“이것은”으로 표시되는 불확실하고 미묘한 연결선이 그어져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연결선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술어와 잇닿아 있다는 측면에서, 데생과 텍스트 간의 ‘긍정적’ 연결이 아닌 ‘부정적’ 연결일 뿐이다.      

 

이러한 마그리트의 비틀어진 칼리그람으로부터 서양회화를 지배해왔던 전통적인 두 가지의 예술 규칙과 그것들이 최종적으로 복무하는 상위의 예술 원칙이 붕괴된다. 그 두 가지 규칙은 첫째, 조형적 재현과 언어적 지시 사이의 분리와, 둘째, ‘유사하다는 사실’과‘재현적 관계가 있다는 확언’ 사이의 등가성이다. 전자는 가시적 공간의 재현을 위해 이미지 외의 텍스트가 회화에서 배제되어야 함을 뜻한다. 후자는 회화 형상은 그 형상이 닮으려하는 현실세계의 원본에 대한 모방물이라는 생각을 구현한다. 그러므로 위의 두 규칙은 예술이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어야 한다는 전통적 예술 원칙을 떠받드는 아틀라스의 두 팔이 된다.

 

그렇다면 결국 마그리트에게서 미학원칙을 도출하는 푸코의 예술론은 원본과 모방물 간의 위계질서를 깨뜨리는 전복적인 그것이다. “이것은” 원본으로서의 “파이프가 아니”기에, 우리는 데생으로서의 파이프를 또 하나의 독립적 실체로 대우하는 게 가능해진다. 현실이 현실로서의 진리를 드러낸다면, 현실의 단순한 재현이 아닌 예술은 예술 자체로서의 진리를 묘출(描出)한다. 예술 외부의 현실과 이데아를 2차적, 3차적으로 구현할 때 주어지던 종속적 지위로부터 해방된 예술이기에 한층 자유로운 직관과 이념을 구가할 수 있다. 데생과 텍스트 사이의 여백은 전통의 칼리그람으로 표상됐던 사물 본체에의 추구를 내려놓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 내려놓음은 재현에 대한 철학적 강박을 해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예술은 훨씬 가벼운 몸짓으로 재현으로서의 2차적 사물이 아닌, 오리지널의 1차적 사물을 생산하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창조 행위가 되었다. 이것이 푸코가 원본과 모방물 사이의 위계를 파괴함으로써 성취하려 했던 예술의 진보이리라.

 
출처: http://bringeld.tistory.com/355 [겔트의 사회문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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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이즘


초현실주의자들의 무의식의 세계로부터 시작된 반이성 반과학 반전체주의적 반란 등 개체주의 진영의 저항은 '다다'의 언어로 완성된다. 다다dada는 프랑스어로 '장난감 목마' 또는 '의미 없는 어린아이의 옹알이'를 뜻한다.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도 동시에 무엇이든 의미할 수 있는 기호언어 이전의 언어라 할 수 있다. 어린아이의 옹알이는 해석보다도 이해와 공감이 필요한 언어이다.

다다이즘은 근대사회의 모든 이념적 가치와 전통을 부정하는 유아기적 언어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과학, 정치, 사회, 문화, 예술에 이르기까지 다다이즘은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종류의 이성 언어를 부정한다. 다다의 언어는 치밀하게 기획된 부정의 언어이자 심지어 자기 부정의 언어이기도 하다. 예술이 예술을 부정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된 것이다.

뒤샹의 <모나리자> 작품이 부정하는 것은 예술작품으로서의 모나리자가 아니다. 그가 부정하는 모나리자는 새로운 예술적 도전들을 가로막는 전통적 미의 기준으로서의 모나리자, 모나리자 그 자체를 보지 못하고 권위에 복종하는 감상자들의 태도였다. 다다의 언어는 예술을 부정하는 언어이지만 동시에 예술의 본질을 주목하게 만드는 언어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다시 그것을 긍정하는 아이러니의 언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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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실주의


미국의 미술 근대화는 유럽 미술이 대거 유입되어 들어기 시작한 20세기에 크게 세 단계, 1920~1930년대, 1940~1950년대, 1960~1970년대로 구분되는 각가의 시대는 미국 사실주의, 추상표현주의, 팝아트의 시대로 대별된다.


에드워드 호펴(1882-1967)는 파리로 미술유학을 떠난 1세대 미국작가이다. 1906년부터 1910년까지 그가 체류했던 파리에는 감각주의(야수파)와 인지주의(입체파)가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퍼가 선택한 것은 1850년대 유럽의 쿠르베와 밀레의 미술이었다.

1910년 유학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호퍼는 산업화의 명분 속에서 무분별하게 팽창하고 있는 도시사회의 허구적인 모습에 주목하여 이를 통해서 20세기 미국의 독특한 사회현실을 고발한다. 그가 묘사하는 단단한 도시의 풍경 속에는 언제나 내적 결핍상태에 놓인 도시인들이 있다.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것이 바로 그 독특한 관찰자 視點이다. 이를 통해 호퍼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보여주는 도시 풍경은 언제나 낯설고 공허하다. 20세기 미국 사회의 현실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마크 로스코(1903-1970)가 갈망하는 예술은 구시대의 전통과 낡은 사회적 통념들을 녹여버릴만한 강력한 그 무엇이었다. 역사, 사회, 문화, 종교, 신화 등 인간의 고민과 갈등을 투영하는 방대한 양의 드라마를 자신의 작품 세계 안으로 끌어들여온 것도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녹여내기 위한 과정의 일환이었다. 그는 이 모든 종류의 인간 드라마가 하나로 녹아드는 과정 속에서 숭고함이 경험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심연 세계에서 시작되는 궁극적인 울림으로서의 미적 숭고함, 이것이 바로 로스코가 추구하는 예술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그의 예술은 일종의 체험과도 유사하다.

대자연의 거대함 앞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경이로움, 두려움, 설렘, 불안감, 슬픔, 기쁨, ...  이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오는 순간. 그렇게 먹먹해버린 감정상태를 '숭고'라 한다. 로스코의 생면추상이 전달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종류의 먹먹함이다.

로스코의 작품 속에는 뚜렷한 사회적 메시지, 즉 사회적 역할론을 강조하는 표현주의적 특성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특히 커다랗고 모호한 색면과 불분명한 경계선으로 이루어진 그의 색면추상은 미국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지향하는 모습이자 메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로스코은  작품은 추상주의임과 동시에 표현주의 미술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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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트


'예술이란 예술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며 모든 주체에게 이미 주어져 있으며 각자의 예술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 주장했던 다다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그들은 뒤상의 소변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의 '레디메이드'가 무엇을 뜻하는 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예술작품은 그저 담론을 이끌어내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개별적 주체들이 각자의 예술 의지를 가지고 바라보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팝아티스트들이 생각하는 예술의 본질이었다. 워홀은 이렇게 말했다 "나를 알고 싶다면 작품의 표면만 봐주세요.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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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은 팝아트 이후, 1960-1970년대와 1980-1990년대에 등장한 反전체주의 성향의 예술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이름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은 다시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전후세대인 '잃어버린 세대(1960-1970년대)'와 '베이비부머 세대(1980-1990년대)'의 예술로 구분된다.


잃어버린 세대의 저항이 산업화와 초기자본주의사회의 열악한 노동현실과 전후 복구 사회의 암담한 현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베이비부머 세대의 저항은 좀더 매끄러운 방식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반발이자 사회적 풍요로움 속에 감추어진 권위주의적 가치관에 관한 도전이다. 反戰, 성해방, 환경 등 각종 사회운동을 주도하며 그들만의 사회적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베이비부머 세대는 특히 문화적인 영역에서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인다.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은 일률적으로 공산품과 같은 전체주의를 상징하는 것들이 작품 소재로 쓰였지만, 21세기 포스트모더니티 예술은 모든 영역의 물건과 개념을 작품 소재로 하고, 그들의 행위 자체, 즉 퍼포먼스가 작품이 되는 것이다.  퍼포먼스와 협업을 중심으로 외연적 확장을 거듭하는 21세기의 포스트모더니티. 21세기 탈근대화 미술은 스스로를 제외한 모든 것을 비판함으로써 한 개인을 부각시켜가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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