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22. 21:17ㆍ미술/미술 이야기 (책)
2018. 2. 10
우아한 예술과 미식의 나라, 넘치는 문화 자부심을 가진 나라, 프랑스이다. 프랑스는 또한 ‘뮈제’(박물관)의 천국이기도 하다. 프랑스 전체에 총 1,218개의 뮈제가 있으며 역사, 예술, 문화, 심지어 위조품까지 각 뮈제에서 다루는 주제도 광활하기 이를 데 없다. 그중 이 책에서 다룰 뮈제는 뮈제의 왕 루브르, 프랑스 영광의 상징 베르사유, 현대예술의 아성 퐁피두, 오르세를 비롯해 군사박물관 앵발리드, 뮈제 로댕, 마르세유의 보석 뮤셈 등 일곱 곳이다. 화려한 도시 파리에서 프랑스 최대 항구도시인 마르세유까지, 낭만적인 뮈제 산책을 흠뻑 즐겨보자.
저자 김복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1대와 4대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립안동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유럽 문화와 경제를 연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프랑스가 들려주는 이야기』, 『서양 생활 문화사』, 『프랑스 문화예술, 악의 꽃에서 샤넬 no.5까지』, 『재미있는 파리역사산책』, 『프랑스사』, 『프랑스 왕과 왕비』, 『속속들이 이해하는 서양 생활사』, 『권력과 철학을 뒤흔든 매춘부 헤타이라 』, 『명화들이 말해주는 그림 속 서양 생활사』, 『명화들이 말해주는 그림 속 여성 이야기』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조각난 역사』가 있다.
프롤로그
루브르
루브르는 선사시대부터 19세기까지 35만 점이 넘는 예술품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해마다 8백만 명 이상의 관객이 다녀간다.
루브르 앞 카페 마를리에서 /
루브르에서 줄서기 /
가장 오래된 쉴리 관 /
리슐리외 관: 상상력의 공간 /
드농 관 /
*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
* 베로네세의 <가나의 결혼잔치>
* 들라크루아의 <자유의 여신>
* 안토니오 카노바, <큐피드의 키스로 환생한 프시케>
* 미켈란젤로, <죽어가는 노예><반항하는 노예>
루브르 역사 산책 /
근대적 개념의 전시 공간인 뮈제의 탄생 /
나폴레옹과 뮈제 /
권력의 소재지인 궁에서 뮈제로 /
20세기 루브르: 라 카즈 컬렉션 /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
현대 루브르의 상징: 페이의 유리 피라미드 /
루브르의 3대 걸작 /
루브르를 나가며
앵발리드 말메종
앵발리드 군사박물관 /
루이 14세 건축을 명하다 /
나폴레옹의 웅장한 석관묘 앞에서 /
앵발리드 군사박물관: 중세의 전장으로 /
그림처럼 예쁜 집 말메종: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보금자리 /
매력과 평화의 오아시스 /
말메종을 구입한 나폴레옹 부부 /
말메종의 로즈가든
오르세 미술관: 기차역에서 뮈제로 재탄생하다
인상주의의 파라다이스
베르사유 궁
베르사유 궁 안의 첫 번째 레스토랑 오르 /
루이 13세와 베르사유: 최초의 시작은 작은 사냥 오두막으로부터 /
루이 14세와 베르사유: 짐이 곧 국가다 /
루이 15세의 치세기 / 루이16세와 프랑스 혁명 /
궁에서 뮈제로 변신하다 /
베르사유를 나가며
퐁피두 문화센터
이제 내 나이 마흔 /
퐁피두의 시작 / 퐁피두에서 반드시 보아야 할 10대 작품선 /
퐁피두를 나가며
뮈제 로댕: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생각나는 영화 두 편 /
조각이 있는 낭만적인 정원 /
정원을 나가면서
마르세유의 보석: 뮤셈
오래된 항구도시 마르세유 /
뮈제의 탄생: 문화를 매개로 한 도시 재생 이벤트 /
뮤셈을 나가며: 문화의 다양성
에필로그
루브르의 top10 유물, <함무라비 석상> 2.25m - 루브르 박물관 리슐리외 관 1층
펌))
* 바빌로니아 제1왕조의 제6대 왕
― 1902년프랑스의 드 모르강이 이끄는 페르시아 유적 발굴단은 이란 발굴단과 공동으로 이란 소사 지방(바그다드 남쪽 90㎞지점)에서 석비 조각 3개를 연이어 발견한다. 조각 세 개를 나란히 놓으니 완벽한 타원형의 비석형태를 갖추었는데 비의 높이는 2.25m, 상부 둘레가 1.65m, 하부 둘레는 1.9m였다.
― 비석은 양각(陽刻)으로 정밀한 조각과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중 보좌(寶座)에 단정히 앉은 형태의 조각은 바빌론 사람들이 숭배하던 태양신 샤마쉬였고, 신 앞에 정중한 자세로 서 있는 사람은 바빌론의 왕 함무라비(BC 1792~1750년간 재위)로 밝혀졌다.
― 태양신이 권력의 상징인 지팡이를 함무라비 왕에게 건네주는 상황을 표현한 이 장면은 비석 위쪽에 있었고, 아래쪽에는 함무라비가 제정해 시행하던 법전이 설형문자(楔形文字-오리엔탈 문자, 점토 위에 금속 또는 갈대로 쓴 글자-쐐기문자)로 새겨져 있었다.
― 법전은 서문, 본문, 결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문은 함무라비가 신에게 권력을 부여받았음을 널리 선포한다는 내용과 함무라비의 공적을 치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결문은 함무라비가 신의 뜻을 따라 법전을 제정했고 후세에 법전을 따르지 않는 자는 신이 벌을 내릴 것임을 선언한다는 내용이다.
― 또 본문은 모두 282조로 되어 있는데 소송절차, 절도, 소작, 고용, 혼인, 채무, 상해, 고리대, 노예제도 등 여러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법전은 주 계급(귀족)의 이익을 보호하면서 노예와 시민의 반항에 대해 엄격하게 다스리고 있다. 노예가 주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두 귀를 잘랐고, 노예의 도피를 돕거나 숨겨준 자는 사형에 처했다. 또 이발사가 노예주인의 허락 없이 노예의 머리칼을 잘라주면 도끼로 이발사의 손을 잘랐으며, 일반시민이 귀족의 뺨을 때리면 여러 사람이 모인 회의장에서 가죽 채찍으로 60대의 매를 때린다고 되어 있고 일반시민이 귀족의 이를 빠지게 하였으면 그 이를 뽑는다고 되어있다. 그런 반면 노예의 눈을 멀게 한 일은 마치 밭 갈던 소의 눈을 멀게 한 것과 같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간주했다.
― 함무라비왕은 오직 법전에 의해 나라를 다스렸고 노예를 거느리는 주 계급의 이익을 지켰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법전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내용을 비석에 새겨 바빌론 마르두크 신전 앞에 세워두었던 것이다.
― 고대국가 바빌론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바빌론의 영토 대부분은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 해당되며, 기원전 1163년 지금의 이란 국경 안에 위치했던 옐람국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예람국이 전리품으로 획득한 함무라비 법전 비석은 예람국의 수도인 소사로 운반되던 중 비석 윗부분이 벗겨졌고 당시 사라진 내용은 후에 다른 문헌과 비교하여 보완하였다.
― 훗날 예람국은 페르시아에게 멸망했으며 옐람국을 점령한 페르시아 제국은 소사를 수도로 하였으며, 함무라비 법전이 새겨진 비석 또한 페르시아로 넘어갔다. 함무라비 법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 법전이다. 역사적 가치가 얼마인지는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현재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 '세계역사, 숨겨진 비밀을 밝히다'에서
리슐리에 관
1)
고대 메소포타미아 유물관에는 문과 벽이 구분이 잘 되지 않아서 찾기가 힘든, 그래서 한적한 화장실이 있다.
2)
나폴레옹3세의 방은 루브르의 장식미술 중에서 으뜸이다. 인간의 생활공간이라기 보다는 완벽한 신들의 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고하고 웅장하다.
3)
리슈리외 관 3층에는 중세부터 19세기까지 루벤스나 렘브란트의 그림을 위시한 유럽의 회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는 베르메르의 <레이스를 뜨는 여자>와 얀 반 에이크의 <재상 니콜라 롤랑의 성모>가 있다.
시온주의의 강력한 지지자이며 아트컬렉터 자선사업가로 알려진 에드몬드 제임스 드 로스차일드는 1935년에 4천 점의 판화, 3천 점의 데생, 500편의 삽화책을 루브르에 기증했다. 여기에는 렘브란트의 데생이나 판화작품이 100여 점이나 들어 있다.
1940년 6월 14일 파리가 나치의 수중에 떨어지자 프랑스 사람들은 그들의 문화재가 폐허의 유물이 될까봐 몹시 두려워 했다. 그런데 루브르의 관장 자크 조자르는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불과 10일 전에 루브르의 소장품들을 비밀리에 옮겼다. 아무도 그에게 그런 일을 시키지 않았음에도 그는 프랑스 전역에 흩어져있는 직원 및 큐레이터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해냈다.
1939년 8월 25일 조자르는 '내부수리'란 명목으로 3일간 루브르의 문을 닫았다. 이 3일 동안의 낮과 밤 동안에 수백 명의 직원과 미술생도들은 하얀 나무상자에 예술품들을 차곡차곡 담았다. 베르네세의 <가나의 혼인잔치>는 원통 실린더에 말아서 넣었지만, 제리코의 거대한 <메두사의 뗏목>은 커다란 담요로 가린 채 오픈 트럭에 들어 올려졌다.
예술품은 중요도 순서로 분류되었다. 노란색 동그라미는 가치있는 작품, 녹색 동그라미는 중요한 작품, 빨간색 동그라미는 세계의 보물을 의미했다. <모나리자>가 들어 있는 하얀 상자에는 빨간 동그라미가 세 개나 그려져 있었다. 1939년 8월 27일 너무 무겁거나 중요하지 않은 그림들은 지하실에 두고, 대부분의 작품들은 싹 비웠다.
명화를 가득 실은 36대의 대형 트럭들이 <모나릳=자>는 샹보르 성으로, <사모트라케의 니케>와 <밀로의 비너스>는 발랑세 성으로 각각 보내졌다.
나치는 르브르를 2차 대전 중에 훔친 예술품들을 쌓아두는 창고로 이용했다.
파리의 「쥐 드 폼 미술관」에서는 수천 점의 몰수된 예술작품들이 처분되었다. 상당수의 작품들은 히틀러나 괴링의 소장품으로, 피카소나 달리의 작품은 퇴폐적이라 해서 비독일 수집가에게 팔리거나 태워졌다.
루브르 3대 소장품
1. 모나리자
2. 밀로스 섬의 비너스
3. 사모트라케 섬의 니케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조각상 가운데 하나로, 기원전 220년에서 19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승리를 관장하는 여신인 니케를 묘사한 대리석상으로, 길이는 328cm이며, 머리와 양팔이 잘려진 채로 남아있다. 현재 루브르에 전시되어 있다.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기원전 190년 로도스 섬의 주민들이 에게 해에서 일어난 해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사모트라키 섬에 세운 조각상으로 추정된다. 이 조각상은 1863년 프랑스의 영사 겸 고고학자인 샤를 샴푸아소가 발견했다.
앵발리드 Hôtel des Invalides (펌)
앵발리드(Invalides)는 나폴레옹 1세의 묘소로 유명하지만
군사박물관을 비롯해 해방훈장 박물관, 현대사 박물관, 생 루이 성당 등
파리의 역사적인 기념 건물 여러 채와 안뜰이 있는 건물들의 집합체이다.
원래는 1670년에 루이 14세가 전쟁 부상병을 위해 창설한 요양소로
당시 그레넬 평야라고 부르던 곳 부근에 앵발리드를 설립했다.
4,000명 가까운 노병들의 생활 근거지가 될 앵발리드는
당시 현역에 복무 중인 병사들의 급료 5년치를 징수한 기금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리베랄 브뤼앙(Liberal Bruant)의 설계로, 1671년부터 시작된 이 복합건물의 공사는 5년만인 1676년에 완공되었는데
현재도 100명 정도의 퇴역 군인이 요양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건물 대부분은 '군사박물관(Muséde l'Armée)'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으며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무기와 군사 관련 미술품, 장식품 등 풍부한 컬렉션을 전시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전쟁사도 시각적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나폴레옹과 관련된 검이나 군복 등 유품과 함께 그가 숨을 거둔 장소인 세인트 헬레나 섬의 침실이 재현되어 있다고 한다.
한 편 당시 퇴역 군인들은 상해 군인들의 요양소이자 군사 기념관인 앵발리드의 공사가 마무리 될 즈음
이곳에 그들의 신앙을 위한 성당도 지어지기를 희망했다.
이에 루이 14세는 리베랄 브뤼앙과 그의 후계자 아르두앵 망사르에게 앵발리드에 성당을 짓도록 지시하였으며,
1678년부터 1708년까지 지어진 새로운 성당은
상해 군인(Invalides)들의 수호성인이었던 생 루이(St Loius)의 이름을 따라 ‘생 루이 성당’으로 불렸다.
하지만 오늘날 이 교회는 정식명칭보다는 ‘군인들의 교회’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당시 루이 14세는 아르두앵 망사르에게 생 루이(St. Louis) 성당과 별도로 왕실 채플을 따로 지을 것을 분부하였는데,
채플(Chapel)이란 본당과는 다른 목적이나 봉헌으로 설정된 소 예배당을 말한다.
생 제롬 교회 또는 돔 교회(Eglise du Dome)라고도 불리는 이 채플(Chapel)은
파리의 앵발리드 건물을 먼 거리에서도 가장 잘 눈에 띠도록 하는 높이 107m의 바로 그 황금 빛 돔 건물이다.
프랑스 고전 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멋지게 조화를 이룬 종교 건축의 걸작으로
내부 장식도 훌륭하며 당시의 일류화가, 조각가들이 솜씨를 발휘했는데
특히 라포스의 둥근 천장 벽화가 뛰어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돔 교회가 유명한 것인 중앙 돔 바로 아래 지하에 나폴레옹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숨을 거둔 19년 후인 1840년 프랑스로 돌아와 이곳 앵발리드에 안장되게 되었는데
당시 프랑스 국왕이었던 루이 필리프(재위:1830년 1848년)가 영국 정부와 7년간에 걸친 협상 끝에
세인트헬레나로부터 나폴레옹의 유해를 이장하는 허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나폴레옹의 유해는 1840년 10월 8일 발굴되었으며
파리에 도착한 후 1840년 12월 15일에 국장이 거행되었다.
당시 겨울의 폭설에도 불구하고 영구차는 개선문을 통해 샹젤리제, 콩코르드광장, 에스플라나드를 거쳐 돔 교회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비스콘티가 설계한 묘당이 완공될 때까지 임시 안치되었다가
1861년 4월 2일 돔 아래에 있는 지하 묘지에 최종적으로 안치되었다.
녹색 화강암 받침대 위에 있는 붉은색 대리석 관이 나폴레옹 유해가 안치된 관이다.▲
따라서 지금 나폴레옹 관이 안치된 장소는 비스콘티의 설계로 1842년부터 9년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에는 나폴레옹 뿐 아니라 그의 첫 번째 부인 조제핀과
프랑스 육군장관을 지낸 군인으로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식민지화를 완성시킨 루이 리요테의 무덤,
그리고 프랑스의 전쟁 영웅과 군인들도 함께 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황후 조제핀의 묘 ▲
<오르세 미술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뮈제 중의 하나다. 1848 - 1914년 사이의 회화와 조각, 장식미술을 전시하고 있으며, 인상주의를 대변하는 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어 '인상주의 미술관'으로도 불린다.
오르세는 19세기 후반에 제작되었던 미술작품들을 루브르와 프티 팔레, 쥐 드 폼 미술관에서 그대로 옮겨왔기에, 고대와 중세, 근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루브르와 현대 미술관인 퐁피두를 잇는 시대적인 가교역할을 해왔다. 오르세 콜렉션은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인상주의, 표현주의 그리고 이르누보의 디자인을 두루 아우르고 있다.
시간 여유가 없는 방문객이라면, 가장 유명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만나기 위해 곧바로 6층으로 올라가도 좋다, 모네와 마네, 드가, 르누아르가 거기 있다. 특별히 인상주의의 ㅡ애호가라면, 센 강 건너편에 있는 <뮈제 오랑주리>나 파리의 모네 미술관인 <마르모탕>에 가도 좋다.
또한 갤러리의 산책이 끝나도 바로 계단이나 엘레베이터를 타지 말고 위에서 뮈제 안팎의 아름다운 전경을 꼭 감상할 것을 권하고 싶다.
'미술 > 미술 이야기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영화로 (펌) (0) | 2018.08.25 |
---|---|
장석주, 에드워드 호퍼 (0) | 2018.08.25 |
『불편한 미술관』 (0) | 2018.06.30 |
『벽없는 미술관』- 임옥상 (0) | 2018.06.25 |
『다시, 활시위를 당기다』 (0) | 2018.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