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2. 19. 20:40ㆍ미술/미술 이야기 (책)
2017. 5.1
시인의 언어로 만난 조선의 그림
현대시, 시조, 미술평론으로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되며 화려하게 데뷔한 시인 유종인. 꾸준하게 작품활동을 이어 오던 그가 드디어 조선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다. 시인은 『조선의 그림과 마음의 앙상블』을 통해 조선의 그림을 삶을 대하는 15가지 시선으로 나눠 폭넓은 안목으로 두루 다뤘다. 또한 등단 이후 오랜 시간 갈고닦은 세련된 언어와 쉬운 말로 조선시대의 걸작에 담긴 화가의 마음을 유려하게 풀어냈다. 그동안 익숙했던 미술사나 사조, 기법 등의 딱딱한 해설 대신 그림에 담긴 마음이 옮아오는 공감의 그림 읽기를 만나볼 수 있다.
저자 유종인
- 저서(총 8권)
- 1968년 인천에서 태어나, 1996년 『문예중앙』신인상을 통해 등단했다. 2003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촉지도를 읽다」로, 2011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당선했다. 시집으로 『아껴먹는 슬픔』, 『교우록』, 『수수밭 전별기』, 『사랑이라는 재촉들』이 있다.
머리말
들어가는 말
1 조선의 풍속연애를 대하는 마음조선의 밀월, 인간 본원의 자연스러움
2 모임의 정경모임을 즐기는 마음혼자일 땐 몰랐던 마음을 켜다
3 풍류의 외도풍류를 살겠다는 마음일상에 퍼지는 넉넉한 파문
4 소소한 풍물사소함을 아끼고 즐기는 마음소슬한 목숨의 번짐
5 정신의 풍모겉과 속을 모두 담아내는 마음올곧게 그려내면 정신과 감정이 밖으로 내비친다
6 산수의 신비인생과 산천경계를 하나로 읽어내는 마음비경과 실경이 하나로 어우러진 희로애락의 풍경
7 문인의 기개사군자를 그리고 즐기는 마음푸르른 절개와 고아한 의취
8 자연이 주는 향과 맛음식을 즐기는 마음소박한 무지의 그릇에 담긴자비의 숨결
9 영모와 사생애완의 마음영모를 품은 화인의 눈빛
10 반영과 실체나를 내게 보태는 마음자신의 형상 너머에서 시작된 최초의 붓질
11 책과 인생책을 읽는 마음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영혼의 샘
12 꿈과 현실꿈을 붓으로 그려내는 마음속세를 떠나 도원경의 길을 걷다
13 고요한 마음의 자리잠을 이루는 마음또 하루의 삶을 건너는 묵묵한 영육의 징검돌
14 영원과 불멸목숨의 영원을 기리는 마음유한한 목숨을 넘은 영원의 ‘결’과 ‘무늬’
15 죽음과 삶의 응시죽음을 의식하는 마음죽음이 건네는 삶의 아름다움
*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 《논어》<옹야편>
*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
*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보게 되며,
볼 줄 알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그저 쌓아두는 것과 다르다.
- 컬렉터 김광국(1685~?)의 화첩,《석농화원》발문 중에서
*
그러므로 그림의 묘는
사랑하는 것, 보는 것, 모으는 것,
이 세 가지의 껍데기에 있지 않고 잘 아는 데 있다.
- 유한준(조선시대1732~1811)
모임의 명칭이나 내용에 상관없이 인간이 모임을 가지는 것은 동질의 부류 속에서 자기 존재감을 찾자는 뜻이 완연하다. 자기를 알아줄 수 있는, 적어도 자기가 하는 일이나 취향이 무시당하지 않고 용인될 수 있는 분위기, 그 속에서 소소하지만 자아를 견지할 수 있는 낙락한 정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산은 물로써 혈맥을 삼고, 초목으로 모발을 삼으며, 안개와 구름으로써 神彩를 삼는다. 그러므로 산은 물을 얻어야 활기가 있고, 초목을 얻어야 화려해지며, 안개와 그름을 얻어야 고와진다. 물은 산을 얻어야 아름다와 지고, 정자를 얻어야 명쾌해지며,, 고기 잡고 낚시하는 광경을 얻어야 정신이 넓게 퍼져 환해진다. 이것이 산과 물을 회화에서 포치, 즉 배치하는 양상이다.
─ 곽희,《임천고치》에서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 1763년 51살 지본담채 112.5×59.8cm 국립중앙박물관
倚几彈琴者 豹菴也 傍坐之兒 金德亨也 含煙袋而側坐者 玄齋也 緇巾而對棋局者 毫生也 對毫生而圍棋者 秋溪也 隅坐而觀棋者 煙客 凭几而欹坐者 筠窩 對筠窩而吹簫者 金弘道 畵人物者 亦弘道 而畵松石者 卽玄齋也 豹菴布置之 毫生渲染之 所會之所 乃筠窩也
癸未四月旬日 煙客錄
책상에 기대어 거문고를 타는 사람은 표암(강세황)이다. 곁에 앉은 아이는 김덕형이다. 담뱃대를 물고 곁에 앉은 사람은 현재(심사정)이다. 緇巾을 쓰고 바둑을 두는 사람은 호생관(최북)이다. 호생관과 마주하여 바둑을 두는 사람은 추계이다. 구석에 앉아 바둑 두는 것을 보는 사람은 연객(허필)이다. 안석에 기대어 비스듬히 앉은 사람은 균와이다. 균와와 마주하여 퉁소를 부는 사람은 홍도(김홍도)이다.
인물을 그린 사람은 홍도이고, 소나무와 돌을 그린 사람은 바로 현재이다. 표암은 그림의 위치를 배열하고, 호생관은 색을 입혔다. 모임의 장소는 곧 균와이다.
계미년(1763) 4월 10일 연객이 적다.
균와아집은 한국회화사상 최고의 풍류가 아닌가 쉽다. 이 모임에 참석한 8인인데, 그 가운데 강세황(1713~1791), 심사정(1707~1769), 최북(1712~1786 무렵), 허필(1709~1761), 김덕형(1750무렵~?), 그리고 김홍도(1745~1806 무렵) 등 조선후기의 쟁쟁한 화가들이 참석했고, 그들의 면면이 그림 속에 담겨 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三園三齋 중 단원 김홍도와 현재 심사정이 보이고, 조선 후기 藝林의 總帥인 姜世晃이 참여했으며, 崔北과 許佖도 한국회화사의 한 자락을 장식하는 화가들이다. 이 모임을 가진 1763년에는 강세황이 51세, 심사정 57세, 최북 52세, 허필 55세인데, 김홍도는 19세이고, 김덕형은 13세 정도의 어린 나이였다. 김홍도와 김덕형은 아마 스승인 강세황의 배려로 쟁쟁한 화가들의 모임에 찬가할 수 잇는 기회를 갖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김홍도에게 있어서 이러한 아집과 풍류가 잦아지는 것으로 볼 때, 이 모임이 그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녔을 것으로 여겨진다.
風流란 무엇인가? 그것은 소통이다. 통일신라의 학자 최치원은 유교, 불교, 선교가 통합된 것이 풍류라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모임이 많다. 무슨 향우회로부터 시작하여 무슨 동우회, 무슨 동창회 등, 어느 모임에 소속되지 않으면 유독 불안해 여기는 것 같다. 심지어 외국에 사는 교포사회에서도 웬 모임이 그리도 많다. 최소한 교회라도 나가야 안심이 되는 것 같다. 소통을 통해 자신을 사회적 관게를 설정하고, 그러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도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선비들이 소통하는 방편이다. 거문고를 타고 퉁소를 불며 바둑을 두는 것도 바로 서로간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조선후기에 유행한 雅集에는 궁극적으로 소통을 통한 관계 설정이라는 근본적인 목적이 갈려 있다.
이 모임은 크게 두 구성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강세황과 김홍도의 합주다. 강세황이 거문고를 타고 김홍도가 퉁소를 불고 잇는 음악의 풍류이다. 이를 균와(신광익?)는 안석에 기대어 듣고 있고 심사정은 담배를 피우며 감상하고 있으며, 어린 김덕형은 강세황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다. 다른 하나는 崔北과 秋溪(미상)가 바둑을 두는 장면이다. 허필은 옆에서 훈수를 두고 있다.
안석에 기대어 음악을 듣고 있는 균와
이 모임의 주인공은 안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는 筠窩이다. 균와가 누구인지가 이 그림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인데, 지금으로서는 분명치 않다. 비스듬히 누워 있는 자세로 보아 참석자 가운데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균와라는 호를 가진 인물로 申光翼이 있다. 이 무렵 신광익은 제주목사를 마치고 경상도 좌병사로 부임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17세?) 그런데 신광익이 강세황을 비롯한 다른 화가들과 어떤 인연을 맺었는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는다.
책상에 기대어 거문고를 타는 강세황과 곁에 앉은 아이 김덕형
모임의 주인인 筠窩 다음으로 주목을 끄는 인물은 강세황이다. 여기 모인 화가들이 김홍도와 김덕형만 빼고는 모두 강세황보다 나이가 많다. 그렇지만, 이들은 강세황과 다른 이들과의 친분관계나 후에 이루어진 화단에서의 위상으로 보아 실제적인 모임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강세황은 安山에서 조선후기 화단을 주도하는 화가들과 교류가 활발했고, 이들이 결국 정조대에 쟁쟁한 화가로 활동했으며, 강세황은 예림의 총수가 되는 발판이 되었다.
그런데 이 모임이 있던 해에 강세황에게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그의 둘째 아들 완(俒)이 과거에 급제했을 때, 영조가 강세황의 아버지 강현(姜鋧)의 지극한 충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 홍봉한(洪鳳漢)이 “강세황이 글을 잘 짓고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다.”고 아뢰자, “말세에 인심이 좋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천한 기술을 가졌다 하여 업신여기는 자가 있을까 염려되니, 그림 잘 그린다는 얘기는 다시 하지 말라.”라고 답했다. 강세황이 이 말씀을 듣고 놀라며 땅에 엎드려 울부짖어 사흘 동안 눈물을 흘렸는데, 이 때문에 눈이 부어올랐다. 이때부터 화필을 태워버리고 다시 그리지 않기로 맹세했다. 영조의 서화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고 강세황 畵歷에 큰 변화를 일으킨 絶筆사건이다. 균와아집은 이와 같은 해에 일어났는데, 절필사건은 모임 뒤의 일일 것이다.
강세황 옆에 바짝 붙어있는 김덕형은 이때 13세 전후의 어린아이다. 어린아이가 어른들의 모임에 참여하고 강세황 옆에 바짝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강세황이 특별히 아끼는 제자인 듯 싶다. 이 그림으로 보면, 김덕형은 김홍도 다음으로 촉망받는 차기 주자로 보이지만, 실제 전하는 작품이 없고 이후 활약이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다. 李德懋의 글 가운데 각리(閣吏) 김덕형(金德亨)의 梅竹圖와 風菊圖에 대한 글 가운데 “玄翁(심사정)은 세상 뜨고 豹翁(강세황)은 늙어가니, 화가 중 인문은 오직 이 사람뿐이로세”라는 구절이 전한다.
<靑莊館全書> 제12권 ‘雅亭遺稿’ 四, 詩 4
閣吏 金德亨의 梅竹圖와 風菊圖 두 폭의 畫題
乾聲暗馥筆尖盈 마른 댓잎 소리 그윽한 매화 향기 붓끝에 가득한데
个字飜飜女字橫 个字形으로 나부끼고 女字形으로 비꼈네
安得呀光千尺絹 연마된 천 척 비단 어이 얻어서
鮒魚橋畔訪金生 부어교 가에 김생 찾아갈 건가
烏桕蕭蕭寫意新 오구나무 쓸쓸하여 그린 뜻 새로운데
又添疏菊頓精神 성긴 국화 피어나니 정신이 쇄락하네
豹翁衰晩玄翁去 현옹은 세상 뜨고 표옹은 늙어가니
畫派人間祇此人 화가의 인물로는 오직 이 사람뿐이로세
담뱃대를 물고 있는 심사정
얼굴과 상체가 많이 탈락되었지만, 간신히 남아 있는 형상의 자세로 보아 이 모임에서 최고의 연장자이거나 淡窩(洪啓禧?, 1703-1771)와 비슷한 연배인 것으로 보인다. 원래 謙齋 鄭敾의 제자로서 老論 쪽의 인맥이었지만, 안산의 南人 쪽 화가들과 교류가 활발했다. 그것은 조부 심익창(沈益昌)이 延仍君(이후 英祖) 시해 미수사건에 연루되면서 집안이 대역죄인의 자손으로 전락한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沈師正은 이 그림의 근경과 원경의 산수배경을 그렸다. 절벽과 작은 폭포 앞에 두 그루의 소나무가 춤을 추듯 쌍을 이루고 있고, 화면 아래에는 바위들이 적절하게 막아 서 있다. 남종화의 대가다운 진솔한 화풍은 이 모임의 격조를 높이는데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퉁소를 부는 김홍도
허필의 발문에 弘道라고 표기될 만큼 어린 김홍도는 열아홉 살로 이 모임에 참석하여 퉁소를 불고 이 그림의 인물을 맡아 그릴 만큼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스승인 강세황의 특별한 배려로 보인다. 이 그림을 그린 1763년에 강세황은 안산에 머물렀던 시기다. 김홍도가 21세 때인 1765년 영조가 경현당에 수작했던 행사를 그린 ‘경현당수작도(景賢堂受爵圖)’를 그렸으니, 화원이 되기 이전 안산에서 강세황 밑에서 그림공부를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무튼 김홍도는 젊은 시절 경험한 아집과 풍류를 통해 평생 참가하고 그림으로 표현한 아집도의 바탕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모임은 김홍도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김덕형의 얼굴모습과 비슷한 어린아이 얼굴들. 김홍도 <씨름>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가 그린 인물표현을 보면, 강약의 리듬이 크지 않은 비교적 가는 선으로 옷의 구김과 주름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얼굴 부분은 많이 손상되어 파악하기 힘들지만, 갓과 상투를 비롯한 머리의 표현을 보면 세밀한 묘사로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정면을 바라보는 어린아이 김덕형의 얼굴, 그 가운데 둥근 코의 얼굴을 보면 김홍도 풍속화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아집도의 인물표현이 이후 풍속화의 근간이 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홍도, <자화상> 종이에 채색, 27.5×43.0cm,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그동안 김홍도의 진작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작품이 있다.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自畵像’이다. 자화상이란 이름은 유홍준 교수가 1997년 조사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이 작품에 대한 오주석은 김홍도의 작품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그런데 이번 ‘균와아집도’에서 김홍도가 옷을 그린 묘법을 보면, 충분히 김홍도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가늘과 단단한 필선에 약간 각이 지게 표현하고 옷주름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점에서 19세에 그린 ‘균와아집도’와 유사한 필치를 엿볼 수 있다. 유홍준 교수는 이 그림이 김홍도의 30대 후반의 모습이라 했는데, 描法이나 얼굴 보습으로 보아 김홍도의 20대 모습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담뱃대를 물고 바둑을 두는 최북, 마주앉아 바둗 두는 추계, 훈수를 두는 허필
바둑판에 담뱃대를 물고 있는 최북이 눈에 띈다. 최북은 강세황을 비롯하여 申光洙, 申光河 등 남인 사람들과 交遊했다. 신광하는 “체구는 작달막하고 눈은 외눈이었다네만, 술 석 잔 들어가면 두려울 것도 거칠 것도 없다네”라고 읊은 바 있다. 최북이 외눈이 된 사연은 유명하다. 귀인에게서 그림 요청을 받았는데, 무슨 이유인지 진척이 되지 않았다. 이에 주문자가 위협을 가하려고 하자 분기탱천한 그는 남이 나를 저버림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린다며 자신의 한 눈을 찔러 멀게 했다는 이야기다. 그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그림에서 최북은 뒷모습을 그렸고, 왼쪽 눈은 멀쩡하다. 그의 앞에서 바둑알을 만지작거리는 이는 秋溪인데 추계가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제 남은 이는 바둑판에 훈수를 두는 허필이다. 방건을 쓴 허필은 왼쪽 무릎을 올리고 앉아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다. 그런데 문제는 몰년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해가 1761년으로 알려졌는데, 이 그림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763년에 그려졌고 허필이 제발까지 썼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허필의 몰년이 1763년 이후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는 담배 피우기를 워낙 좋아해서 호를 담배 피는 나그네란 뜻의 煙客이라고 불렀다. 이 그림에서는 허필이 아니라 최북이 담뱃대를 물고 있다.
이 그림의 의미를 파악하려면, 안산이란 지역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곳은 실학자인 성호 이익을 필두로 조선 후기에는 남인의 본거지로 자리 잡았다. 영조시대(1724~1776) 노론이 세상을 휘두르는 정국에 그들은 지금의 야당과 같은 존재로 한성에 가까운 안산에서 정치적으로 소외된 상황에 대한 아픔을 나누고 재기를 노려야 했다. 정조시대(1776~1800)가 되면서 이들은 드디어 조정에서 자신들의 뜻을 펼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채제공, 안정복, 강세황 등 안산과 인연이 있는 남인들이 대거 등용된 것이다. 김홍도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는 화원으로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균와아집에 참여했던 화가들은 강세황을 중심으로 정조시대 화단을 주도한 차기의 인물들이었다. 물론 이들 가운데 정조가 즉위하기 전에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지만, 김홍도, 강세황, 김덕형은 정조시대에 맹활약을 했다. 그런 점에서 균와아집은 단순한 화가들의 친목모임이 아니라 영조시대를 마무리하고 정조시대를 대비하는, 화가들의 결집을 위한 풍류모임으로 해석된다.
(정병모, 경주대학교 교수, 한국회화사전공)
<지본설채紙本設彩란 종이에 먹으로 바탕을 그린 다음 색을 칠한 그림>
조선 말기의 화원으로 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과 같은 인물을 많이 그렸던 희원希園 이한철李漢喆(1808~?)이 그린 18세기 괴짜 화가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1720?~ 1768?)의 초상은 얼굴에 주안점이 있는 초상이다. 상반신의 초상 중에 윗도리의 옷 주름이나 구체적인 색감은 몇 개의 선으로 극도로 생략되었다. 탕건을 쓴 갸름하고 긴 얼굴과 길고 무성한 수염을 늘어뜨린 하관은 팔초하다(얼굴이 좁고 아래턱이 뾰족하다).
그림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늙은 뒤에는 돋보기안경을 한쪽만 꼈다. 나이 마흔아홉에 죽으니 사람들은 그의 별호인 칠칠七七의 참讒(요사스러움)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콧수염과 구레나룻과 턱수염에 가린 입술은 유독 붉어 최북의 정신적 열기랄까 결기를 가늠케 한다.
보다시피 오른쪽 눈은 애꾸눈이다. 어느 날 지체 높은 양반이 최북에게 그림을 청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겁박을 했던 모양이다. 이에 굴할 최북이 아니었다. 그는 "남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리는구나!"라며 송곳으로 자신의 한쪽 눈을 찔러버렸다. 그가 찌른 것은 자신의 한쪽 눈이었지만 실상은 당대의 권위적이고 몰상식한 일부 편벽한 양반의 심장과 권위를 동시에 찌른 것이었다.
이현환의 문집에 보인 최북의 우뚝하지만 쓸쓸한 결기가 유언처럼 보인다.
"세상에는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이 드무네. 참으로 그대 말처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은 나를 떠올릴 수 있으리. 뒷날 날 알아줄 사람을 기다리고 싶네."
자기 그림이나 작품에 대한 자부심은 당대의 찬사가 있건 없건 언제나 오롯한(모자람이 없이 온전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자기 작품 세계에 대한 올바른 눈, 즉 심미안審美眼(아름다움을 살펴 찾는 안목)은 작가의 생명이다. 그것은 현세에 아무리 하찮은 대접을 받는 것이라도 화가의 목숨 이상으로 지켜야 할 본령인 것이다.
박지원이 우연히 눈을 뜨게 된 장님에 대해 쓴 글은 이런 작가적 자부심과 심미안에 대한 비유로 적절하지 않을까. 내용은 이렇다. 오래 장님이었던 사람이 어느 날 눈을 번쩍 뜨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장님이었을 때 잘만 찾아가던 자기 집조차 찾지 못하겠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러자 박지원은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라고 일갈했다.
애꾸눈 최북의 오른쪽 눈은 두 눈을 번연히 뜨고도 참된 자기만의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대내외적인 경고와 자경自警의 초상으로 읽힌다. 참된 아름다움이나 진실이 아닌 것이라면 그것에 기댈 필요가 있겠는가. 비록 가난과 기행과 궁핍의 나날을 살지언정 그 마음을 오롯이 지켜줄 만한 믿음의 진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 유종인 지음, '시인 유종인과 함께하는 조선의 그림과 마음의 앙상블'
조희룡, <홍백매팔곡병> 지본 채색, 125* 46.4cm
김명국, <은사도>
양해, <발묵선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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