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기억과 가슴속에서 멀어진 ‘불후의 명시’들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어 누구든 시를 누리고 즐기게 하려는 정재찬 교수의 노력이 담긴 책 『그대를 듣는다』. 이 책에는 시를 통한 ‘몽상’과 ‘묵상’이 고루 녹아 있다. 몽상은 경쾌하며, 발산적이고 원심력을 지니기에 미지의 세계를 찾아 나선다. 묵상은 심오하며, 수렴적이고 구심력을 지니기에 내적 성찰에 제격이다.
몽상과 묵상, 어느 하나 버릴 게 없다. 저자는 그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시인의 말을 찾아 엮고 꿰어 전한다. 시인은 타인 대신 아파하고 신음하다 침묵을 깨고 마침내 그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대신 들려주는 자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목소리를 찾아 우리에게 들려주는 저자의 글쓰기 가운데 오직 일관된 것이 있다면, 아마도 시와 인간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한양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문학교육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현대시의 이념과 논리』, 『문학교육의 사회학을 위하여』, 『문학교육의 현상과 인식』, 『문학교육개론 1』(공저), 『문학교육원론』(공저) 등이 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수차례 집필하고 미래의 국어교사들을 가르쳐온 그의 수업 방식은 특별하다. 흘러간 유행가와 가곡, 오래된 그림과 사진, 추억의 영화나 광고 등을 넘나들며 마치 한 편의 토크콘서트를 보는 것 같다. 그는 시를 사랑하는 법보다 한 가지 답을 말하는 법을 먼저 배워온 학생들에게 시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돌려주고 싶었다. 매 강의마다 한양대학교 학생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최우수 교양 과목으로 선정된 ‘문화혼융의 시 읽기’ 강의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교수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의술, 법률, 사업, 기술이 모두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란다.” 오늘도 그는 키팅 교수가 되기를 꿈꾸며 시를 읽는다.
머리말
1 두근두근, 그 설렘과 떨림 운명이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
2 총, 꽃, 시 시는 변방의 언어다
3 그대를 듣는다 목소리가 사람이다
4 서른에서 마흔까지 인생은 오래 지속된다
5 하루 또 하루 일상과 일생
6 행복한 고독 강은 흐르고 산은 높다
7 거울아 거울아 지금, 다시 동주
8 서울 가는 길 물동이 호메 자루 나도 몰라 내던지고
9 시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밥벌이와 시 쓰기
10 순한 마을에 별은 내리고 험한 세상에 시인이 되어
11 죽은 시인의 사회와 그 적敵들 시를 꿈꾸는 그대를 위해
수록 작품
어쩌면 우리는
마침표 하나 찍기 위해 사는 지 모른다
삶이 온갖 잔가지를 뻗어
돌아갈 곳마저 배신했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건
작은 마침표 하나다
그렇지, 마침표 하나면 되는데
지금껏 무얼 바라고 주저앉고
또 울었을까
소멸이 아니라
소멸마저 태우는 마침표 하나
비문도 미문도
결국 한번은 찍어야 할 마지막이 있는 것,
다음 문장은 그 뜨거운 심연부터다
아무리 비루한 삶에게도
마침표 하나,
이것만은 빛나는 희망이다
- 황규관, <마침표 하나>
전봉래는 일본 도쿄의 아테네프랑세에서 불문학을 공부한 시인으로 동생 봉건을 시의 길로 이끈 감수성 예민한 위인이었다. 그런 그가 전쟁통에 피란지 부산에서 갑자기 생을 마친다. 음독자살이었다.
나는 페노바르비탈을 먹었다. 30초가 되었다. 아무렇지도 않다. 2분 3분 지났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다. 10분 지났다. 눈시울이 무거워진다. 찬란한 이 세기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소. 그러나 다만 정확하고 청백히 살기 위하여 미소로써 죽음을 맞으리라. 바흐의 음악이 흐르고 있소. - 그리운 사람들에게 2월 16일.
형 봉래의 소식을 동생 전봉건은 알지 못했다. 살아서 만나지 못한 형의 그림자를 뒤늦게 봉건이 좇는다.
나는 군에 입대, 부상을 하고 통영서 제대를 하자 곧바로 부산으로 향했다. 행방을 알 수 없는 가족들을 수소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내가 부산에서 들은 첫소식은 형님의 자살이었다. 장소는 남포동의 지하다방 '스타'였다. 형님이 치사량의 페노바르비탈을 먹고 '바흐'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는 바로 그 자리에 잠시 앉았다가 돌아나가는데카운터에 쌓인 몇 권의 레코드북이 눈에 띄었다. 맨 위엣 것을 들쳐 보니 '바흐의 Burandenburg'였다. 카운터 아가씨는 레코드의 주인이 단골손님 김종삼이라고 일러 주었다. 형님은 벗이 아끼는 판을 틀어놓고서 저승으로 간 것이었다.
- 전봉건, '피난살이 시름 잊게 한 김종삼' (동아일보 1984. 3. 21) 중에서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 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 최승자, 삼십 세
※ 행간이 산만해서 내 맘대로 바꿔버렸음.
뭔 이런 걸 시라고..... 일기장에나 쓰고 말 일이지...... ㅠㅠ
서른이 될 때는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 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 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 같은 평야로구나.
한없이 넓어, 가도 가도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 최승자, 마흔
사랑한 후에
- 전인권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 편에 빨간 석양이 물들어 가면 놀던 아이들은 아무 걱정없이 집으로 하나 둘씩 돌아가는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저 석양은 나를 깨우고 밤이 내앞에 다시 다가오는데
이젠 잊어야만 하는 내 아픈 기억이 별이 되어 반짝이며 나를 흔드네 저기 철길 위를 달리는 기차의 커다란 울음으로도 달랠수 없어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오늘밤엔 수많은 별이 기억들이 내앞에 다시 춤을 추는데
어디서 왔는지 내 머리위로 작은새 한마리 날아가네 어느새 밝아온 새벽 하늘이 다른 하루를 재촉하는데 종소리는 맑게 퍼지고 저 불빛은 누굴 위한걸까 새벽이 내앞에 다시 설레이는데
이 노래는 스코틀랜드 가수겸 작곡가 알 스튜어트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번안하여 리메이크한 곡이다. 원곡에선 느낄 수 없는 처절한 적막감, 쓸쓸하고 공허하고 채워지지 않는 가슴 한 켠, 그래도 그 누구에게 탓하거나 투덜대지 않는 어른스러움마저 풍기는 이 노래. 제목이 오히려 불만스럽다. 이것이 고작 사랑한 후의 이별 노래란 말인가. 차라리 원곡의 제목이나 노랫말과 맞바꾸는 편이 낫지 읺을까. 도노번과 밥 딜런, 그리고 존 레넌 등의 영향을 받아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소재를 즐겨 다루던 알 스튜어트, 플래티넘 레코드로 기록될 정도로 성공을 거둔 그의 앨범 속 <베르사이유 궁전>은 부드럽게 들리는 멜로디와 달리, 가사는 프랑스 혁명을 아주 비장하게 다루고 있었던 것.
The wands of smoke are rising From the walls of the Bastille And through the streets of Paris Runs a sense of the unreal The Kings have all departed There servants are nowhere We burned out their mansions In the name of Robespierre And still we wait To see the day begin Our time is wasting in the wind Wondering why Wondering why, it echoes Through the lonely palace of Versailles
검은 연기가 바스티유 감옥과 파리 시내 곳곳에서 가득 피어오르네. 사실로 믿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 왕들은 다 죽고, 신하들은 모두 도망쳐버렸어. 로베스피에르의 이름으로 우리들은 귀족들의 저택을 불태워버렸지. 아직도 우리는 새로운 날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네. 우리의 세월은 바람에 날려가고 있어. 왜, 왜. 우리의 물음은 외로운 베르사이유 궁전에 메아리 치고 있다네.
Inside the midnight councils The lamps are burning low On you sit and talk all through the night But there's just no place to go And Bonaparte is coming With his army from the south Marat your days are numbered And we live hand to mouth While we wait To see the day begin Our time is wasting in the wind Wondering why Wondering why, it echoes Through the lonely palace of Versailles
한밤중에 열린 위원회의 낮은 등불 아래 당신은 밤새워 논의를 하고 있지. 하지만 더 이상 갈 곳은 없다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남쪽에서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 오고 있어. 마라, 너의 시절은 얼마 남지 않았어. 그리고 우리는 겨우 연명해가고 있지. 우리가 새로운 날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우리의 세월은 바람에 날려가고 있어. 왜, 왜. 우리의 물음은 외로운 베르사이유 궁전에 메아리 치고 있다네.
The ghost of revolution Still prowls the Paris streets Down all the restless centuries It wonders incomplete It speaks inside the cheap red wine Of cafe summer nights Its red and amber voices Call the cars at traffic lights
혁명의 유령은 여전히 파리의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어. 격동의 수 세기가 지났어도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았어. 혁명은 여름 밤 카페의 값싼 붉은 포도주 속에서도 속삭이고 있다네. 붉고도 황갈색인 그 목소리는 신호등에 걸린 차들을 부르고 있네.
Why do you wait
To see the day begin Your time is wasting in the wind Wondering why Wondering why, it echoes Through the lonely palace of Versailles Wondering why, it echoes Through the lonely palace of Versailles
왜 기다리고 있나.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데. 당신의 시간을 그냥 바람에 날려 보내려 하나. 왜, 왜. 우리의 물음은 외로운 베르사이유 궁전에 메아리 치고 있다네. 왜, 왜. 우리의 물음은 외로운 베르사이유 궁전에 메아리 치고 있다네.
행복론
최영미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 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몸을 최대한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며
확실한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고
특히 시는 절대로 읽지도 쓰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스려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
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창비. 1998)
오늘 하루
도종환
어두운 하늘을 보며 저녁 버스에 몸을 싣고 돌아오는 길 생각해보니 오늘 하루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다
이것저것 짧은 지식들은 많이 접하였지만 그것으로 생각은 깊어지지 않았고 책 한권 며칠씩 손에서 놓지 않고 깊이 묻혀 읽지 못한 나날이 너무도 오래 되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지만 만나서 오래 기쁜 사람보다는 실망한 사람이 많았다
--- 나는 또 내가 만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실망시켰을 것인가 미워하는 마음은 많았으나 사랑하는 마음은 갈수록 작아지고 분노하는 말들은 많았지만 이해하는 말들은 줄어들었다
소중히 여겨야 할 가까운 사람들을 오히려 미워하며 모르게 거칠어지는 내 언어만큼 거칠어져 있는 마음이 골목을 돌아설 때마다 덜컹거렸다
단 하루도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서 오늘도 혁명의 미래를 꿈꾸었다.
오늘 하루
도종환
햇볕 한 줌 앞에서 물 한 방울 앞에서도 솔직하게 살자
꼭 한번씩 찾아오는 어둠 속에서도 제대로 살자
수천번 수만번 맹세 따위 다 버리고 단 한 발짝을 사는 것처럼 살자
창호지 흔드는 바람 앞에서도 은사시 때리는 눈보라 앞에서도 오늘 하루를 사무치게 살자
돌멩이 하나 앞에서도 모래 한 알 앞에서도
강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腹腸)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우화의 강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 소리가 강물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자주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 나는 왜 이 시를 읽으며 치질(치루)를 떠올릴까? 드럽게.
앵두 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밋 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입분이도 금순이도 담봇짐을 쌌다네
석유 등잔 사랑 방에 동네 총각 맥 풀렸네 올 가을 풍년가에 장가 들라 하였건만 신부감이 서울로 도망갔대니 복돌이도 삼용이도 담봇짐을 쌌다네
서울이란 요술쟁이 찾아갈 곳 못 되드라 새빨간 그 입술에 웃음 파는 에레나야 헛고생을 말고서 고향에 가자 달래주는 복돌이에 입분이는 울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