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4. 8. 19:44ㆍ詩.
삼십 년 만에 내놓은 김기택 시인의 첫 산문집.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일어나고, 면도와 세수를 시켜주고 출근시켜주는 습관. 아무리 피곤하고 모욕적이라도, 죽은 것과 다름없이 반복되는 기계적인 삶이라는 회의감이 들지만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어주는 불감증. 밤늦게 혼자 사무실의 불을 밝히고 있을 이 땅의 모든 직장인들은 그 고단한 마음을 어디서 위로받고 있을까.
세상의 소외된 모든 것들의 목소리와 풍경에 주목해 온 김기택 시인의 첫 산문집 『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는 직장인들의 고단한 마음을 위로하는 51편의 시를 소개하는 책이다. 많은 시인들의 시 감상과 더불어 자전적인 이야기나 체험적 시론, 삶에 대한 이런저런 시인 김기택의 생각을 담담한 말투로 담아냈다.
계절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도록 네 부분으로 나뉜 이 시집은 시인 김기택이 즐겨 감상한 51편의 시가 오롯이 담겨있다. 이 시편들은 내면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해주거나, 사물이나 자연에 숨어 있는 나를 만나게 해주거나, 지리멸렬한 삶을 새로운 시선으로 확 바꿔 보게 하거나 자신이 받은 상처를 즐거움으로 바꾸는 에너지가 있는 시들이다.
출판사 다산책방 | 2016.09.12
- 저서(총 36권)
-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꼽추」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미당문학상, 지훈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집으로 『갈라진다 갈라진다』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껌』 등이 있고 동화책 『꼬부랑 꼬부랑 할머니』와 『방귀』를 펴낸 바 있다.
프롤로그 밥에 붙들려 꽃 지는 것도 몰랐다
제1부 탄력의 통쾌함
_ 봄에 읽는 시
봄, 가벼움의 본능이 깨어나다
- 황인숙「조깅」
맛있게 우는 법
- 문정희 「흙」
사랑의 리듬과 시의 리듬은 심장에서 온다
- 차주일 「두 번째 심장」
웃지 않으면 죽는다
- 이현승 「간지럼증을 앓는 여자와의 사랑」
내 몸은 자연이고 사물이다
- 송재학 「사물 A와 B」
동네 이발소는 왜 없어졌나
- 박형권 「우리 동네 집들」
우리 동네 집들
박형권
좋은 사이들이 말을 할 때 가만히 눈매를 바라보는 것처럼
손끝으로 입을 가리는 것처럼
겨드랑이를 쿡 찌르고 깔깔대는 것처럼
우리 동네 집들이 말을 한다
파란 대문 집은 아직 아버지가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아서
외등을 켜고
군불 때는 집은 쇠죽 끓이는 소리로 오래된 말을 한다
옥상에 노란 수조가 있는 집은 취직 시험 볼 삼촌이 있어서
옥탑방이 하얗게 말을 한다
오랫동안 살을 맞댄 이웃집들은 오래된 부부처럼 닮아간다
된장 맛이 같아지고 김치 맛이 같아지다가
우리 담장 허물까 한다
그러다가 한방 쓸까 한다
돌아설 수밖에 없는 어려운 처지에서는 등으로 말을 한다
뒤란으로 말을 한다 거기 목련 한 그루 심어둔다
골목 하나 사이에 두고 마주한 집들은
활짝 열린 입술로
키스할까 말까 오랫동안 망설인다 문을 열고 사람이 나와
골목을 쓸면서
잘 잤어? 하는 것은
사람이 집의 혀이기 때문이다
집들이 하는 말 중에 가장 달콤하게 들리는 것은
우리 불 끌까?이다
밤에 집이 하는 말을 들으려고 옥상에서 귀를 기울이면
응, 거기 거기 하는데
우리 동네 밤하늘이, 반짝반짝 별들이 그런 밤에는 불끈불끈 자란다
우리 동네 집들은 다른 동네 집들보다 조금 크게 말을 한다
바다에서는 목청껏 말해야 파도 소리를 넘을 수 있기에
그런 어부 새벽마다 낳아야 하기에
배에 힘 가두고 출렁이듯 말을 한다
마지막으로 간 이발소는 뚱뚱하고 우락부락한 아주머니 혼자서 운영하는 낡고 지저분한 곳이었다. 잠바를 벗어 라커에 넣으려고 했더니 라커마다 낡은 잡지나 만화, 옷가지, 잡동사니가 가득 차 있었다. 아주머니는 잡바를 거칠게 뺏어 소파에 던지더니 의자에 앉혔다. 깎는 방향을 바꿀 때마다 내 머리를 거세게 좌우 상하로 돌렸다. 다 깎고 나서 머리를 감아주는, 샴푸가 잘 나오지 않자 샴푸통으로 내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어지간히 안 나오는지 여러 번 세게 내려친 뒤에야 머리 감기가 시작되었다.
몸, 문명이 침투하지 못한 생태계
- 최승호, 「몸의 신비, 혹은 사랑」
내 마음이 듣고 싶은 말
- 천양희, 「참 좋은 말」
그리운지도 모르는 간절한 그리움
- 장석남, 「살구꽃」
밥맛은 살맛이다
- 이덕규, 「논두렁」
풀의 숨은 이름 찾기
- 고형렬, 「풀이 보이지 않는다」
탄력의 통쾌함
- 손택수, 「스프링」
추억은 나의 미래다
- 문인수, 「집 근처 학교 운동장」
제2부 나는 세상의 중심이다
_ 여름에 읽는 시
바람 속에는 목소리만 남은 이들이 산다
- 김경주, 「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밤」
상처를 벼려 쇠로 만들다
- 조정권, 「금호철화」
이 얼굴 이 이름이 너니?
- 김광규, 「나」
먹지 않고 사는 방법
- 문혜진, 「독립영양인간 1」
피가 끓을 때 나는 세상의 중심이다
- 이원, 「오토바이」
추억은 나를 찾아다니는 여행이다
- 김사인, 「아무도 모른다」
둥근 탄력의 마법
- 장석주, 「축구」
어머니 안에 갇힌 어머니
이경림, 「부엌 -상자들」
이게 뭐야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경이로움」
노래하고 죽을래 그냥 죽을래
- 최정례, 「웅덩이 호텔 캘리포니아」
흐르는 시간에 익사당하지 않으려면
- 진은영, 「물속에서」
우물은 지난 여름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 한성례, 「고향우물」
물방울은 어떻게 송곳으로 단련되는가
- 정병근, 「물방울, 송곳」
물방울, 송곳
정병근
이 기억을
모두 잊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시간이
어찌 지금만일 수 있으리
물방울이 맺힌다
한 방향으로만 걸어온 기억이
마지막 시간을 쥐어짜고 있다
올 데까지 온 기억의 장렬한 최후
결심을 끝낸 물방울이 떨어진다
뒷 물방울이 앞 물방울의 목을 친다
바닥에 부딪쳐 산산조각나는 머리통
똑, 똑…
맨몸을 던져 바위를 뚫는
저 집요한 기억의 송곳
제3부 사랑에는 기교가 필요하다
_ 가을에 읽는 시
냄새로 세상 읽기
- 윤의섭, 「바람의 냄새」
사과가 말을 걸어오게 하는 법
- 김혜순, 「잘 익은 사과」
지나간 일을 되돌리는 방법
- 김승희,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
반품 불가 교환 불가 환불 불가
- 이윤학, 「버려진 식탁」
헐거운 공간, 꽉 찬 고요
- 김태정, 「달마의 뒤란」
노래 속의 육체, 육체 속의 노래
- 김소연, 「이것은 사람이 할 말」
사랑에는 기교가 필요하다
- 박형준, 「사랑」
지독한 외로움
- 이면우, 「거미」
다 이야기하면서 감추기
- 김두안, 「그림자 속으로」
이별은 투명인간과 같이 사는 것
- 나희덕, 「그의 사진」
내 안에 언제 고통의 항체가 생겼을까
- 박라연, 「고사목 마을」
나의 은신처
- 곽효환, 「지도에 없는 집」
맛있고 향기로운 슬픔 제조법
- 조은, 「등 뒤」
제4부 난폭한 슬픔 길들이기
_ 겨울에 읽는 시
맹수의 피가 흐르는 꽃, 동백
- 송찬호, 「관음이라 불리는 향일암 동백에 대한 회상」
나무는 제 삶을 몸에다 기록한다
- 함민복, 「원(圓)을 태우며」
세상의 모든 길은 나무를 닮았다
- 고재종, 「나무 속엔 물관이 있다」
난폭한 슬픔 길들이기
- 마종기, 「내 동생의 손」
배고픔이라는 별미
- 신덕룡, 「만월」
삶의 안하무인과 횡포와 변덕에게
- 김경미, 「오늘의 결심」
벽으로 만든 문
- 박주택, 「국경」
사소한 편리 뒤에는 목숨을 건 속도가 있다
- 장경린, 「퀵 서비스」
절망과 체념의 춤
- 김정환, 「절망에 대해서」
폭력의 기억을 놀이로 만들기
- 유홍준, 「가족사진」
마음은 죽어도 몸은 죽을 수 없는 어머니
- 정철훈, 「병사들은 왜 어머니의 심장을 쏘는가」 (백학)
죽은 병사들이 학이 되어 날아갔다는 러시아 가요 「주라블리」의 가사는 진부하다
죽은 자는 죽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는다
주라블리의 하얀 날개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선에서 불똥이 튈 때 어머니는 군화를 신듯 두꺼운 양말을 조여신고 일어선다
어머니의 일생은 이미 패배한 것이어서 자식을 찾아오기 전에는 다시는 앉지도 눕지도 않을 것이다
흔히 죽은 자의 영혼은 날아오른다고 하지만 문제는 대지에 남은 육신이다
뼈와 살과 흥건한 핏물……
자작나무는 영혼이 빠져나간 시신을 뿌리로 휘감으며 자란다
자작나무숲에 들어가보면 안다
잘박이는 낙엽을 밟는 순간 물컹하게 풍기는 피비린내
하늘은 어둡고 자작나무 껍질은 은박지처럼 반짝이는데 거기 맺혀 있는 건 어머니의 눈물
체첸에 파병된 아들을 찾아나선 병사들의 어머니회원들이 모스끄바에서 그로즈니까지 도보시위를 벌일 때
그들의 손에는 흰 깃발이 들려 있었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자작나무 밑에 시체가 썩고 있다고
가슴의 붉은 리본은 아들의 전사통지
산 아들이 아니라 죽은 아들을 찾으러 가는 어머니들의 걸음은 이미 총알 빗발치는 전장을 밟는다
아들의 시체를 찾아 헤매는 동안 어머니의 얼굴엔 수염이 자란다
그리하여 모든 병사들은 적군이 아니라 어머니의 심장을 쏘는 것이다
적군은 앳된 얼굴의 체첸 전사가 아니라 그 병사의 어머니며 어머니의 심장이다
언 땅으로 눈발은 흩날리는데 거기 반쯤 묻혀 무엇인가를 움켜쥐려고 내뻗친 시신의 손목
어머니들은 얼어붙은 손목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든다
우리는 알고 있다
주라블리들이 떼지어 겨울 하늘을 날아가는 저 진부한 노래가
왜 어머니의 심장 속에서 흘러나오는지를
군인은 몸으로 죽지만 어머니는 가슴으로 죽고 기억으로 죽는다. 군인은 단 한 번 한순간에 죽지만 어머닌 수십 년에 걸쳐서 수십 수백 번 죽는다. 군인은 죽어서 썩지만 어머니는 다 썩은 다음에 죽는다. 살아서 하루에도 여러 번씩 죽는 어머니의 죽음은 어머니의 몸이 죽어야 비로소 끝난다.
불쌍한 몸보다 더 불쌍한 마음
- 김윤배, 「굴욕은 아름답다」
에필로그
_ 혼자이면서 혼자가 아닌 시간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창비시선 314 | |
· 저자 : 정철훈 시집 |
강건한 문장으로 시와 소설을 넘나들며 역사와 시대를 다루어온 정철훈의 네번째 시집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가 출간되었다. 북방의 대륙을 주된 배경으로 하여 펼쳐지는 시인의 사유는 개인의 실존을 탐구하려는 노력과 시대에 대한 의식의 결합을 통해 인간의 고독과 방황을 탁월하게 형상화한다. 그의 시에 생생하게 구현되는 이국적 이미지 속에서 사람들은 국경과 민족에 상관없이 힘겹게 오늘을 살아낸다. | ||
제1부
고독 속에서 사유하는 실존, 그리고 금기의 대륙 낮에는 보험회사 직원/ 밤에는 글 쓰는 고독한 작가 / (…) // 보험회사 직원이 2라면 작가가 8일 거라는 생각 / 밥벌이와 영혼의 관철이 2대 8일 거라는 / 생각의 연장이 카프카의 사진이다(「카프카의 가르마」 부분)
어느날부터 나는 커피향이 스멀거리는 마포의 / 옥외 커피점에 앉아 있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 실내와 실외를 구분짓는 그 어중간한 경계에는 아무 선도 없지만 / 내 몸이 그 선에 얹혀 있다는 게 / 커피향과 더불어 자유를 떠올리게 한다 // (…) // 영혼은 밝으면 별반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기에 / 나는 영혼이란 놈이 좀 어두컴컴하게 숙성되기를 / 그 옥외 커피점에 앉아 기다려보는 것이다 (「누에의 꿈」 부분)
그러므로 솔직해지자 / 우리에게 식탁이나 밥상이 없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 봄이 올 때까지 이 겨울의 사랑을 어찌 껴안을까 / 몸은 더운데 사랑의 바닥은 차갑구나 / 사랑아, 낙엽이 모두 떨어지기를 기다리자꾸나 / 그리고 기억하자 / 이 지난한 방 한 칸의 사랑을(「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랑」 부분)
날이 밝으면 큰아버지가 공항에 도착하는 아침이다 / 그는 오래전 소련으로 망명했으니 그 국가가 패망해 사라졌다 해도 그는 소련에서 온 사람이다 // (…) // 나는 진정 그가 이국땅에서 운명하길 바란다 / 내 피에도 불귀의 유전자가 흐른다는 걸 그가 증명해주길 / 이 시대에 고향에 뼈를 묻는 일은 사치에 가깝다(「로맹 가리를 읽는 밤」 부분)
수신자 없는 편지를 쓰는 밤은 늘어가고 / 아무도 읽지 못할 일기를 끼적일 펜과 잉크는 얼어붙고 있다 // 자작나무 가지가 눈을 이기지 못해 우두둑 부러질 때 나는 눈을 뜬다 // 비행기는 시간여행을 하는 한 마리 날벌레처럼 시베리아 상공을 날아가고 / 나는 어디로도 귀환하고 싶지 않았다(「흑승」 부분)
이동휘 홍범도 박진순 김아파나시 홍도 김규식 여운형 / 이 역을 지나 뻬쩨르부르그에 당도했을 이름들 / 동방피압박민족대회가 열린 1920년 / 피압박이라는 단어에서 구시대의 유물처럼 녹냄새가 난다 // (…) // 외로운 급수탑 하나가 모든 이야기의 중심으로 서 있던 / 해 지기 십분 전 / 열차는 식당칸의 접시들을 달그락거리며 미끄러져갔다(「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부분)
횡단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건너는 일가족 / 그들을 데려가는 것은 기차 바퀴가 아니라 / 차창을 스치는 바람과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침묵과 / 그 사이에서 일렁이는 슬픔이라 생각되던 것인데 // (…) // 차가운 쇳조각으로서의 철길이 / 가족의 시선 안에서 출렁이는 눈물처럼 / 마디마디 끊어진다 한들 / 삶은 확실히 슬픔과 중력의 자식일 것이니 / 기차가 슬픔을 가로질러가듯 / 이 모든 것 너머에 우리는 존재한다(「감자를 벗겨 먹는 네 개의 입」 부분)
살아가는 일은 대체로 불우(不遇)의 연속이다. 그리고 사랑 또한 대부분 상처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들의 밑바닥에까지 가닿기 위하여 기꺼이 고통과 굴욕을 감내한다. 그것은 존재의 실상이자 삶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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