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딜리아니 그려봤는데, 참, 이상하다...?

2016. 7. 17. 17:47내 그림/내 유화 작품

 

 

 

 

 

 

 

 

보다시피 이렇게 두 개나 그려봤는데,

아무런 느낌이 안 옵디다?  어? 그럴 리가 없는데...... ????

 

 

 

 

 

  


잔느 에뷔테른 관상이 어떻습니까?

혹시, 저 두 사람에 대해서 우리감쪽같이 모르는 게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래 - 펌글))



 


-전략-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생각해보라구!

모딜리아니가 너의 초상화를 그린다면...

겁나는 일이지.

당장 네 눈에 손가락을 넣어 눈동자를 빼어놓고 그림을 그릴거란 말이지.

모딜리아니의 그림에서 여자들의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것은 

그 내면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더 적절했다는 평도 있었지만

어쩌면 대상은 그림에 녹아들어 그 실체성을 잃은 것은 아닐까?

눈동자가 없는 초상이란,,,

단지 여자라는... 누구라는 확정된 사실이 아닌 어떤 여자라도 괜찮다는 

개인성, 고유성이 없이 보편성만을 지닌 것으로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모딜리아니의 개인적인 생활도 보면 여성편력이 심했지.

아님... 눈동자를 그림으로써 자신의 현존을 외치고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까바 겁이 난 것은 아닐까?

그런 남자를 사랑한 여자는 어땠을까?*

한 남자... 아니, 사랑하는 남자가 죽었다고 임신 8개월의 몸으로...

생명을 품고 있는 여자가 죽을 생각을 했다는 것,

내게는 너무나 모순된 일이라고 여겨지네?

여자가 임신 8개월이라면 벌써 태동을 느끼고 발길질을 느낀다는 건데...

죽은 남자의 생명을 어떤 의미로는 이어나갈 수도 있을 아기까지 희생하면서까지

죽음을 선택한 여자의 슬픔은 어땠을까?

세상의 끝이었을까?

많은 의문을 가지게 하는 화가...


그런데 이 그림... 기막히게 아름답더라!


 


*모딜리아니 (Amadeo Modigliani, 1884-1920) 의  마지막 연인이자 아내였던 쟌느 에뷔테른.

모딜리아니가 서른 여섯의 나이에 지병으로 죽은 후  그 소식을 들은 헤어져있던 쟌느는 임신 8개월의 몸이었는데

이틀 후 그녀 어머니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쟌느가 모딜리아니에게 "왜 눈동자를 그려주지 않죠?" 라는 질문에 모딜리아니는

"당신의 영혼을 그릴 수 있을 때 당신의 눈동자를 그릴 수 있을거야"라고 대답했다고.


 

 

 

 

 

 

 

 

 

 

잔느 에뷰테른과의 비극적인 사랑과 죽음

 

 

1917년 여름, 모딜리아니는 러시아 조각가 차나 올로프(Chana Orloff) 의 소개로 일본인 화가 츠구하루 후지타(Tsuguharu Foujita) 의 모델이었던 19살의 잔느 에뷰테른을 만난다. 보수적인 부르주아적 배경을 가진 에뷰테른의 가족은 모딜리아니를 버림받은 낙오자보다 못한 화가, 유태인이라는 점에 반감을 갖고 둘의 만남을 반대했다. 결국 에뷰테른은 모딜리아니와의 관계 때문에 열성적인 로마 가톨릭이었던 가족과의 인연마저 끊게 되었다.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둘은 함께 살았다. 그리고 그해 겨울, 1917년 12월 3일에 모딜리아니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베르트 베이유의 갤러리에서 첫 번째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그곳 유리 전시장에 걸려 있던 모딜리아니의 누드 작품 두 점을 본 경찰의 제재로, 전시회는 오픈한 지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문을 닫게 되었다. 이후 모딜리아니와 에뷰테른은 니스로 여행을 떠났고, 거기에서 딸을 낳아 잔느라는 같은 이름을 지었다. 니스로의 여행은 레오폴드 츠보로스키, 모딜리아니, 후지타 그리고 다른 작가들에 의해 조직된 것으로 부유한 관광객들에게 그들의 작품을 팔기 위한 것이었다. 모딜리아니는 몇 점의 작품을 팔았으나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딜리아니는 이 시기 동안 가장 인기 있고 높은 평가를 받는 걸작들을 제작했다. 그는 일생 동안 많은 작품을 팔았지만, 결코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다. 번 돈은 곧 술과 약으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1919년 5월 그들은 딸과 함께 파리로 돌아왔고 아파트를 빌렸다. 그곳에서 잔느 에뷰테른과 모딜리아니는 서로의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그들만의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에 모딜리아니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실신 상태도 잦아졌다. 1920년, 며칠 동안이나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자 아래층에 사는 이웃이 그의 집에 확인 차 들어갔을 때, 침대 위의 모딜리아니는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임신 아홉 달째에 접어든 에뷰테른의 손을 잡고 누워 있었다. 의사를 불렀으나 모딜리아니는 불치의 결핵 수막염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조치도 할 수 없었다. 1920년 1월 24일 모딜리아니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은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의 많은 작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에뷰테른은 그녀의 부모가 데리고 갔으나, 그녀는 너무나 큰 상실의 슬픔에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에뷰테른은 모딜리아니가 죽은 지 이틀 후에 5층에서 뛰어내려 아홉 달 된 뱃속의 아이와 함께 그의 뒤를 따랐다. 죽어서도 모델이 되어달라는 모딜리아니와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에뷰테른의 적대적인 부모는 1930년이 지난 후에야 에뷰테른의 묘를 모딜리아니와 함께하는 것을 허락했다.

 

모딜리아니는 가난과 궁핍 속에 죽었다. 일생에 단 한 번 개인전을 하였으며, 끼니를 위해 레스토랑에 수많은 그의 그림을 주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평판은 널리 알려졌고, 작품 가격은 엄청나게 뛰었다. 또한 그의 일생은 세 편의 영화, 한 편의 다큐멘터리, 아홉 개의 소설과 연극에서 다루어졌다. 플로렌스에 있는 모딜리아니의 여동생이 입양한 15개월 된 딸 잔느(1918-84)는 성장하여 아버지의 바이오그라피 [Modigliani: Man and Myth]를 썼다.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