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7. 16. 09:06ㆍ책 · 펌글 · 자료/문학
- 이것이 박목월의 풀 러브스토리 완결판입니다 -
이별의 노래
박목월 시 / 김성태 곡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朴木月(본명은 泳鐘, 1916~1978)은 일제 식민지하에서 태어나 자랐다.
경북 경주군 서면 모량리가 고향이다.
그는 경주 동부금융조합에 재직중이던 1939년,
선배 시인 정지용의 추천으로 <길처럼> <그것은 연륜이다>가 《문장》9월호에 추천 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가 시인으로서 본격 두각을 나타낸 것은 해방 후부터였다.
해방은 그의 시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목월의 제주행과 슬픈 이별
한 유명 시인이 사랑했던 아름다운 여대생과의 헤어짐의 아픔을 노래한 시가 <이별의 노래>라는 이야기는
1980년대에 나온 ‘박목월 평전·시선집’ 《자하산 청노루》(이형기 편저, 문학세계사, 1986년>에서
이 스토리를 정면으로 다룸으로써 세간에 기정 사실로 알려져왔다.
<자하산 청노루>에서는 이 연애사건에 ‘이별의 노래’란 제목을 달아 평전(評傳)의 일부로 자세히 적어놓았다.
호사가들이 좋아할 만한 흥미진진한 러브 스토리이다.
신문, 잡지 등 워낙 여러 지면에서 이름 있는 문인들이 대체로 이 책의 기록을 근거로
‘시인의 애틋한 사랑이 낳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시’라며 진지하게 설명해 놓았으므로
누구도 그 이야기를 의심치 않았다.
평전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박목월이 6.25 피난시절 대구에서 알게 된 H씨 자매가 있었다.
자매가 모두 목월의 시를 좋아해 목월을 자주 찾아왔다.
처음에는 흔히 있는 팬과의 만남 정도로 대했다. 언니가 더 적극적이었다.
그러는 사이 휴전(1953년 7월)이 성립되었다.
목월은 가족보다 먼저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의 대학들이 다시 문을 열었다.
그사이 자매도 상경했다.
자매의 아버지가 부유했으므로 흑석동에 집을 사 두고 자녀들을 공부시켰던 것이다.
언니가 서울에서 결혼을 하자 이번엔 동생이 혼자 목월을 찾았다.
동생의 가슴에 사랑의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목월도 그녀에게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1954년 초봄부터 두 사람이 서울의 밤거리를 함께 거니는 날이 많아졌다.
목월은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자책감으로 괴로웠다.
어느 날 목월은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있는 가까운 시인 Y를 불러서
H양을 만나 자신을 단념하도록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Y씨를 만난 H양, Y씨의 말을 듣고 나서,
“선생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겠지요.
저는 다만 박 선생님을 사랑할 뿐, 이 이상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런 무상의 사랑은 누구도 막을 권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었다.
그해 여름이 가고, 가을 바람이 불어 왔을 때 목월은 서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와 함께 제주도로 떠난 것이다.
두 사람은 제주에서 넉달쯤 동거를 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더 극적이다.
..
편저자는 사건 이후 20년쯤 흐른 후 여류시인 K씨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면서 이렇게 옮겨놓았다.
그 제주 생활이 넉 달째 접어들어 겨울 날씨가 희끗 희끗 눈발을 뿌리던 어느날,
부인 유익순이 제주에 나타났다.
목월과 H양이 살고 있는 집을 찾아온 그녀는 두 사람 앞에 보퉁이 하나와 봉투 하나를 내 놓았다.
보퉁이에는 목월과 H양이 입고 겨울을 지낼 수 있는 솜 누빈 한복 한 벌씩이,
그리고 봉투에는 생활비에 보태 쓰라는 돈이 들어 있었다.
남편은 물론 H양에 대해서도 그녀는 전혀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고달픈 객지 생활을 위로했던 것이다.
그러한 그녀 앞에서 H양은, “사모님!” 하고 울었다.
목월도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결국 목월은 가정으로 돌아왔다.
제주생활 넉 달을 치르면서 유익순 앞에서 울었던 H양은 목월을 단념하게 된 것이다.
널리 애창되고 있는 목월 작사의 <이별의 노래> 가사는 바로 H양과의 이별의 심정을 읊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그러나 이별의 노래의 주인공은 평전이 그럴듯하게 그려 놓은 것처럼
1954년 박목월 시인을 제주도에까지 찾아가 몇 달간 함께 지냈던 H양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랑과 인생을 걸었지만 박목월의 부인이 다녀간 며칠 후,
부산에서 여대생의 아버지가 찾아와 설득 했고,
사흘을 버티다 결국 이별을 선택한 목월의 여인은 부친의 손에 이끌려 제주항으로 떠나고,
망부(忘婦)를 태운 꽃상여를 뒤따르 듯 목월이 따르고
목월이 제주에서 문학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양중해(제주 제일중 국어 선생)가 이 이별의 장면을 동행하게 된다.
목월의 여인은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뱃전에서 고개만 떨구었다 한다.
그날 저녁 동행한 양중해가 시를 쓰고, 같은 학교 음악교사인 변훈 선생이 곡을 만들어
불후의 명곡 "떠나가는 배"가 탄생 하였다.
떠나가는 배 - 양중해 詩 / 변훈 曲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님 실은 저 배는 야속하리
날 바닷가에 홀 남겨두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터져나오라 애슬픔,
물결 위로 한된 바다
아담한 꿈이 푸른 물에 애끓이 사라져
내홀로 외로운 등대와 더불어
수심뜬 바다를 지키련다
저 수평선을 향하여 떠나가는 배,
오 설움이여,
임보내는 바다가를 덧없이 거닐던
미친듯이 울부짖는 고동소리
님이여 가고야 마느냐 ...
박목월이 털어놓은 <이별의 노래>의 주인공
<이별의 노래>가 여대생 H양과의 이별을 노래한 것이란 소문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모양이다.
목월도 그러한 소문에 대해 듣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책 《구름에 달 가듯이》(1973년, 1979년 삼중당)에 <이별의 노래>를 짓게 된 동기를 써 놓았는데,
다소 추상적이다.
그렇더라도 이 글을 통해 보건대,
이것이 완전한 픽션이 아니라면 노래의 주인공이 H양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알던 사람이며,
전쟁 중에 우연히 재회해, 그 후 다시 만나기 시작했고
병실에서 하룻밤을 간호하며 지낸 적도 있으며,
결국 세상을 떠났다’ 고 요약할 수 있다.
《구름에 달 가듯이》의 몇 대목을 인용하면;
“물론 오래 전 일이다. 내가 젊은 청년시대라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어느 날 5월 오후다. 나의 사무실로 한 여인이 찾아왔다.
내 생애에 결정적인 운명의 발길이 이처럼 우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을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연한 하늘빛 갑사치마 저고리를 입은 그녀와의 대면을 나는 극히 사무적으로 대했을 뿐이다.
하지만 훗날의 그녀와의 재회는 더욱 극적이었다.
화약 냄새가 감도는 거리의 모퉁이에서 나는 우연히 그녀를 발견한 것이다.
눈발이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놀라움과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갸름한 얼굴에 흰 이빨이 곱게 웃고 있었다.
“살아 계셨군요. 무척 염려했어요.” 그녀의 인사였다. 전세(戰勢)는 우리에게 반드시 유리할 것만 같지 않았다.
조그만 사건이 생겼다.
그녀가 중重하게 앓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거처를 알 길이 없었다.
이듬해 봄이 되었다.“
햇빛이 범람하는 아스팔트의 저편에서 한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하얗게 소복한 여인은 햇살을 등으로 받으며 불꽃에 싸여 있었다.
그녀였다. 세 번째의 우연한 해후(邂逅).
운명은 끝내 우리에게 그 신비스러운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무척 수척해 보였다.
“박 선생님 하룻밤만 제 병실을 지켜 주시지 않겠어요.”
그녀의 병실에는 개나리가 꽂혀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불꽃처럼 명랑하고 생기가 타올랐다.
나는 그녀의 머리맡에서 밤을 밝혔다.
고르고 편안한 그녀의 숨결을 조용히 지키며 밤을 새운 것이다.
새벽은 찬란했다.
하지만 그 후로 나는 새벽에 일어나 통곡할 줄은 깨닫지 못했다.”
나의 목마른 인생 역정의 이 쓰라린 경험은 나의 인생관을 변하게 하고,
<나>라는 사람을 변하게 하였다.
그것은 홀로 울고 어쩌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하얗게 재가 되어 삭아내리게 되었으며,
사실 나의 슬픔은 이별이 끝난 뒤부터 시작되었다.
(후략)
- 《구름에 달 가듯이> (1979년 판에서 발췌)
작곡가 김성태씨의 <이별의 노래>에 대한 회고
작곡가 김성태(金聖泰)씨는 <이별의 노래> 작곡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부산에서 대구의 박목월 시인을 만나러 갔다.
학(鶴)과 같은 박 시인의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여름이었다.
박 시인은 “기다리고 있었소.”하고 그를 반가이 맞았다.
박 시인은 전할 것이 있다고 했다.
- <이별의 노래>였다.
김성태씨는 “그 시를 읽고 무척 감동했습니다.”하고 그때의 감동을 되새겼다.
그는 그날 밤 곧 작곡에 착수했다.
분지인 대구의 더위는 살인적이다.
그는 여관방 모기장에 드러누어 떠오르는 악상(樂想)을 다듬어 갔다.
“모기장 빛깔은 핑크였죠.” 김씨는 쓴 웃음을 짓는다. 20년전 한 밤을 샌 여관방 모기장 빛깔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이별의 노래>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이 가곡의 작곡 과정은 그의 정신세계에 중요한 흔적을 남긴 것이다.
박목월씨는 “그 당시 우리 민족은 절망과 죽음의 그림자 속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나는 김성태씨와 헤어졌습니다.
시대적인 분위기에 나의 개인적인 체험이 오버랩 되어 이 시가 만들어졌죠.”
이런 배경 아래 작곡된 <이별의 노래>가 처음 연주, 발표된 곳은 부산이다.
김씨가 지휘하던 해군 군악대와 대학생들로 만들어진 합창단이 이 가곡을 연주, 합창했다.
그 시대 감정을 표상하는 것 같아선지 이 가곡은 금방 사람들의 가슴 속에 파고 들었다.
- 《봉선화에서 무덤까지》(지철민, 심상곤 공저, 무궁화사, 1973)
※
김성태 작곡집(도서출판 예음, 1991)에는 물론 다른 음악관련 자료들에도
<이별의 노래>의 작곡 연도는 모두 1952년으로 나와있다.
그러니까 <이별의 노래>가 작곡된 것은 1952년 여름, 시가 쓰여진 것은 그 이전이 된다.
1954년의 H양 사건과는 시간적으로 불일치 한다고 할 수 있다.
목월 시집에 없는 <이별의 노래>
우리가 노래로 부르는 목월의 <이별의 노래>는 목월의 시집에 없다.
앞서 말한 대로 《구름에 달 가듯이》란 제목의 목월의 산문집 속에 실려있을 뿐이다.
가곡 <이별의 노래>와 관련한 평전의 이야기는
누군가들이 상상력을 발휘해 만들어 낸 재미있는 창작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때 쓰여졌던 누구를 대상으로 썼건 무슨 상관이랴.
그 詩와 음악이 우리의 마음을 적시는 것은 모두가 그러한 상황과 그같은 심정에 공감하기 때문 아닌가?
목월은 1978년 3월 24일, 새벽 산책길에서 돌아온 후 고혈압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우리 나이 63세였다.
사랑하던 이들을 떠나보내고, 홀로 시(詩)속에서 이별의 슬픔을 노래하던 박목월도
어느날 그들처럼 저 하늘로 갔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했던 것처럼.
‘너도 가고 나도 가는 것’, 그것은 그리움과 슬픔의 끝이며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본문 출처 :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이라고만 돼 있어서 누가 쓴 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박목월 이별의 노래 그 뒷 이야기
박목월은 노년이 되여서 H라는 옛사랑을 찻아간 이야기를
<종말에 의미> 라는 수필을 남겨 놓았다.
지금부터 재밌는 그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다음 글을 보면 박목월은 H양을 피해 제주에 내려와
궁여지책으로 교사를 하고 있었고 후에 H양이 따라 온 것 같다.
[ 그녀가 바다를 건너왔을 때, 나는 당황했을 뿐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길을 걸으며 궁리해 보았지만
숨어서 살 곳이 이 세상에는 없을 듯 했다.
눈물에 젖은 그의 긴 눈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얼굴을 외면한 채 말이 없었다.
- 수녀가 되지요.
그리고 그녀는 가버렸다.
차창에 얼굴을 부비며 울고 떠났다.
그 후로 소식이 막혔다.
산과 바다와 구름이 가로놓인 채 어언간 삼십여 년.
가을비가 뿌린다.
숙연하게 내리는 빗소리에 문득 붓을 놓고 귀를 기울인다.
이제 인생도 살만큼 살았다.
지난 시간보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더욱 짧을 것이다.
다시 그를 만날 기회는 없을 것이며, 만나도 서로의 얼굴조차 기억할 것인가.
그 후로 나의 회한의 강물도 흐를 만큼 흘러버리고, 바닥이 드러났다.
이렇게 우리의 인연은 영영 그쳐버릴 것인가.” ]
그리고 박목월의 아내 유익순(97년작고 78세)은 '밤에 쓴 인생론'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남편이 30대 말기에 여성문제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지만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치러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다짐했고
종국에는 가정으로 돌아오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와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다만 하나님만 의지해서 참고 기다렸다 ] 고.
목월은 제주에서 헤어진 후 오랫동안 이 여인을 잊지 못했다.
1960년대초에 쓴 그의 일기에서 이런 대목이 나온다.
[12월 10일(일) 맑음
내세(來世)를 믿느냐 - 이것은 지난 목요일, 수도여대에서 어느 학생이 질문한 말이다.
너무 엄청난 질문이므로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나는 꼭 같은 질문을 한 10년 전에 내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물어본 일이 있었다.]
내세는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 산다는 미래의 세상,
아마 현실에서는 이룰수 없는 사랑 이야기를 죽어서라도 같이 살자는 뜻이다
목월이 서울에 돌아온 후
H양을 떠 올리며 쓴 시로는 주장 할 수는 없지만
눈물의 Fairy (Fairy는 요정妖精의 뜻)로 알려져 있다.
눈물의 Fairy
흐릿한 봄밤을
문득 맺은 인연의
달무리를 타고
먼 나라에서
나들이 온
눈물의 훼어리.
(손아귀에 쏙드는 하얗고 가벼운 손)
그도
나를 사랑했다.
옛날에
흔들리는 나리꽃 한 송이······
긴 목에 울음을
머금고 웃는
눈매
그 이름
눈물의 훼어리······
그리고 박목월은 이별의 노래가 여대생 H양과의 이별을 노래한 것이란 소문은
오래 전 부터 듣고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자신의 책《구름에 달 가듯이》(1973년, 1979년 삼중당)에 <이별의 노래>를 짓게 된 동기를 써 놓았는데
다소 추상적이였다.
이별의 노래가 H가 아니고 오래전 부터 알고 있는 또 다른 여인이라는 추측도 있지만
박목월은 <구름에 달 가듯이>의 몇 대목을 인용하면,
[ 세상에서 널리 불려진 이별의 노래에서
내가 노래한 상대가 누구냐 하는 질문은 어리석은 일이다.
자기 평생에 가장 소중한 이름 하나를 감출 줄 모르는,
헤프고 어리석은 바보도 없을것이다.]
라고 말했다
목월은, “30년 가까운 세월의 저편 끝에서 찾아 오는 한 사람의 나그네 같은 심정이었다” 했던
‘종말의 의미’란 그의 글에서 그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 내가 그녀를 방문한 것은 눈발이 내리는 날이었다.
백발이 되면 죽기 전에 한 번쯤 만나보고 이승을 하직하려니 하고
젊은 날에 마음 속으로 다짐하던 그녀를 찾아가게 된 것이다.
물론 내가 벼르던 만큼 백발이 된 것은 아니다.
문이 열렸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막혔던 하나의 통로가 이제 열리는 것이다.
미소를 띤 그녀의 모습, 문득 나는 외면해 버렸다.
외면해 버렸다기보다 고개가 절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왜 외면해 버렸을까! 나도 모를 일이다.
유리창에는 여전히 눈발이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미소를 띤 채.
그렇다. 나도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 미소를 띤 채 서로가 건너다 보기 위하여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세웠으며
또한 얼마나 나 자신을 채찍질해야 했던가.
하지만 그것은 지난 일이다.
지금 그녀와 나는 서로 미소 띤 얼굴로 물끄러미 건너다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일어섰다. 이제 하직해야 할 때가 이르게 된 것이다.
이승을 떠나기 전에 꼭 한번 다시 만나 보려던 젊은 날의 그 새롭고도
눈물겨운 결심을 이루게 된 오늘의 나의 발걸음은 무척 허전하고도 가벼웠다.]
박목월과 H양과의 해후
그로 부터 30년이 지난 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 老시인이 된 박목월은
옛날 자신이 사랑했던 여대생의 집을 찾아 나선다.
이미 그녀도 결혼하여 중년 여인이 되어 있었다. 어린 아들도 있었다.
창밖에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 보며 두사람은 응접실에 마주 앉아 있었다.
차를 마시면서 그다지도 많은 말을 나누지는 않았다
"늘 선생님 소문만 듣고 있었습니다. 몸이 많이 불편하시다는 말씀을 들었기에......."
중년 여성이 된 그녀는 가만히 입을 열어 말했다
박목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밖에는 소담스러운 눈이 내리고 있었고
박목월은 가족 이야기를 물었고 중년 여성은 간단하게 대답 하였다
서로 가족이야기로 몇마디 나누고 나니 할 말이 없다
별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두사람은
30여년 동안 얽힌 사연들을 마음으로만 그냥 주고 받았다.
차 한잔을 마신 후 박목월은 일어섰다
"몸조심 하세요"
중년 여성이 말했고 박목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골목길을 벗어 날 때 박목월은 그녀를 보기위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중년 여성은 그때까지 대문간에 서서 이쪽을 바라 보고 있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그 눈발사이로 그녀의 모습은 점점 지워져 가고 있었다.
사랑...... 그것이 사랑일까.
이룰 수 없는 그들의 인연은, 아니 두사람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였다
윤리적으로 볼 때 분명히 불륜이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눈처럼 순수했다
너무 깨끗하여 불륜이란 단어조차 아름답기에 사랑이야 말로 인간으로서의 가장 순수한 향기이다.
- 엄광용 《사람의 향기》에서.
목월은 이승을 떠나기 전에 꼭 한번 다시 만나 보려던 그 결심을 이룬 이 극적인 해후의 뒤에
방문(訪問)이란 제목의 다음과 같은 詩를 남겼다.
방문(訪問)
이제 그를 방문했다.
겨우 쓸쓸한 미소가 마련되었다.
겨우 그를 방문했다.
이제 내가 가는 길에 눈이 뿌렸다.
그는 집에 있었다.
하얗게 마른 꽃대궁이 그는 나를 영접했다.
손을 맞아 들이는 응접실에서.
그의 눈에는 영원히 멎지 않을 눈발이 어렸다
나의 눈에도 눈발이 내린다
사람의 인연이란 꿈이 오가는 통로에
가볍게 울리는 응답(應答).
차가 나왔다
손님으로써 조용히 드는 담담하고 향기로운 것이
팔푼쯤 잔에 차 있다.
이제 그를 방문했다.
겨우 쓸쓸한 미소가 마련되었다.
겨우 그를 하직했다.
하직 맙시다.
- 출처: 《박목월시전집》이남호 엮음, 민음사, 2003]
그리고 H를 만나고 난 뒤 목월은 1978년 3월 24일 새벽
산책길에서 돌아온 후 63세의 나이에 고혈압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박목월이 예순 셋에 죽었구나. 딱 내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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