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14. 19:20ㆍ이런 저런 내 얘기들/내 얘기.. 둘
인간은 현생인류로 진화하기 전부터 단백질을 얻기 위해 사냥을 했다. 누구나 사냥을 할 수 있었고 주변의 산과 들은 모두를 위한 사냥터였다. (……) 그러나 제후들이 땅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고 주인 없는 땅이나 공유지에 대한 권리를 강하게 요구하면서 사냥은 제후들만의 배타적인 권리가 되었다. 그러자 권리를 상실한 농민들은 육류 섭취에 큰 애로를 겪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냥을 나서는 영주 일행을 위해 온갓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해야 했고, 개도 빌려줘야 했다. 농민이 몰래 사냥을 하다가 들키면 강제노역에 처해지는 등 가혹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이런 억압과 불평등에 얼마나 한이 맺혔던지 독일 농민전쟁(1524~1525) 당시 농민들의 주된 요구사항 가운데 하나가 '사냥과 고기잡이의 자유'였다.
개인에게 본능이 있듯이 집단에게도 본능이란 게 있는 거야.
둘 셋이 모여 공동체가 되고 나면 필연적으로 리더가 생기기 마련이고,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게 되어 있어.
그러니까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조는 필연적으로 생겨난단 말이지.
피지배자가 다수의 힘으로 잠시동안 상황을 역전시킬 수는 있겠지만, 시간문제일 뿐,
반드시 또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서 지배· 통솔하는 법이거든.
그래서 내가 집단의 본능이라고 한 것이지. 독선과 폭력이 지배 수단, 즉 권력의 속성인 것처럼.
바로 이것이 아나키즘이 더 나아갈 수 없는 한계더라는 것이지.
아나키즘
(출처. 위키백과사전)
아나키즘(anarchism)은 모든 정치적인 조직·권력 따위를 부정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데올로기 또는 이를 전파하고 실현하려는 운동으로, 無政府主義라고도 불리지만,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다며 이런 표현을 사용하기 꺼려한다. 대신에 그냥 '아나키즘' 또는 '자유연합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역사에서는 고대의 공동체에서 비롯하여 갖가지 공동체나 고대의 철학, 사상에서도 연원을 찾아 볼 수 있으나 근대에 이르러 자본주의와 권위주의 폐해에 대한 반발로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함께 발흥하였으며 페미니즘, 펑크문화 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아나키즘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장점을 포용하는 중용이념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자유주의 분파사상으로 보기도 한다.
1 사상
아나키즘은 그 특징때문에 다른 사상들과 달리 정의내리기가 매우 까다롭다. 일반적으로 아나키즘은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을 말하며, 이 외에도 다양한 성향이 있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일어난 만큼 평등을 중요하게 본다. 하지만 현대의 일부 아나키스트들이나 개인주의자들은 평등보다는 자유를 중요시 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국가와 권력에 대한 반대로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기에 공산주의와 대립한다. 이와 같은 평등과 자유를 추구하기에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모두를 반대하고 있다.
19세기 후반에는 공산주의와 세를 다툴 만큼 세계 도처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권력이 부여되는 조직 자체를 부정하는 성향으로 차츰 세력을 잃었지만, 혁명 운동이 일어난 어느 곳에서나 아나키즘은 자유와 평등을 외치면서 살아났다. 대표적인 아나키즘의 투쟁은 파리 코뮌, 에스파냐 내전, 그리고 프랑스 학생혁명이며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에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참가 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발흥한 니힐리즘과의 차이점은 허무주의가 구제도 모두를 부정하고 철저한 파괴를 주장하면서도, 새로운 사회에 대한 대안이 없었으나 이에 반해 아나키즘은 새로운 대안을 공동체 자치에서 찾았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는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파괴나, 몰락후의 계획 경제를 대안으로 하였으나, 아나키즘은 계획 자체를 부정하고 공동체 내의 자립, 자치, 자영 경제를 대안으로 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2 역사
정치적 아나키즘의 탄생은 윌리엄 고드윈이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받아 저술한 《도덕과 행복에 대한 정치정의의 영향에 대한 연구》가 출판된 1793년으로 간주되며, 고드윈은 이 책에서 모든 형태의 정부를 개인의 개화를 가로막고 부패로 이끌 뿐이라고 비판했다. 막스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은 헤겔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으며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맡았지만 그 당시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아나키사회를 위계질서와 권위가 부재된 것으로 간주했으며, 권위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종교, 국가, 군대 등이 권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개인의 자유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3 흐름
아나키즘 운동에는 크게 세 종류가 존재하는데,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환경주의적 아나키즘이 있으며 환경주의적 아나키즘은 최근에 생겨난 조류이다. 현재 다양한 아나키즘 이론이 공존하고 있으며, 아나키스트로 자신을 정의하는 집단들 가운데서도 전략, 전술, 조직, 정치철학, 경제학, 사회학적인 면에서 대립하는 경우가 많다.
(1)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혹은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는 상홓혜주의, 공산주의, 노동조합주의 등의 형태로 나타나며, 아나키스트 사상계중 제일 많은 세력을 보유하고, 아나키스트들의 주요사상으로 남아있다. 보통 아나키즘하면, 이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을 의미한다. 사유재산의 말소와 생산수단의 공유를 주장한다.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은 프루동에 의해 최초로 시작되었으며 후에 바쿠닌과 그의 추종자들은 제1인터내셔널에서 중요한 세력을 형성했으나 칼 마르크스와의 대립으로 바쿠닌이 국제당에서 축출된 이후 독립된 세력이 되었다.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와 권위주의에 대항하며 공동체주의와 자유지상주의적 연방주의 등의 형태로 사회주의와 개인주의 사이의 다리 역할로 간주된다.
하위분류로 다음과 같은 분파들이 존재한다.
(2)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자유지상주의적 개인주의는 사유재산의 소유를 인정한다. 이들에 따르면 권위주의 조직은 민중의 외면 속에서, 혹은 투쟁의 결과로 사라져야 하는 존재이며 이것은 사회에 의해 억압받는 개인의 자유를 위한 중요한 요소로 본다. 국가에 대한 견제 목적으로 개인들 사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중간적 조직들은 군대를 조직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국가적"인 조직이 되지 않는 한 올바른 것으로 본다.
(3) 환경주의적 아나키즘
환경주의적 아나키즘은 모든 형태의 산업화 경제와 자연의 파괴를 거부하며, 산업화를 주장한 공산주의적 아나키스트들에도 반대한다. 현재 아나키즘의 세 번째 극으로 자리 잡혔으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한다. 산업화와 기술의 지배를 거부하며 원시적 사회로의 회귀를 주장하기도 한다.
(4) 그외의 흐름
아나키즘에는 그 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분파들이 존재한다.
4 결론
아나키즘의 다양한 성향들은 개인의 자유가 노동조합, 공동체, 법, 정부를 비롯한 어떤 조직의 권위에도 억압받지 않는 자유지상적인 사회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학, 철학, 문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영감을 얻은 흐름들이 등장했으며, 이들은 때로 고전적 자유지상주의를 전적으로 거부하기도 한다.
아나키즘의 배경이 되는 철학의 다양성은 아나키즘 내의 다양한 흐름의 존재에서 드러나며, 이 때문에 동일한 목적을 가진 아나키스트들이라고 해도 그 강령적인 부분에서 서로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하나의 통일된 운동을 형성하지는 못한다.
5 아나키스트
한국의 아나키스트로는 이회영, 유자명, 백정기, 정현섭, 박열, 하승우, 김종진, 유림, 하기락, 구승회, 박홍규 등을 들 수 있다.
외국에서는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미하일 바쿠닌, 표트르 크로포트킨, 레프 톨스토이, 머리 북치느 옘마 골드만, 노먼 촘스크, 미셸 푸코, 막스 슈티르너, 벤저민 터커, 간디, 파울 파이어벤트 등이 잘 알려진 아나키스트이다.
아나키스트 단체로는 흑색 공포단, 의열단, 한국 자주인 연맹,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 조선에스페란토문화사, 조선노동동호회, 흑전사, 선구독서회, 남화한인청년연맹, 흑기연맹, 흑로회, 흑우연맹 등이 있다.
한국의 초기 아나키스트로는 이을규 이정규 형제, 장자명 등이 있으며, 이회영은 臨政을 거부하고 아나키스트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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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전쟁의 세기였지만, 가장 많은 사람이 살해된 전쟁은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국가와 자국민 사이의 오랜 전쟁이었다.“
- C. Douglas Lummis -
과거 국가란 국왕의 확장으로 이해되었으며
그 국왕의 절대적 권위는 ‘신의 명령’,
즉, 기독교적 원리에 의해 뒷받침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세계가 저물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지배 계층은 자신들의 지배를 뒷받침할 새로운 이론이 필요했고
당시 국왕의 통치 정당성을 뒷받침 해준 것이
바로 홉스나 루소하면 함께 떠오르는 ‘사회계약설’입니다.
17세기 과학의 시대 토마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을 통해
새로운 정치 신화를 만들어 내었고
그 신화는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효하지요.
사회계약설은 실로 근거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
논리적 비약으로 얼기설기 이어진 하나의 가설로
당시 그 이론을 접한 영국 국왕은 택도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나
기독교의 권위가 점점 저물어 가며
왕권신수설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회계약설은 시간이 지나 대의제를 기본으로 하는
오늘날 민주주의 이론의 근간으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되었지요.
..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논리를 통해
개인의 권력의 정부에 넘겨주면,
정부가 사회의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런 논리는 애초 이야기의 선후가 바뀐 소설에 불과합니다.
인간들은 무정부 상태를 경험한 기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정부 상태가 정말 아비규환의 생지옥인지 파악할 방법도 없습니다.
오히려 국가가 형성되면서 국가에 의한 거대 폭력들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가 폭력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아마 인간 본연의 생존 욕망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권력의 핵심인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화심리학이나 신화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겠지만
단지 표면적 국가 권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근대 국가 형성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모든 계약은
수평적 관계에서 평등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국가에 위탁한 적은 없지요.
투표를 통한 민의의 반영이라는 것도
정보와 지식의 불균형 속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아는 것이 힘!이라고 생각할 때,
지식의 불균형 자체가 민주주의 이념에 역행하는 것이지요.
결국 정보의 불균형 속에서 모든 민주주의적 계약은
권력자들의 의지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
민주주의 정치 제도의 허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미국의 건국 초기 이야기를 꺼내볼까 합니다.
미국은 건국 초기에 알렉산더 해밀턴을 중심으로 하는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공화당의 토머스 제퍼슨파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워싱턴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을 맡고 있던 알렉산더 해밀턴은
강력한 중앙집권의 연방주의를 주장하며
상공업과 금융의 발전을 추구하고 있었고
국무장관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은
영국의 사례를 들며 금융자본의 확장의 경계하고
탈중앙화한 농업중심의 공화국으로 발전할 것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반연방진영의 정치인들은 연방진영의 해밀턴, 매디슨 등의 의도가
일반 국민들이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 판단하고
대대적인 반연방주의 운동을 펼쳤으나 대중들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대중들은 늘 현실적인 약속보다 그럴듯한 허상에 더 끌리기 마련이니까요.
어쨌든 반연방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연방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국가는 지나치게 비대해질 수밖에 없고
지나치게 커진 국가는 민의를 제대로 수렴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국가에서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은
결국 선거로 뽑은 국왕에 불과하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일반 대중들에게
그런 정치적 이해를 요구하기는 무리였습니다.
일반 대중들의 눈에는 막강한 미합중국의 이념이
느슨한 농업국가보다 더 멋지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나마 상황이 역전되어 반연방주의자인
토마스 제퍼슨이 3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1794년 영국과의 John Jay's Treaty(존 제이 조약)이
공화국 프랑스보다 군주제 국가인 영국에 더 공감을 표시하는 정책임이 알려지면서
연방당주의자들이 '독재주의자(Monocrats)'의 이미지를 얻게 되고
반연방주의자들은 이 기회를 틈타 자신들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Lovers of Liberty)'로 홍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반연방주의자들의 정치적 이상은 현실 정치에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연방주의자들의 헌법이 미합중국의 헌법으로 채택되어
‘민주주의파’의 확장을 저지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당시 ‘민주주의’ 개념은 수십 년간
반대파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졌지요.
그러나 183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은 스스로를 ‘민주주의’국가로 부르기 시작했고
민주주의의 정의가 국민들의 정치참여와 느슨한 국가권력의 개념에서
대의제도의 확립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적으로 참정권이 확대되어 가면서
대의제도의 확립이 민주주의 확장으로 더욱 확고히 자리를 잡았지요.
이렇게 민주주의의 이념에 변화가 오게 되었고
오늘날 민주주의의 국민의 직접적 정치적 참여보다는
대의제도라는 민주적 절차의 확립으로 축소되었던 것입니다.
..
17세기 영국혁명의 시대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 발전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은
바로 참정권의 확대 여부입니다.
17세기 영국의 평등주의자들인 ‘수평파’ 조차도
사유재산(토지)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을 매우 우려했습니다.
만약 민주주의 이념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사유재산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참정권을 주면
결국 사유재산을 평등화하고자 하는 정치인이 권력을 잡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고민은 19세기에도 똑같이 이루어지는 데,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이 참정권 확대에 두려움을 느낀 이유는
다수인 노동자들이 참정권 확대를 통해
자본가들의 권력이 위축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들 아시겠지만 참정권 확대가
사유재산의 평등화나 자본가들의 규제 확대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참정권의 확대는 별 이견 없이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받아들여졌지요.
지배계급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참정권을 제약하고 있다는
노동자와 지식인층의 비난을 피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참정권을 확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거의 잃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동시에 민주주의의 확장이라는 그럴듯한 명분도 얻게 되었습니다.
..
그렇다면 왜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을 위해 투표를 했던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가난한 노동자들도
언젠가 자본가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좀 더 본질적인 부분에서 접근하자면
지나친 경제적 자유가 만든 경제적 불평등이
정치적 평등을 해체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경제적 불평등은
정치적 권력의 불평등한 배급을 이루어 내고
그로인해 노동자들은 서로가 같은 노동자라는 연대의식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되었던 것이지요.
자신에게 주어진 약간의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특권을 지키기 위해
마땅히 위를 향한 저항의 형태로 표출되어야 할 힘이
반대로 아래를 향한 억압과 착취의 형태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노동자가 같은 노동자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평등선거의 이상적 이념은
그 힘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됩니다.
힘없고 가난한 노동자조차도
무언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을 것을 얻기 위해
적극적 행위로서 투표를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작은 것을 지키기 위해
소극적 행위로서의 투표를 하게 되니까요.
지배계급 관점에서도 참정권을 확대할 수 있었던 이유도
어떠한 이상적 민주적 정치이념을 신봉해서가 아니라
지난 100년간의 지속적 교육의 결과로
대의제도를 확대한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우려했던
노동자들이 재산의 평등화를 시도 따위는 없을 것이란
확신이 섰기 때문인 것입니다.
특히 그들은 지속적 교육을 통해
평등의 개념이나 민주주의 개념을 왜곡시켰는데
예를 들어 결과로서의 평등의 의미는 없애고
‘기회의 평등’이라는 개념을 노동자들에게 주입시킨 것도
의도적으로 왜곡된 교육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기회의 평등’이란
기회주의자들의 그럴듯한 논리일 뿐으로
어느 정도 결과적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기회의 평등’이란 결국 사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정말 기회가 평등하다면 결과도 어느 정도 평등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만 보아도
12년간의 지속적인 학교교육을 통해
우리가 매우 발전한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시스템적 가치는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이러한 시스템의 잠재적 위협 요인들, 예를들어 종북 좌파들은
당연히 척결 제 1순위가 되곤 합니다.
민주주의의 이념 자체가 다양성의 인정에 기반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원수도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이념이 타종교에 만은 예외인 것처럼
자신들이 믿는 민주주의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 주장들에게는
민주주의의 포용성은 적용되지 않으며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가차 없는 잔혹한 폭력을 가하게 됩니다.
..
진정한 민주주의란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폭력에 매우 엄격한 잣대를 가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민주주의 국가는
정치적 의사표현의 한 형태인 테러행위나
나름의 정치철학적 기반을 갖고 있는 사회 전복운동에 대해서만은
그 철학적 타당성을 검토하지 않고 절대적인 악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례로 오늘날 테러행위에 대해서는
그것이 사법당국이 처리해야할 범죄행위인지
아니면 국제법을 따라야할 전쟁행위인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단 누군가가 테러리스트로 지명되면
그 사람은 사법제도의 보호는 물론
국제법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심각한 인권 사각지대에 놓이게 됩니다.
이쯤되면 인권보호를 위한 영국의 사법제도 도입 이전의
‘시련에 의한 재판(Trial by Ordeal)' 제도와 다를 바 없는 것이지요.
이처럼 민주주의 전복세력에 대해서는
민주적 사법제도 발전 과정에서 도입된 여러 제도들의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국민을 보호하고 그들의 행복을 증진해야 될 민주적 국가들이
일단 어떤 국민이 이단이라고 판단되는 순간
그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좀 다른 얘기입니다만 배심원 제도를 도입하지 않고
국가 사법 권력을 대표하는 판사가 일방적으로 판결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민주적 사법 제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법을 어긴 시민은 더 이상 시민으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나친 생각은 아니겠지만
누구나 잠재적 범죄자이며 잠재적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비정상적인 국민을 향한 국가의 폭력은
어떠한 이유와 명분에서건 위험한 것임에 분명합니다.
..
민주주의 시스템이란 그 자체가
탈권력적인 정치적 이상을 갖고 있는 것이나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는
자신의 시스템에 위협이 되는 이념과 신념에 대해서는
매우 권력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지키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이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 지키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외피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시장 권력’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시장 권력의 확대와 궤를 같이 해온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러한 민주주의는 시장이 위협을 받는 순간 폭력적으로 돌변하는데,
과거 공산주의라는 반자본주의 괴물에 맞서
스스로 더욱 막강한 괴물로 변신한 파시즘이 그 예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겉으로는 온화하고 평온한 것 같지만
일정 이상의 스트레스가 주어지면 순식간에 헐크로 변하는
브루스 베너 박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지요.
..
헌법은 민주주의 시스템을 이상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헌법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고,
직업 선택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지만
그러한 보장은 헌법상 이념이 불과할 뿐이지
현실에서는 제대로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실례로 한국의 젊은 남성들은 모두 국방의 의무를 져야하는데,
국방의 의무 앞에서 자신의 행복추구권이나 직업 선택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외쳐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국방의 의무가
그 어떤 의무보다도 더 신성한 가치가 있다는 이유로
대체 복무 제도를 도입하지 않고 있습니다.
덕분에 0.2%에 불과한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어쩔 수 없이 전과자로 전락하게 되지요.
더 답답한 일은 그렇게 성스러운(?) 국방의 의무를
우리사회의 기득권 계층의 자제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피해가고 있다는 사실이겠지요!
어쨌든 오늘날 어느 나라에 살던지
단지 4년이나 5년에 한번 돌아오는 선거를 통해
자신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정기적으로 확인할 뿐,
개개인이 현실 속에서 사회에 변화를 주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나마 대의제도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들이
좀 더 깨끗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지요.
이렇게 무기력한 시스템을 과연 진짜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또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지나친 경쟁추구는
정치적 약자들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약화시키게 됩니다.
민주주의의 정치적 자유 개념이 사유재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경제적 자유의미로 왜곡됨으로서
자본주의의 착취 시스템이 매우 민주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을 받아들여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환경에서는 대부분의 경제 문제가 본질상 정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경제 문제는 경제로 풀어야 한다는 논리가 지배하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느정도 평등한 상태가 아니라면
제대로된 민주주의는 절대로 구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는
사실상 금권정치로 타락하면서
투표제도는 단순한 형식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투표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일종의 희망고문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제도에서는
투표로 세상을 바꿀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의미 있는 사회적 변혁도 불가능 합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최종적인 정치 이상향으로 오해되고 있는 덕에
경제 시스템은 허울뿐인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의 그늘 밑에서
민주화를 피해 생존, 기형적으로 발전해 올 수 있었습니다.
즉, 오늘날 경제 시스템은 전혀 민주화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오늘날 경제 시스템 속에는 왕도 존재하고 귀족도 있으며
무소불위의 성직자 계층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유시장의 이념 하에서
사법당국의 제대로 된 보호조차 받을 수 없지요.
오늘날 정치인들과 자본가들은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경제발전의 필수 과정으로 홍보하고
그 피터지는 Arena에서 살아남은 검투사들을
영웅으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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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기성 세대는 심각한 한국 정치 상황을 언급하면서
정치에 관심이 없는 대학생들의 현실을 한탄하지만
어떻게 보면 대학생들이 격렬한 데모를 하던 80년대까지는
아직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 완전히 자리잡지 못한 애매한 상태였다고 봐야합니다.
반대로 오늘날의 자본주의화 된 민주주의 시스템 속에서
국민들로 하여금 어떠한 의미 있는 정치적 활동을 기대하기는 무리입니다.
언제 짤릴지 모르는 직장에 매여 있는 기성세대는 물론
취업에 시달리는 대학생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의미 있는 정치적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실현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애초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양립할 수 없는 대립적인 개념인 것입니다.
(그나마 사민주의적인 이상이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기본원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적 이념을 추구하고 있는 현실적인 시스템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과 믹스된
허울뿐인 민주주의 정치 이념은
단지 자본주의의 착취와 억압을 감추고 변명하기 위한
이론적 도구로 전락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수순한 정치적 노력의 형태를 띠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정치를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경제의 민주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경제 구조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는
민주주의를 향한 그 어떠한 진정성 있는 노력도
의미 있는 결과를 맺기 어렵습니다.
프랑스 혁명에 의해 정치형태는 민주화 되었으나
경제 형태는 여전히 민주화되어 있지 않다는 막스의 주장은
21세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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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경제를 민주화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앞서 언급한 더글러스 러미스는 그의 저서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에서
‘대항발전(counter-development)'의 개념을 제시합니다.
그가 말하는 대항발전이란 발전의 대상이 경제가 되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인간사회 속에서 경제의 요소를 조금씩 줄여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즉, 경제 성장이 약속하는 허상을 거부하고
개인의 관점에서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자세한 내용은 그의 저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제가 오늘날 화폐시스템 자체의 변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부채를 통해 성장하고 그 과정에서 빈부의 격차가 커질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화폐 시스템에서 벗어나서
좀 더 민주주의 이념에 맞는 새로운 화폐 시스템의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화폐 시스템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저는 개인의 배타적 소유를 제한하고 상호 증여에 기반한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화폐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의 의미 있는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고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 실현과
자원과 환경파괴를 최소화하는 대항발전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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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참 아름답긴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유토피아적 관점으로 보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 본성상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오늘날의 시스템은 인간의 욕망의 방향을 따라온 것이고
인위적으로 그 욕망의 방향을 역행하는 시스템을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실패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건국초기 미국제헌의회에서 심각하게 논의된,
오늘날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여러 민주적 이념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경한 것이었듯이
오늘날의 모든 사회, 정치, 경제 시스템은
인간의 욕망의 결을 따라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욕망의 결을 역행하여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여부 또한
타고난 인간의 욕망이라는 신화에 얼마나 부합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스템의 뒷받침하는 교육의 성공 여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육이 인간을 만드는 모든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교육의 힘을 너무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토마스 제퍼슨을 필두로 하는 미국의 건국의 주역들이
정치 이념 홍보보다는 인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대학 교육의 확대에 더 심혈을 기울이 이유이며
오늘날 정치인들과 자본가들이 대학에서 인문학을 축소하고
대학을 직업 교육 시설로 바꾸고자 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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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타인의 욕망을 통제하는 것이 바로 모든 정치적 힘의 원천입니다!
그 정치적 힘은 때로 종교, 철학, 경제학, 정치학의 외피를 가지곤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교육은 자신의 원초적 욕망은 물론
타인의 욕망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의 당위성에 질문을 던집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의 산파법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통해
당시 젊은이들의 권력에 대한 자신의 은밀한 욕망과
국가 권력의 욕망이 실제로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그러한 사실을 알려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즉, 젊은이들로 하여금 지배 시스템에 대한 의문을 갖게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배계급의 욕망은 그토록 뚜렷하고도 강력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교육은 어떠한 이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받아들여지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며
그 교육의 가장 중요한 도구는 늘 철학과 역사, 그리고 문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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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경쟁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이렇게 확고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지난 200년간 자본주의 교육의 성공 때문입니다.
그 교육이란 인간을 사회화 시기는 과정을 의미하며
그 사회화 과정이란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욕망인
폭력성을 제어하고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소수의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의 욕망을 언제든 통제할 수 있는
방식을 취득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특히 진화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자연스럽게 발휘되는 폭력,
즉 착취에 대한 본능적 폭력을 매우 효과적으로 억제하는데 성공을 하였지요.
이 본능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본능인데,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은 착취의 과정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림으로서
원시 사회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었던 착취의 대상을 지워버리는데 성공합니다.
이제 착취에 대한 응징은 착취자가 아닌
자신이 착취할 수 있는 사람,
혹은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고,
시스템은 이러한 폭력성을 다양한 방법으로 정당화하거나
필요에 따라 희석시킴으로서 ‘폭력이 난무하는 비폭력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즉,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국가가 존재하는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존재하되
가시적으로 파악하기는 힘들어 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폭력사회! 우리는 그것을 현대 문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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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너무 길어졌군요.
이제 마무리해볼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폭력이 가시화 된 것은
국가의 형성과 그 궤를 같이 합니다.
즉, 홉스가 생각한 국가 이전의 잔혹한 무정부 상황은
국가 권력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소설에 불과합니다.
R. J. Rummel의 ‘정부에 의한 죽음’이라는 책을 보면
지난 100년간 국가에 의해 살해된 인간의 수는
무려 2억 명이 넘습니다.
그리고 이 2억명 중에서 무려 1억 3천만명이
국가에 의한 자국민 살해였습니다.
이쯤 되면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는
일반적 믿음에 충분의 의문을 가져볼만 한 것이지요.
실제로 우리나라만 봐도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250만명의 민간인들 중에서 적지 않은 수가
좌익을 처단한다는 미명하에 군경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제주 4.3사건 광주민주화 운동 등
국가에 의한 국민 살인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군사정권이나
일부 독재 정권, 혹은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로
오늘날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민주적인 정부를 갖고 있는 오늘날의 국가들이
독재자가 지배하는 국가보다 덜 폭력적이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이념에 경도된 민주국가는
자본주의 자체의 폭력성을 합리화시켜
자본가들의 폭력과 착취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합니다.
즉, 국가에 의한 명시적 폭력은 없는 대신
국민들을 자본가들의 은밀하고 지속적인 폭력에 노출시키지요.
한 달에 40시간을 일하고도 빈곤에 시달리면서
비난한 대상을 찾지 못해 결국 게으르고 무능한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노동자는
그 폭력의 생생한 피해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는
빈부의 격차가 늘어나는 것은 시스템 위협요인이기는 하지만
교과서에 나오는 허술한 민주주의 이념이
이러한 위협요인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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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는 매일 생존 투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회계약론자들의 소설 속에 나오는 무정부 상태의 인간들과 달리
속으로 피를 흘리고 사회적으로 살해됩니다.
업무 과정에서 과로로 죽거나 출퇴근 과정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는 사람들은
살해된 것이 아니라 다른 노동자로 대체되는 것으로 상계처리 됩니다.
(호르크하이머와 같은 후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표준화와 그로 인한 치환 가능성에 주목했지요.)
더글라스 러미스는 경쟁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기본적인 감정은
암묵 속에 존재하는 두려움이라고 말합니다.
열심히 쉬지 않고 일하지 않으면 가난뱅이가 될지도 모르고
집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공포!
병에 걸려도 돈이 없으면 병원에 갈 수 없다는 공포!
그러므로 사고방식을 바꾸고 싶다가도
결국에는 어떻든 일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개인적인 선택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이러한 공포를 경쟁이라는 미덕의
부수적이고 당연한 결과이며,
경쟁의 미덕이 너무 고귀한 것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그러한 두려움을 주지 않는 사회에 살아본 적도 없고
그런 사회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사회는 민주적으로 잘 운영되고 있는데
무능력한 내 자신이 문제다!로 결론지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우리가 진실을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당장 사회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진실을 아는 것이 오히려
자신의 삶을 더 고달프게 만들 수도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무언가 의미 있는 변화를 일구기 위해서는
불편한 진실이라도 진실과 마주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평생을 헛된 믿음을 갖고 살아왔기에
오히려 진실을 알지 못하고 죽는 것이
더 행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복은,
즉 헛된 믿음에 근거한 행복은
최소한 가장 사랑하는 자녀들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진실을 알았다고 판단된다면
콜로세움에서 적을 쓰러뜨리고 관객들의 박수를 받기 위해 분투를 할 때가 아니라
칼을 내려놓고 콜로세움 밖으로 나와 진정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진실을 알리는 빨간 알약은 늘 우리 앞에 놓여 있었지만
우리는 그 존재를 모르고 바쁘게 살아왔거나
아니면 그 존재를 알고도 당장의 두려움에 압도되어
감히 그 알약을 먹을 용기를 내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자신을 위해 살 용기가 없다면
여러분의 욕망의 결국 다른 누군가에 의해 지배될 것입니다.
[출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작성자 비빔밥
- bnqownlkwl 2015.10.02. 23:00 답글
- 이번글도 잘 읽었습니다. 현재의 "과학기술의 수준" 을 보면, 아직까지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적절히 조합시켜 상황에 따라 잘 활용할수있는 방법 (가상세계의 이미지를 인간 뇌의 어떤 공간에 가상좌표계를 만들어 투영시키는 개념)" 을 쓰지는 못합니다. 만약 인간이 만들 "어떤 인공적인 가상현실에 충분한 크기의 빅데이터를 저장하고, 그것을 인간 뇌의 어떤 지점의 가상디스크 (DNA컴퓨터) 로 광자와 주파수를 통한 전송이 가능하다면, 이것은 일종의 "구체화된 증강현실" 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적절한 비율로 섞은, 상당히 발전된 수준의 과학기술체계일것입니다. 어떤 철학자가 "모든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고 말했는데, "타인의 욕망" 이라는것이 사회시스템의 복잡한 제도일수도 있고, 사회의 구조적인 틀을 만드는 화폐시스템 자체일수도 있습니다. 비빔밥님이 이번글에서 말씀하신것처럼, "대항 발전" 과 같은 적극적, 획기적인 패러다임의 전환 없이는 서서히 쇠퇴해가는 현대문명을 구할 방법은 거의 없을것입니다. 하지만 대항 발전의 개념이 상당히 뜬구름 잡는것처럼 느껴질 가능성이 높기때문에, 개인적으로 과거 매우 가난했던 한국의 100년을 뒤돌아보며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생존을 위해 발버둥쳤는가" 에 대한 욕망의 크기변화 그래프를 봄으로서 "인간 생존본능에 대한 나름의 판단근거" 로 삼고있습니다. 바로 "대한민국 주식투자 100년사" 라는 책입니다.
"21세기 한국정치의 발전방향" 이 해방 이후 한국의 정치시스템을 구체적 단계에서 기술한 책이라면, "대한민국 주식투자 100년사" 라는 책은 "한국이라는 국가 내에서 시장권력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에 대해 설명하는 책입니다. (물론 이것은 제가 이 책을 읽으며 접근한 나름의 한 관점에 불과하고, 얼마든지 다른 해석도 있을것입니다) 1896년에 생긴 인천미두거래소부터 일제강점기때 조선인들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투기적 선물거래를 부추긴것부터, 한국전쟁 당시 대규모 전쟁비용을 대기 위한 이승만 정부의 대응과 1950년대 매우 투기 성향이 짙었던 국채거래방식, 1962년 주식시장의 대규모 결제불이행으로 인한 대혼란으로 정부가 긴급자금을 투입하고, 몇일 뒤 바로 화폐개혁을 감행한 "우연의 일치" 스토리, 1970년대의 건설주 파동과 1980년대 중후반에 이어진 코스피지수의 장기상승 등 (현재 이 부분까지 책을 읽음), 말씀하신것처럼 자본주의경제체제를 뒷받침할 법체계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해방이후~1980년대까지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시대였습니다. 특히 주식시장의 공정성을 담보할 어떤 규제가 체계적으로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십개의 증권사가 서로 편을 나누어" 끊임없이 주식시장의 변동성을 극대화하는 현상을 볼수있는데, 이것은 그당시 한국이 1960~1970년대 상장된 기업의 수가 현재에 비해 너무 적어서 증권사를 비롯한 개인 투기꾼들이 더욱 주식가격의 변동성을 고의적으로 키운것이라고 볼수도 있습니다.
1950년대에는 주식거래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고, 한국전쟁이 끝난후 이승만 정부가 "액면가의 10% 수준으로 떨어진 국채" 를 "일제 귀속재산 불하자금" 으로 사용할수있다고 선언한 직후, 헐값이었던 전시국채가격은 급등하기 시작해 1950년대 성행한 투기적 국채거래의 원인이 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이승만 정부의 보호 아래 전시국채를 대규모로 헐값에 사들인 몇개의 대기업군이 이 시기 불하된 일제 귀속자산을 집중적으로 사들여 현재 재벌그룹의 기반을 닦기도 했습니다. 국가의 시장감독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않을 경우, 국가는 의도적으로 증권시장의 과열을 부추기거나 (이승만 자유당 독재를 위해 국채시장의 거품을 묵인한것,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창당자금을 마련하기위해 주식시장거품을 끊임없이 키운것 등) 아예 하룻동안 있었던 국채거래를 전면 무효화하는 1.16 국채파동과 같은 사건 (이승만 정권) 이나 박정희 정권 당시 주식시장의 폭락을 막기위해 230억환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긴급자금을 수혈한것 (개인적으로는 이 당시 주식시장에 투입한 긴급자금의 규모가 엄청나서 몇일뒤 이뤄진 화폐개혁에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과 같은 매우 극단적인 조치들도 자주 발생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주식투자 100년사" 라는 책을 통해 편법과 갈취가 만연하던 암흑의 시대상황을 적나라하게 볼수있지만, 한편으로는 국채시장과 주식시장의 상관관계에 대해 한번 생각해볼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전쟁 직후에 정부가 파격적인 조치 (국채로 일제 귀속재산 매입 허용) 를 취하면, 그 선언 하나만으로 국채거래량은 전년대비 몇배로 급등할수있다는것입니다. 물론 이와 반대로 주식시장의 거래규모는 크게 줄어드는데, 결국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을 구체적 수준에서 바꾸기 위해서는 주식과 국채시장을 하나의 유기적인 통합시스템으로 봐야 나름의 대안책이 나올수있다는것입니다. 물론 금과 부동산, 외환이라는 변수까지 더해지면 의미있는 수준의 경제시스템 개혁은 거의 불가능할것이므로, 이 단계에서 "국가가 시장권력을 효과적으로 규제할수있는 실효성있는 규제들 : 다국적 투기자본의 이동을 감소시킬 정도의 상당한 인센티브 부여" 이 필요할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조치들은 상당히 획기적이어서, 개별 국가의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하고 "글로벌 공조" 가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최소한 G20의 규모는 되야합니다)
현대문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주요 자원들이 각국에 동일한 비율로 분포되어있지 않다는 현실때문에, 결국 상대적인 자원매장량 우위를 이용한 "약소국 착취" 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만약 강대국을 구성하는 대다수 국민들이 "생존을 향한 욕망이 반드시 한가지일 필요는 없다 (전세계적으로 화폐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바꿔도 자신의 생존에 위협을 끼치지않고 오히려 더 이득이 된다)" 는 것을 알게 된다면, 과연 자신들의 생명을 담보로 한 "전쟁" 을 쉽게 주장할까요? 결국 부채기반의 신용화폐시스템에서 시스템이 고장나면 유전지대를 약탈하기 위해, 또는 곡창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어쩔수없이 일어나는것이 전쟁의 주요 원인이라면 (그외 종교분쟁이나 인종갈등으로 인한 전쟁은 적절한 교육을 통해 해결할수있다는 이상적인 관점을 유지한다는 가정하에), 결국 "현대문명의 작동원리" 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인류의 운명도 결정될것이고, 만약 인류의 의식수준이 획기적으로 향상된다면 인류는 "또다른 100년의 발전" 을 볼수있을것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각 개인의 의식수준이 향상되어 사회를 더 나은 모습으로 바꿀때까지 기다릴수는" 없을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화폐시스템의 구체적 이해를 먼저 끝낸후에, 획기적으로 화폐시스템 자체를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바꾼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현대문명에 끼치는 영향은 상상을 초월할거라고 생각합니다.
- bnqownlkwl 2015.10.04. 11:59 답글
- 만약 전세계적으로 화폐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바꾼다고 가정하고, 은행 예금금리는 -15~10%, 대출금리는 -10~-5%로 고정시키는 국제금융의 틀을 확립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우선 마이너스인 은행 대출금리를 이용해 사채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P2P 시스템을 이용한 소규모 상호대출은 물론, 심지어 협동조합 형태의 조직적인 사채업을 핵심업무로 하는 그룹이 엄청나게 많이 생길것입니다. 마치 초저금리인 엔화를 대출해 신흥국 국채를 사들여 금리 차익을 수익으로 챙기는 현재의 상황이 제도의 형식적인 내용만 바꿔 그대로 재현되는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이 "0보다 큰 사채금리를 기반으로 한 그림자 금융 (제도권의 마이너스 금리체계의 입장에서 봤을때)" 을 그대로 방치할경우, 현재 중국의 그림자금융 거품붕괴를 걱정하는것과 똑같은 상황이 될것입니다. 그림자금융에서 붕괴가 일어나면, 제도권 금융도 큰 타격을 입게 되는것이죠.
따라서 각국 정부는 "과연 새로운 경제시스템의 핵심규칙에 마이너스 대출금리가 포함될수있는가" 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국민들에게 주기위해 최선을 다해야할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마이너스 대출금리의 기본 이념 (지향하는 가치의 방향) 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자" 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매우 큰 마이너스를 기록할 은행의 예대마진" 에 대해 초국가적인 대처가 필요하겠지만, 일단 기본적인 취지는 "지구의 자원을 최대한 재사용할수있도록 순환시스템을 구축하되, 모든 사람들이 단지 금융에 의해 기회를 차단당해서는 안된다" 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이념에 대해 "도덕적 해이" 라고 비난할 사람들이 많을것입니다. 무엇보다 노동의 가치를 숫자놀음으로 전환시키려는 행위가 고도로 분업화된 현대문명 자체를 붕괴시킬수도 있다며 반대할것입니다. 물론 단순히 화폐의 유통구조만 바꾸면 그럴수도 있겠지만, 각 개인의 대출신용평가기준을 비롯해 "소유는 무제한 허용하되 구매력은 제한하는" 획기적인 제도를 도입하면 불가능할것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은행 통장의 잔고와 각종 자산들을 모두 일시에 처분해서 쓰는 사람들은 사채에 몰린 경우 빼고는 매우 적습니다. 현재 소유하고 있다가 구매력으로 전환되는 통장잔고의 숫자들도 있지만, 그중 일부는 "잠재적인 구매가능성" 으로 존재하고 있을뿐입니다. 이러한 "구매 잠재력의 희미한 개념" 을 일종의 "행동경제학" 체계로 편입시켜 공식적인 제도권 금융의 핵심 규칙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각국 정부가 대출금리를 마이너스로 고정시켰다는 가정하에, 이러한 조치를 취한 이유는 "끝없이 커져가는 빈부격차를 더이상 보고있을수없어서" 일것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혁명" 이 성공한 상황은 오직 국민들의 실력행사에 의해서일것이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혁명이 성공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 국민들의 적극적인 국가 감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국민들의 국가 감독 방법" 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면, 단순히 현재 국회의 정기적인 국정감사와 비슷한 형식의 "국민감독위원회" 를 만들어 국가를 감독하는것은 전혀 실효성이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화폐시스템 자체를 바꾼다는것은, 단순히 화폐 액면가의 자릿수만 바꾸는 화폐개혁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고, 증권시장 전체를 감독하는 한국거래소 운영방침을 바꾸는것은 물론, 전세계 외환거래에 있어서 레버리지의 크기를 획기적으로 바꾸고 (예를 들어 10배가 아닌 1/10배로 오히려 1보다 작은 레버리지체계를 구축하는것입니다), 무엇보다 "화폐시스템에 존재하는 모든 데이터의 업데이트와 동기화 속력" 을 높이기위해 빅데이터 활용도를 최대한 높여야합니다.
물론 경제를 통합적으로 분석, 예측하기 위해 "대규모 빅데이터시스템" 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타당합니다. 어느 국가이든지 체계적인 경제발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가장 먼저 했던것이 "국가적인 통계시스템의 확립" 이었습니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토지조사사업만 10년 정도가 걸리는것이 보통이었고, 현재 한국의 통계시스템은 연간 최신자료로 업데이트가 되고 있지만 "훨씬 신속한 자료의 업데이트" 를 여전히 갈망하는것도 사실일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통계는 특정한 권력에 의해 악용될 가능성 또한 있고, 그 부정적인 가능성을 사회 전반적인 힘으로 확대시키는것은 다름아닌 "그 분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대다수의 대중들" 입니다. 현대문명을 구성하는 모든 분야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일일이 알수는 없기 때문에, 국가부도나 세계경제붕괴를 "형식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격렬한 붕괴보다 빈부격차의 증가속도를 매우 느리게 완화시키는 화폐시스템의 개혁을 말합니다)" 적어도 한번은 전세계적으로 대중들이 실력행사에 나서야된다는것입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기업의 고유언어인 광고가 대중들의 뇌 속 무기력한 무의식을 상대로 계속 협상을 통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얻어내는 사이, 점차 자본주의는 근본부터 무너져가는것이다" 라는 말의 의미를 한번쯤은 생각해볼 필요도 있을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한번 만들어본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현재 전세계 거의 모든 사람들은 17세기 유행했던 "기계론적 우주관 (우주라는 시계는 태엽을 감아주지 않아도 영원히 작동한다)" 과 비슷한 사상에 너무 빠져있는것같습니다. 우주라는 시계의 태엽을 전지전능한 신이 만들었기 때문에 시계 (우주) 는 절대 고장나지 않는다는 논리는 "경제시스템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자본주의를 자유시장원리에 따라 잘 이끌어줄것이다" 라는 막연한 논리로 대치됬을뿐입니다. 한가지 다른점은 "뉴턴의 기계론적 우주관" 은 아인슈타인에 의해 수정이 가능했지만, 불완전한 경제시스템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현대문명이 어느 수준까지 후퇴할지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은 아직 주류 학계에서 논의되지않고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결합한 "이상적이고 객관적인 지능" 이 탄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것도 (문명 자체를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평가할수있는 지능체계로, 정확도는 100%에서 한참 모자라지만 적어도 인간보다는 훨씬 발전된 수준의 인공지능을 말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욕망을 마음껏 발휘해서 그 에너지를 최대한 재활용이 가능한 바람직한 시스템" 을 만들 정도의 "지적 수준" 과 "협동하고자 하는 마음" 이 부족해 스스로 현대 문명을 붕괴시킬 가능성이 높다는것에 안타까움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을 적은 수리비용으로 수많은 장소에 적절히 분배할수있는 화폐시스템이 없다면, 실제로 현대문명이 붕괴했을때 그 원인이 피크오일 이후 석유생산이 급감한것보다 인간의 욕망을 화폐시스템에 적절히 공급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어떤 후대 역사가의 분석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 비빔밥 2015.10.06. 16:43 답글
- bnqownlkwl 좋은 책도 소개해 주시고 늘 많은 고민을 하게 하는 새로운 내용의 댓글 감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사람들의 본성과 경제 시스템을 너무나 당연시하고 있습니다. 사회계약설 같은 말도 안되는 이론들을 오늘날 대학의 정치외교 학과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지요. 오히려 국가가 생기면서 시장에 위계질서가 도입되고 시장의 자율화폐는 사라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의 발생과 발전은 어떤 특정 인간들의 욕망의 투영이라기 보다는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적 본성과 그 본성을 이용하여 체계적 질서를 만들어 자신들의 권력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지배 계급의 욕망이 잘 맞아 떨어진 결과일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거래의 수단이었던 화폐는 거래의 목적에 영구적 권력의 목적이 추가로 개입하게 되고 결국 경화로 발전하여 부의 축적이라는 부차적 수단을 갖게 되었는데, 이를 발전이라고 보면 발전이지만, 인류학자들이 밝혀낸 평화적인 원시부족들의 상호증여의 문화와는 사뭇 다른 인위적인 시스템이 시작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즉, 화폐의 경화과정과 그 다음 단계의 오늘날의 신용화폐 시스템은 하나의 발전 과정으로 볼 수도 있고 반대로 과거의 순수함이 사라진 지나치게 인위적인 시스템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인데 오늘날 신용화폐의 위기 앞에서 우리는 인류는 향후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이냐의 기로에서 과거의 화폐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이러한 지식들을 공개적으로 대중들에게 전파하고 사회적 담론의 영역을 정치에서 화폐 문제로 넓혀가는 것이 필수적이나 화폐 권력을 가진 집단이 그러한 선택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글을 쓰다보면 가끔 저를 골드버그나 금본위제 옹호자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저는 사실 신용화폐 시스템이야 말로 경화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이상적이고 발전된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의 위기 상황에서 어느정도 일시적이나마 과거 금본위제로의 복귀를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것이고 아직 국제 화폐 시스템에서 금의 영향력이 여전한 상태에서 세계 경제 위기 심화시 금이 자산 보호 및 국가의 위기 대비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인류의 전반적 인식 수준이 화폐에서 금을 배제할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판단도 있는 것이구요.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미래의 화폐는 부의 수단으로 오늘날처럼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운명의 관점에서 순수한 거래 수단으로 그 역할이 축소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화폐 시스템의 변화에 앞서 돈에 대한 철학적 고민과 더 나은 삶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즉, 소유에 대한 개념 자체가 바뀌어야 하고 상호 호혜와 증여에 기반한 공동체 경제를 만들어 내야하며, 화폐의 권력을 국가에서 시장으로 돌려놓되 화폐가 시장의 위계질서를 강화하는 쪽으로 활용되지 않도록 해야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화폐가 순수한 거래의 수단으로만 사용될 수 있도록 여러 조치가 필요할 것입니다. 예를들어 말씀하신 것처럼 화폐가 이자를 낳아 증식하는 것이 아니라 역이자 화폐, 즉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 소멸되어 가는 방식을 적극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아이디어는 기존의 확장성 부채화폐 개념을 절대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개념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금융시스템의 입장에서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공동체 정신에 입각한 상호 증여 경제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진지하게 고려해 볼 부분일 것입니다. 돈 자체가 번영의 수단이자 목표가 되는 순간, 모든 경제는 화폐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로 인해 인간의 다양성과 다양한 재능들은 화폐를 목적으로 소진되어 버립니다. 물론 화폐의 성질을 완전히 바꾸는 것은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생각하는 오늘날의 사회가 전면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들어 소수의 연예인 스타들이나 스포츠 스타들을 만들어 내는 거대한 문화 사업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거대 매스미디어는 물론 돈을 추구하는 거대기업들과 화폐 투기에 관련된 모든 금융업들과 전문가의 명함을 갖고 있는 합법적고리대금업자들도 사라질 것입니다. 즉, 화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모든 중앙집권화가 사라지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사회에서 지역 사회들은 자신들의 경쟁력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할 것이며 지역 단위의 예술이 발전하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돈이 아닌 자신의 재능을 위해서 시간을 쓰게 될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하면 화폐 권력을 약화시키느냐가 미래 경제의 핵심일 것이고 화폐 권력의 크기와 반비례하여 개인들의 삶의 질은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사회는 더 넓은 집, 더 비싼 차를 추구하며 상대적인 만족감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대다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바람직한 사회는 아니겠지요. 그래서 그런 이상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오늘날의 삶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자신의 처지가 과거 노예와 다름 없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갑자기 이루어질 수 있는 변화는 아니고, 또 그런 변화가 없다 하더라도 오늘날 시스템의 진실을 이해하고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는 것은 오늘날 시스템에서 나름대로의 쉘터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부족하지만 계속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bnqownlkwl 2015.10.10. 22:30 답글
만약 지금 이순간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 모든 국가들이 "제도권의 부채이자상환부담을 100% 없애겠다" 는 형식적인 구호하에 가계부채금리를 -5%로 낮추고, 모든 국채의 성격을 "잠재적 영구채 (영원한 데이터 관리)" 로 바꾼다음 "증권 변환 (국채를 주식으로 자산의 성격을 변환하는 조치로, 국가 자체를 거대한 주식종목으로 본다는 관점입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경제적 개입은 국가의 주인인 국민들의 참여과정을 통해 화폐권력의 독점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최소화하되, 최소한의 치안유지기능은 그대로 유지하는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세계 재무제표시스템" 에는 "한국" 이라는 "상장종목" 이 들어갈수있고, 대다수 국민들의 동의가 있다는 전제하에 한국이라는 주식종목에서 대규모 주식 매각이 있을경우, 그것은 적절한 통화량 조절을 의미하며 극단적인 경우 한국이라는 주식종목을 "상장폐지" 할수도 있을것입니다. 하지만 각국의 언어가 완전히 하나로 통합되기까지는 한국이라는 상장종목을 폐지할만한 동기를 얻기가 상당히 힘들것입니다)" 을 시행한다면, 이론적으로 봤을때 달러붕괴도 일어날수 없습니다.
만약 전세계 모든 국채의 성격을 영구채로 변환하고 주식으로 모두 바꾼다음 국가 자체를 주식종목으로 공식 상장한뒤 (국가의 거의 모든 데이터를 최대한 개방하는 "국가공개" 를 통해 각국의 재무상태를 지금보다 더 명확히 파악할수있게 투명한 통계시스템을 확립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국가의 개념" 을 "협동조합기업의 연합체 (매우 안좋은 대표적 사례는 북한의 지방연합기업소라는 매우 억압적인 시스템)" 들의 모임으로 새로 정의하되, 현재 북한의 상황처럼 "공식적으로 모든 국민들은 100% 정규직인 (국가가 각 개인의 자유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취업을 강요하는 비자발적 정규직시스템)" 모순을 만들어 실물경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사채시장의 규모를 비정상적으로 키우기보다는, 국가가 체계적으로 관리하기가 매우 어려운 사채시장의 상당수요를 제도권 안으로 흡수하려는 "대안 시스템" 이 마련되어야할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를 "단일객체" 로 보는것보다 "지역공동체의 연합" 으로 개념 자체를 수정해서 그에 맞게 국가의 모든 법들도 점진적으로 수정되어야할것입니다. (인간의 생존본능에서 파생된 추가적인 욕망이 사채시장과 그림자 금융을 키우도록 방치하는것보다, 제도권 금융시스템 하부로 각 개인의 폭력성을 가둘수있게 하는 정교한 장치를 만드는것이 훨씬 나을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사고실험" 이 현실세계에 실제로 구현되기위해서는 전세계 대중들이 "국가와 은행 모두를 자신들의 손으로 바꿀수있다" 는 최소한의 객관적 논리와 이상적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어야된다는것입니다. 마이너스 대출금리에 대한 거부감을 스스로 극복할수있어야하고, 강력한 국가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을 모두 버려야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 국민들이 현재의 기축통화 달러보다 "국민들의 손에 의한 국가와 은행 개조" 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비슷하게 변화를 주도한다면, 달러붕괴가 발생하지 않는것은 물론 (물론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일방적인 달러패권은 스스로 내려놓을수있는 용기가 필요하겠죠. 하지만 달러가 월가의 파생상품가격을 지탱하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명확히 알고, 마이너스 대출금리가 오히려 대다수 국민들의 삶의 질을 대폭 향상시키고 무엇보다 파산의 두려움에서 벗어날수있게 해준다는것을 알게되며, 심지어 전쟁의 가능성마저 대폭 줄일수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그들이 내릴 결정은 반드시 이전의 역사와 같을거라고 장담할수만은 없을것입니다.
미국을 예로 든것은 전세계 각지에서 전쟁의 위험을 고조시키는 가장 핵심적인 원인이 달러와 그에 기생하는 펜타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미 군수산업체와 연계된 이들의 독주를 막을수있는것은 오직 미국 국민들의 각성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500년쯤 후에 (마이너스 대출금리로 시작된 화폐시스템의 변화는 "점차적으로" 인류의 의식구조 자체를 바꾸게 되고, 그와 동시에 전세계적으로 지역공동체들이 체계적으로 뿌리내리는데는 100~200년이 걸릴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세계 거의 모든 지역의 역사책에 "21세기 초반 미국의 주도하에 기존의 기축통화 중심의 국제정치, 경제시스템을 국가와 은행권력 모두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라고 기술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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