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13. 09:08ㆍ詩.
1962년 경주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88년 불교문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 (2002년 천년의시작)
번개를 치다 (2005년 문학과지성사)
뒤안을 나오며
버둥거리는 염소의 입에 소금을 먹이고
목을 따자,
몇 번 몸을 떨던 염소는 곧 조용해진다
노파가 양은솥을 대고 피를 받아낸다
염소의 뜬 눈이 광속으로 허공을 가른다
영감이 버너불로 염소를 그으른다
불똥 속에 드러나는 염소의 얼굴
어금니를 꽉 다문 저 무표정이 무섭다
털을 다 그을린 영감이 담배를 피워문다
담배를 빠는 볼이 대추꼭지처럼 쪼글쪼글하다
염소보다 영감의 팔자가 더 세서
염소는 죽어서도 영감을 저주하지 못할 것이다
평생을 기억하며 사는 인간만이 불행할 뿐,
기억이 짧은 염소는 그 짧은 기억의 힘으로
죽으면 죽었지 미련하나 남기지 않는다
오후의 설핏한 해가 힘 센 허기를 몰고 온다
허기는 얼마나 골똘한 망각인가
뒤안을 나오는데 우리 속의 염소들이
누구시냐는 듯 멀뚱멀뚱 쳐다본다
기찻길 옆 고물상
고물상은 대개 기찻길 옆에 있다
쫓겨난 고물들, 죽어서도 고단한 고물들
잠들만하면 기차가 들이닥쳐 깨운다
철커덕 철커덕 작두질을 하며
물은 죄를 묻고 또 묻는다
내장을 비우고 납작하게 눌린 박스포와
유효 기간이 지난 소문이 담긴 폐지들
한 때는 번쩍거리는 몸의 일부였을 가볍고 무거운 쇳조각들
눈앞이 캄캄한 모니터와, 혀가 뽑힌 프린터들
얻어맞아 어금니가 빠진 선풍기 날개들
저들은 대체 어떤 비밀을 알아버린 죄로
살해되었을까 버려졌을까 쥐도 새도 모르게
다시는 들어오지 마라
이젠 필요 없어, 버린 자식들
기차가 지나 간 후,
고물들은 잠시 자신들이 살다 온 곳의
죄를 떠올릴지 모른다
인간들의 살비듬과 숫가락이 부딪히는 소리와
밥 냄새 따위를 기억해 낼지도 모른다
박씨는 박스를 묶고, 김씨는 흩어진 쇳조각을 모은다
다시는 태어나지 마라 태어나지 마 퇴, 침 발라가며
단단하게 염을 한다
땅바닥에는 죽은 고물들의 산더미를 훑어내린
핏물이 흥건하다
완전히 숨이 끊어진 놈들은 재생의 용광로로 보내지거나
약간이라도 숨이 붙어 있는 놈들은 따로 모아졌다가
새 주인을 만나러 가겠지
하지만 한 번 죽거나 버려진 고물들은
다시는 살고 싶지 않다 누구에겐가 가고 싶지 않다
재생이 싫다 부활이 죽어도 싫다
부글부글 끓이든 이글이글 녹이든
다만 흔적없이 사라지고 싶을 뿐이다
천당도 지옥도 없이
기찻길 옆에는 대개 고물상이 있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눈 / 정병근
한 생각을 버릴 때
한 소식 온다
누가 공중부양의 기적을 행하는지
가르마를 사뿐사뿐 밟고
맨발의 밥이 내린다
집집마다 고봉밥 한 상씩 차려지고
두런두런 祭文(제문) 읽은 소리
수저 부딪치는 소리
숭늉 마시고 방문을 연다
세상 모든 눈썹 위에 쌓이는 눈
흰 가지를 털고 후드득 떨어지는 눈
반찬 없는 흰 밥이
너무 많이 오신다
저쪽 - 정병근
꽃이 피는 건, 어딘가에
그만큼 꽃이 안 핀다는 말
환하게 눈 밝히는 것들의 꽁무늬마다
안 보이는 암흑의 심지가 타고 있다는 말
어째서 꽃은 저토록 피고
나무들은 내 쪽으로만 몸 밀어내는지
존재의 배꼽을 따라가면 거기 또 다른
존재 아닌 존재가 텅 비어 있다는 말
들리는 것만 듣고 보이는 것만 보는
나는 불치의 귀와 눈을 가졌네
고려장 2 / 정병근
모서리가 헤진 침대 매트리스 하나
골목 담벼락에 세워진 채 버려져 있다
몹시 머물렀던 부위를 따라
화농 자국 같은 얼룩이 번져 있다
저걸 버린 자는 누구일까
습기찬 방에 누워 있는 어머니,
당신은 이제 너무 낡았어요
젊은 무게를 받아내느라 허리가 부러지고
뱃가죽이 축 늘어진 어머니
어둠 속에서 누가 어머니를 져다 버린다
개 두 마리 흘레붙고 있는 한 낮의 골목,
“여보시오 나 좀 데려가 주시오”
자식의 얼굴조차 잊어버린
낯선 어머니가 나를 부른다
부끄러워 얼른 골목을 빠져나온다
<고려장 2> / 정병근/ ≪현대시≫2004년 12월호
나팔꽃 씨 /정병근
녹슨 쇠 울타리에
말라 죽은 나팔꽃 줄기는
죽는 순간까지 필사적으로 기어간
나팔꽃의 길이다
줄기에 조롱조롱 달린 씨방을 손톱으로 누르자
깍지를 탈탈 털고
네 알씩 여섯 알씩 까만 씨들이 튀어 나온다
손바닥 안의 팔만대장경,
무광택의 암흑 물질이
손금을 빨아들이고 있다
마음에 새기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이냐
살아서 기어오르라는,
단 하나의 말씀으로 빽빽한
환약 같은 나팔꽃 씨
입속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오늘 밤, 온 몸에 나팔꽃 문신이 번져
나는 한 철 환할 것이다
오늘은 대문 옆 담장에 말라붙은 나팔꽃 줄기들을 걷어냈다. 지난여름 내내 울긋불긋 나팔소리가 적막한 집안을 떠들썩하게 해 주었는데...
20여 년 전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울컥 떠오른다. (물론 화자에게 있어서 어떤 애증의 씨앗인지 정열의 씨앗인지 절망의 기로에 선 투지의 씨앗인지 여러 각도로 해석의 여지는 있지만) 평생을 한 가정의 나팔수로서 녹녹치 않은 생의 울타리 기어오르다 오랜 투병 끝 그 넝쿨손 놓아야 했던 우리 아버지, 화자가 나팔꽃 씨를 삼켰듯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을 가슴에 심었다. 고달픈 생의 넝쿨손 뻗어가다가 힘이 빠질 때마다 환하게 피어나던 아버지의 말씀들, 그래, 살아야지 살아서 기어 올라봐야지! 숨차게 달려가는 워킹맘의 가슴 속에서 메아리 치는 나팔꽃, 악착같은 나팔꽃들의 말씀에 캄캄해지던 가슴이 다시 환해진다.
12월 첫날이다. 당신의 울타리에선 금년 한 해 동안 어떤 꽃들이 피고 졌는가? 마지막 한 달 그 꽃들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자.
한 때 정병근 시인의 시에 첫 눈에 반한 맛을 잊을 수 없었다. 언제 음미해도 가슴 울리는 나팔꽃 같은 시인의 시들 중에 한 편을 차려보니 오래 된 숙제를 해낸 듯 가슴 속이 환하다.
(최 희)
나무의 境地
그래도 그냥 서 있는 것이 더 좋았다
누구에겐가 가서 상처를 만들기 싫었다
아무에게도 가지않고 부딪히지않고 상관하지 않으면서
혼자만의 생을 죽도록 살고 싶었다
자신만의 생각으로 하루의 처음과 끝을 빽빽이 채우는
나무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다
그게 한계다 치명적인 콤플렉스다
콤플렉스를 가진 나무는 아름답다
까마득한 세월을,
길들여지지않고 설득 당하지 않고
설명할 필요도 없이 서있는 그 한가지로
마침내 가지않고도 누군가를 오게 하는
한 경지에 이르렀다
많은, 움직이는, 지친 생명들이
그의 그늘 아래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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