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13. 09:36ㆍ詩.
기찻길에 관한 시 모음 ─
나란히 함께 간다는 것은
길은 혼자서 가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멀고 험한 길일수록 함께 가야 한다는 뜻이다.
철길은 왜 나란히 가는가?
함께 길을 가게 될 때에는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를 늘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토닥토닥 다투지 말고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말고
높낮이를 따지지 말고 가라는 뜻이다.
철길은 왜 서로 닿지 못하는 거리를 두면서 가는가?
사랑한다는 것은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둘 사이에 알맞은 거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서로 등을 돌린 뒤에 생긴 모난 거리가 아니라
서로 그리워하는 둥근 거리 말이다.
철길을 따라가 보아라
철길은 절대로 90도 각도로 방향을 꺾지 않는다.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을 다 둘러본 뒤에 천천히
둥글게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커브를 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랑도 그렇게 철길을 닮아가라.
(안도현·시인, 1961-)
철길은 왜 서로 만나서는 안 되는가
철길은 서로 만나고 싶지만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열차를 보내기 위해서는
철길은 서로 만나서는 안 된다
슬프지만 이대로 견딜 수밖에 없다
철길 같은 사람들이 있다
만나고 싶지만 만나서는 안 되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슬프지만 철길처럼
힘겹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윤수천·시인, 1942-)
철길
아스라이 멀어져 갔던
내 사랑하는 이들이
숨가쁘게 씨근덕거리면서
다시,
내 곁으로
달려올 것만 같다
(정세훈·시인, 1955-)
철길 · 3
우리는 만났다, 힘겹게
우리는 헤어졌다, 역시 힘겹게.
(나태주·시인, 1945-)
가을 철길
이곳에 오면
버림받고도
병들지 못하고 사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김진성·시인, 1962-)
사라져 가는 기찻길 위에
사라져 가는
기찻길 위에
내가 있습니다
사라져 가는
하늘길 위에
그대 있습니다
멀리 있어서
정다운 이여,
사라짐으로 우리는
비로소 아름답고
떠나감으로 우리는
비로소 참답습니다.
(나태주·시인, 1945-)
기찻길
아무런 말도 없이
스쳐 가는 바람이라도
나란히 있어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가까이 가고파도
다가설 수 없고
애써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마주 보며
함께 가는 길
돌아서서 보면
한 치 오차도 없이 달려온 길
서로 바라볼 수 있어
행복했고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냥 즐거운,
먼 훗날, 소실점 끝에서라도
한 점이 될 수 있어
설레는 가슴이
이렇게 뜨거울 수가 없다
(양해선·시인)
기찻길 옆 고물상
고물상은 대개 기찻길 옆에 있다
쫓겨난 고물들, 죽어서도 고단한 고물들
잠들만하면 기차가 들이닥쳐 깨운다
철커덕 철커덕 작두질을 하며
물은 죄를 묻고 또 묻는다
내장을 비우고 납작하게 눌린 박스포와
유효 기간이 지난 소문이 담긴 폐지들
한때는 번쩍거리는 몸의 일부였을 가볍고 무거운 쇳조각들
눈앞이 캄캄한 모니터와, 혀가 뽑힌 프린터들
얻어맞아 어금니가 빠진 선풍기 날개들
저들은 대체 어떤 비밀을 알아버린 죄로
살해되었을까 버려졌을까 쥐도 새도 모르게
다시는 들어오지 마라
이젠 필요 없어, 버린 자식들
기차가 지나 간 후,
고물들은 잠시 자신들이 살다 온 곳의
죄를 떠올릴지 모른다
인간들의 살비듬과 숟가락이 부딪히는 소리와
밥 냄새 따위를 기억해 낼지도 모른다
박씨는 박스를 묶고, 김씨는 흩어진 쇳조각을 모은다
다시는 태어나지 마라 태어나지 마 퇴, 침 발라가며
단단하게 염을 한다
땅바닥에는 죽은 고물들의 산더미를 훑어내린
핏물이 흥건하다
완전히 숨이 끊어진 놈들은 재생의 용광로로 보내지거나
약간이라도 숨이 붙어 있는 놈들은 따로 모아졌다가
새 주인을 만나러 가겠지
하지만 한 번 죽거나 버려진 고물들은
다시는 살고 싶지 않다 누구에겐가 가고 싶지 않다
재생이 싫다 부활이 죽어도 싫다
부글부글 끓이든 이글이글 녹이든
다만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을 뿐이다
천당도 지옥도 없이
기찻길 옆에는 대개 고물상이 있다
(정병근·시인, 1962-)
나무에 관한 시 모음 ─
나무의 경지
그래도 그냥 서 있는 것이 더 좋았다
누구에겐가 가서 상처를 만들기 싫었다
아무에게도 가지 않고 부딪히지 않고 상관하지 않으면서
혼자만의 생을 죽도록 살고 싶었다
자신만의 생각으로 하루의 처음과 끝을 빽빽이 채우는
나무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다
그게 한계다 치명적인 콤플렉스다
콤플렉스를 가진 나무는 아름답다
까마득한 세월을,
길들여지지 않고 설득 당하지 않고
설명할 필요도 없이 서 있는 그 한 가지로
마침내 가지 않고도 누군가를 오게 하는
한 경지에 이르렀다
많은, 움직이는, 지친 생명들이
그의 그늘 아래로 들어왔다
(정병근·시인, 1962-)
늙은 나무를 보다
두 팔로 안을 만큼 큰 나무도
털끝만 한 싹에서 자랐다는 노자 64장
守微*편의 구절을 읽다가
나는 문득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 감동은 대개
이렇게 오는 것이다
그래서 숲으로 들어가
평소 아침 산책길에 자주 만나던
늙은 느릅나무 영감님 앞으로 다가갔다
느릅은 푸른 머리채를 풀어서
바람에 빗질하고 있었다
고목의 어릴 적 일들을 물어보아도
묵묵부답
다람쥐가 혼자 열매를 까먹다가
제풀에 화들짝 놀라 달아난 그 자리에는
실낱처럼 파리한 싹이 하나
가느다란 목을 땅 위로 쏘옥
내밀고 있는 참이었다
(이동순·시인, 1950-)
* 수미 : 노자가 쓴 <도덕경>의 한 부분.
절필 - 한라산 구상나무에 바침
끝끝내 저 나무는 색(色)에 들지 않는다
바람에 끝을 벼린 바늘잎 세필로는
격문(檄文)은 쓰지 않겠다 붓을 꺾은 고사목
뼈를 깎는 뉘우침이 골각체(骨角體)를 만든다
산세가 험할수록 더 명징한 산울림이
오히려 필화(筆禍)가 되어 눈 퍼붓는 한라산
세상에 맞서려면 저렇게 간결하라
살점은 다 버리고 흰 뼈만 내리 꽂는
저 뻣센 반골의 획이 가슴팍에 박힌다
(이성목·시인, 1962-)
나무
나에게 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나무에게로 가서
등을 기대고 서 있곤 했다
내가 나무여 하고 부르면 나무는
그 잎들을 은빛으로 반짝여 주고,
하늘을 보고 싶다고 하면
나무는 저의 품을 열어 하늘을 보여 주었다
저녁에 내가 몸이 아플 때면
새들을 불러 크게 울어 주었다
내 집 뒤에
나무가 하나 있었다
비가 내리면 서둘러 넓은 잎을 꺼내
비를 가려 주고
세상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을 때
그 바람으로 숨으로
나무는 먼저 한숨지어 주었다
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 때면
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
바람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다
(류시화·시인, 1958-)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황지우·시인, 1952-)
커다란 나무
나뭇가지들이 갈라진다
몸통에서 올라오는 몸을 찢으며 갈라진다
찢어진 자리에서 구불구불 기어나오며 갈라진다
이글이글 불꽃 모양으로 휘어지며 갈라진다
나무 위에 자라는 또 다른 나무처럼 갈라진다
팔다리처럼 손가락 발가락처럼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갈라져 있었다는 듯 갈라진다
오래 전부터 갈라져 있던 길을
거역할 수 없도록 제 몸에 깊이 새겨져 있는 길을
너무 많이 가보아서 훤히 알고 있는 길을
담담하게 걸어가듯이 갈라진다
제 몸통으로 빠져나가는 수많은 구멍들이
다 제 길이라는 듯 갈라진다
갈라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
조금 전에 갈라지고 나서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다시다시 갈라진다
갈기갈기 찢어지듯 갈라진다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쉬지 않고 갈라진다
갈라져 점점 가늘어지는데도 갈라진다
갈라져 점점 뒤틀리는데도 갈라진다
갈라진 힘들이 모인 한 그루 커다란 식물성 불이
둥글게 타오른다 제 몸 안에 난 수많은 불길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맹렬하게 갈라지고 있다
(김기택·시인, 1957-)
나무생각
나보다 오래 살아온 느티나무 앞에서는
무조건 무릎 꿇고 한 수 배우고 싶다
복숭아나무가 복사꽃을 흩뿌리며 물위에 點點이 우표를 붙이는 날은
나도 양면괘지에다 긴 편지를 쓰고 싶다
벼랑에 기를 쓰고 붙어 있는, 허리 뒤틀린
조선소나무를 보면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주고 싶다
자기 자신의 욕망을 아무 일 아닌 것같이 멀리 보내는
밤나무 아래에서는 아무 일 아닌 것같이 나도 관계를 맺고 싶다
나 외로운 날은 外邊山 호랑가시나무 숲에 들어
호랑가시나무한테 내 등 좀 긁어 달라고, 엎드려 상처받고 싶다
(안도현·시인, 1961-)
나무의 생애
비바람 드센 날이면
온몸 치떨면서도
나지막이 작은 신음소리뿐
생의 아픔과 시련이야
남몰래 제 몸 속에
나이테로 새기며
칠흑어둠 속이나
희뿌연 가로등 아래에서도
고요히 잠자는 나무
보이지 않는 뿌리 하나
목숨의 중심처럼 지키면 그뿐
세상에 반듯한 집 한 칸
장만하지 못하고서도
햇살과 바람과 이슬의
하늘 은총 철석같이 믿어
수많은 푸른 잎새들의
자식을 펑펑 낳는다
제 몸은 비쩍 마르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기른 것들과
늦가을 찬바람에 생이별하면서도
새 생명의 봄을 기약한다
나무는 제가 한세월
잘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정연복·시인, 1957-)
민들레에 관한 시 모음 ─
별과 민들레
파란 하늘 그 깊은 곳
바다 속 고 작은 돌처럼
밤이 올 때까지 잠겨 있는
낮별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지만 있는 거야
보이지 않는 것도 있는 거야.
꽃이 지고 시들어 버린 민들레는
돌 틈새에 잠자코
봄이 올 때까지 숨어 있다
튼튼한 그 뿌리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지만 있는 거야
보이지 않는 것도 있는 거야.
(가네코 미스즈·27살에 요절한 일본의 여류 동요시인)
두 주먹 불끈 쥐고
온갖 쓰레기 더미 위에
한 송이 민들레 피었습니다.
어디서 날아왔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역겨운 냄새 풀풀 날려도
코 막으며 살아야 한다고
살아서, 저 파란 하늘 향해
크게 한번 웃어 봐야 한다고
두 주먹 불끈 쥐고
용케도 잘 자랐구나.
어디선가 나풀나풀 날아와
꽃잎에 입 맞출 나비를 기다리며
어둠 밝히는 등대처럼
꼿꼿이, 환하게 웃고 있구나.
(김소운·아동문학가)
민들레
누가 불렀니
가난한 시인의
좁은 마당에
저절로 피어난
노오란 민들레
해질녘
골목길에 울고 섰던
조그만 애기
두 눈에
눈물 아직 매달은 채로
앞니도 한 개 빠진 채로
대문을 열고 들어섰구나
만 가지 꽃이 피는
꽃밭을 두고
가난한 시인의
좁은 마당에
환하게 불을 켠
노오란 민들레.
(허영자·시인, 1938-)
민들레
날이 가물수록 민들레는 뿌리를 깊이 내린다
때가 되면 햇살 가득 넘치고 빗물 넉넉해
꽃 피고 열매 맺는 일 순탄하기만 한 삶도 많지만
사는 일 누구에게나 그리 만만치 않아
어느 해엔 늦도록 추위가 물러가지 않거나
가뭄이 깊어 튼실한 꽃은커녕
몸을 지키기 어려운 때도 있다
눈치 빠른 이들은 들판을 떠나고
남아 있는 것들도 삶의 반경 절반으로 줄이며
떨어져나가는 제 살과 이파리들
어쩌지 못하고 바라보아야 할 때도 있다
겉보기엔 많이 빈약해지고 초췌하여 지쳐 있는 듯하지만
그럴수록 민들레는 뿌리를 깊이 내린다
남들은 제 꽃이 어떤 모양 어떤 빛깔로 비칠까 걱정할 때
곁뿌리 다 데리고 원뿌리를 곧게 곧게 아래로 내린다
꽃 피기 어려운 때일수록 두 배 세 배 깊어져간다
더욱 말없이 더욱 진지하게 낮은 곳을 찾아서
(도종환·시인, 1954-)
민들레
민들레 풀씨처럼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게
그렇게 세상의 강을 건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슬픔은 왜
저 만치 떨어져서 바라보면
슬프지 않은 것일까
민들레 풀씨처럼
얼마만큼의 거리를 갖고
그렇게 세상 위를 떠다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류시화·시인, 1958-)
민들레꽃
까닭 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 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조지훈·시인, 1920-1968)
민들레
가장 높은 곳에 보푸라기 깃을 단다
오직 사랑은
내 몸을 비워 그대에게 날아가는 일
외로운 정수리에 날개를 단다
먼지도
솜털도 아니게
그것이 아니면 흩어져버리려고
그것이 아니면 부서져버리려고
누군가 나를 참수한다 해도
모가지를 가져가지는 못할 것이다
(신용목·시인, 1974-)
민들레처럼
민들레꽃처럼 살아야 한다.
내 가슴에 새긴 불타는 투혼
무수한 발길에 짓밟힌대도
민들레처럼
모질고 모진 이 생존의 땅에
내가 가야할 저 투쟁의 길에
온몸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
민들레처럼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결코 빛나지 않을지라도
흔하고 너른 들풀과 어우러져
거침없이 피어나는 민들레
아아 민들레
뜨거운 가슴 수천 수백의
꽃씨가 되어
아아 해방의 봄을 부른다
민들레의 투혼으로
(박노해·시인, 1958-)
민들레
특별하지 않아도 빛나지 않아도
조금도 쓸쓸하지 않고 봄비 뿌리면 그 비를 마시고
바람 불면 맨살 부대끼며
새 눈과 흙무더기 들풀과 어우러져 모두 다 봄의 주체로
서로를 빛나게 하는
민들레의 소박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그래요. 논두렁이건 무너진 뚝방이건
폐유에 절은 공장 화단 모퉁이
쇠창살 너무 후미진 마당까지
그 어느 험난한 생존의 땅 위에서건
끈질긴 생명력으로 당당하게 피어나는
민들레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우리는
보호막 하나 없어도 좋습니다.
말하는 것 깨지는 것도 피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피어나야 할 곳에 거침없이 피어나
온몸으로 부딪치며 봄을 부르는
현장의 민들레
그 치열함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자신에게 단 한번 주어진 시절
자신이 아니면 꽃피울 수 없는 거친 그 자리에
정직하게 피어나 성심껏 피어나
기꺼이 밟히고 으깨지고 또 일어서며
피를 말리고 살을 말려 봄을 진군하다가
마침내 바람찬 허공 중에 수천 수백의 꽃씨로
장렬하게 산화하는 아 - 민들레 민들레
그 민들레의 투혼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작자 미상)
거울에 관한 시 모음 ─
거울 없는 나라
거울이 없는 나라가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을 모른다
내가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남의 얼굴을 보고 내 얼굴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 나라에서는
언청이도 남이 미인이라 하면 미인으로 알고
미인도 남이 점박이라 하면 점박이가 된다
나는 내가 아니라 남의 입에 달려 있다
(임보·시인, 1940-)
거울
생긴 대로
사실대로
나타나는 참모습
언제나
진실을 비추어 주는
삶의 동반자
순리의 증인 너는
자연 그대로 살라한다
(김관영·시인)
아내의 거울
나는 지금 떠나려고 구무럭거리는데
아내는 거울 앞을 언제 떠나려는 것일까
시집 왔을 때처럼
70이 넘은 나이에도
거울 앞에 앉아 있으니
내가 떠난 뒤에도
아내는 거울 앞을 떠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아내의 화장은
나 때문이 아닌 것을
(이생진·시인, 1929-)
마음의 거울
법원 앞 다방은
담배연기 자욱하다
답답한 사람들이 모여
연신 담배를 피워대며
복잡한 속내 뿜어내고 있다
환풍기를 돌려도
칡넝쿨처럼 얽힌 감정
두꺼운 노란 서류봉투에 담아
법정을 오고 가지만
세상사 때론
재판보다도 누가 옳은지
마음의 거울에 내 모습 비춰본다
어긋난 관계들의 회복을 위해
사랑하는 법 배우기 위해
마음의 거울을 닦는다
(이연숙·시인)
거울
누나는
거울을 볼 때면
미소지어요
이모도
거울을 볼 때면
미소지어요
엄마는
나를 볼 때면
미소지어요
내 얼굴은
엄마의 가장 어여쁜
거울이에요
(김용삼·아동문학가, 1966-)
거울 보기
엄마를 아는 분은
엄마 닮았구나
아빠를 아는 분은
아빠 닮았구나
엄마 아빠 다 알면
반반씩 닮았구나
거울을 앞에 놓고
정말인가 살펴봐요.
(유경환·아동문학가, 1936-2007)
거울
이 세상 어딘가에
나와 꼭 닮은 아이가
하나 더 있는 건
참 다행이지.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있는
작은 키,
주근깨투성이의 얼굴,
반에서 중간밖에 안 되는 시험 성적.
그런 아이가
나 말고 하나
더 있는 건
참 다행이지.
속상할 때면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울 속 아이도
날 내어다본다.
(이상교·아동문학가, 1949-)
거울
앞니 빠진 내 동생
입 꼭 다물고 다니다
거울한테만 살짝
아, 하고 보여 준다
아버지랑 다투고 속상할 때
어머니는
방문을 닫고 거울 앞에 앉는다
아버지 허물을
거울한테 다 일러바치는 거다
거울은
우리 가족 비밀을 다 알고 있지만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다
그런 거울 앞에서는
아버지도 다소곳해진다
(곽해룡·아동문학가)
해를 파는 가게
거울 가게에는
거울 수만큼
하늘이 있습니다.
날마다
하늘을 파랗게 닦아 놓고
해를 팝니다.
손님들은
하늘 속에 비친
얼굴을 보고
해가 담긴
거울을
사 가지고 갑니다.
(이연승·아동문학가, 강원도 횡성 출생)
거울. 1
화장실 거울에 비친다
병(病) 하나 얻어 죽기에 손색없는
중년의 사내.
너무 밝아서 천박한가
깊이 없는 다변처럼
아는 만큼 모르는 거울
비추는 만큼 캄캄한 거울
돌아서는 순간 잊어버리는
거울이 운다 등 돌리고 운다
캄캄하게 캄캄하게
누구에게 얻어맞았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관자놀이에 무수히 금이 간
거울의 등을 본 자
아무도 없다
(정병근·시인, 1962-)
나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
집을 나설 때
머리를 빗고 옷매무새를 살피듯이
사람 앞에 설 때마다
생각을 다듬고 마음을 추스려
단정한 마음가짐이 되면 좋겠습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치료를 하듯이
내 마음도 아프면
누군가에게 그대로 내보이고
빨리 나아지면 좋겠습니다.
책을 읽으면
그 내용을 이해하고 마음에 새기듯이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그의 삶을 이해하고 마음에 깊이 간직하는
내가 되면 좋겠습니다.
위험한 곳에 가면
몸을 낮추고 더욱 조심하듯이
어려움이 닥치면
더욱 겸손해지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내가 되면 좋겠습니다.
어린아이의 순진한 모습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듯이
내 마음도 순결과 순수를 만나면
절로 기쁨이 솟아나 행복해지면 좋겠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불을 켜듯이
내 마음의 방에 어둠이 찾아 들면
얼른 불을 밝히고
가까운 곳의 희망부터 하나하나
찾아내면 좋겠습니다.
(작자 미상)
콩나물에 관한 시 모음 ─
콩나물은 서서 키가 큰다
콩나물이 그렇다.
대개 머리가 위로 올라가면서
키 크는 것과 달리
발이 뻗으며
키가 큰다.
하늘을 넘보지 않고도
할 일을 다 하는 셈이다.
단순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법을 깨친
수도승처럼
담담하고 단호하게
발을 뻗는다.
콩나물은 서서 키가 큰다.
(김성옥·시인)
숨쉬는 일에 대한 단상
항아리 속 검은 보자기 아래
노란 꽃술들,
살짝살짝 보자기를 들어올리며
고르게 숨을 쉰다
콩나물 시루에 물을 끼얹을 때면
하루가 다르게 살 차 오르는
둥글 달을 보는 것 같은데
물관부를 따라 물길어 나르는
노랫소리에 맞춰
4분 음표들, 방안을 뛰어 다닐 것 같은데
숨쉬는 일이란
틈새를 비집고 촘촘한 영토를 다스리는 일,
고개를 떨군 채
生을 수직상승 시키는 일이다
(이가희·시인, 1964-)
다시 나에게 쓰는 편지
콩나물은
허공에 기둥 하나 밀어 올리다가
쇠기 전에 머리통을 버린다
참 좋다
쓰라린 새벽
꽃도 열매도 없는 기둥들이
제 몸을 우려내어
맑은 국물이 된다는 것
좋다 참
좋은 끝장이다
(이정록·시인, 1964-)
콩나물에 대한 예의
콩나물을 다듬는답시고 아무래도 나는 뿌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무슨 알량한 휴머니즘이냐고 누가 핀잔한대도 콩나물도 근본은 있어야지 않느냐 그 위를 향한 발돋움의 흔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하지는 못하겠다 아무래도 나는 콩나물 대가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죄 없는 콩알들을 어둠 속에 가두고 물 먹인 죄도 죄려니와 너와 나 감당 못할 결핍과 슬픔과 욕망으로 부풀은 대가리 쥐뜯으며 캄캄하게 울어본 날들이 있잖느냐 무슨 넝마 같은 낭만이냐 하겠지만 넝마에게도 예의는 차리겠다 그래, 나는 콩나물에게 해탈을 돕는 마음으로 겨우 콩나물의 모자나 벗겨주는 것이다
(복효근·시인, 1962-)
콩나물 가족
아빠는 회사에서 물먹었고요
엄마는 홈쇼핑에서 물먹었데요
누나는 시험에서 물먹었다나요
하나같이 기분이 엉망이라면서요
말시키지 말고 숙제나 하래요
근데요 저는요
맨날맨날 물먹어도요
씩씩하고 용감하게 쑥쑥 잘 커요
(박성우·시인, 1971-)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영수 / 기도서 (0) | 2016.12.13 |
---|---|
백석 '童(話)詩' (0) | 2016.01.13 |
정병근 시 모음 (0) | 2015.12.13 |
이외수 詩 (0) | 2015.11.11 |
황동규, 풍장(風葬) (0) | 2015.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