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천사지 십층석탑

2015. 4. 1. 12:26책 · 펌글 · 자료/역사

 

 

출처. 《우리 품에 돌아온 문화재》(국외소재문화재재단 엮음)

 

 

 

 

본래 자리의 경천사지 십층석탑.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으로 1904년 무렵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개성 인근에 있던 경천사는 고려시대에는 왕이 드나들던 큰 절이었지만 당시엔 폐허가 된 지 오래였다.

 

 

 

고려 충목왕 때인 1348년의 일입니다. 지금의 개성 근처인 부소산 자락에 높이 13.5m에 달하는 탑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릅니다.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고려시대엔 전국 각지에 수많은 절들이 속속 들어섰습니다. 석탑도 세워졌는데, 기본적으로는 이중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부(몸돌과 지붕돌)와 상륜뷰로 구성되는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받았지만 5층, 7층, 9층 등 다양한 석탑이 세워지면서 고려 석탑의 고유한 전통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같은 다층탑이라도 옛 지역의 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모습을 닮고, 옛 고구려 지역은 팔각다층탑이 주를 이루는 등 지역적인 특성이 나타났습니다. 왕실을 중심으로 한 문화 못지않게 다양한 지방 문화가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대몽항쟁이 끝난 14세기 이후로는 원나라의 영향도 컸습니다. 고려 문화의 이러한 다양성을 말해주듯 독특한 형태의 이형탑들이 세워졌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색적인 탑이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입니다.

 

 

 

 

 

탑신부 7층 몸돌의 한 면에는 죄불상 세 구가 새겨져 있다.

 

 

 

우선 재료가 달랐습니다. 한반도에 흔히 화강암이 아니라 뽀얗고 매끈한 대리석이 사용되었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탑은 기단이 3단이요, 그 위에 몸돌과 지붕돌이 차곡하게 쌓인 10층의 탑신부와 상륜부를 올렸는데, 3단의 기단과 10층의 탑신 가운데 1층부터 3층까지는 측면이 아(亞)자형이고 평면이 20각형, 4층 이상의 몸돌과 상륜부는 사각형을 기본으로 한 형태입니다. 보통 석탑은 3층, 5층, 7층 등 홀수 층으로 쌓는데, 드물게도 이 탑은 10층입니다. 《화엄경》에서는 10을 화엄의 완성, 곧 완전한 수로 본다고도 합니다.

 

형태만 독특한 것이 아니라 긱단과 몸돌, 지붕돌에 새긴 부처와 보살, 연꽃, 사자, 용, 기왓골 등등 세부 조각들이 섬세하고 화려하기 그지없습니다. 기단부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마음을 담은 듯 아래쪽에서부터 사자, 용, 연꽃, 서유기의 장면, 나한들이 새겼고, 1층부터 4층까지의 몸돌에는 부처의 법회 장면, 5층부터 10층까지의 몸돌에는 합장한 모습의 좌불상을 새겼습니다. 기둥과 공포, 난간과 현판이 몸돌마다 잘 표현되어 있고, 팔작지붕 형태 지붕돌에는 기왓골까지 새겨져 있어 언뜻 보기엔 장엄한 목조 건축 같기도 합니다.

 

 

 

 

 

'아(亞)'字형으로 돌출된 기단은 원나라 때 유행한 라마교의 불탑 기단, 혹은 불상 대좌와 닮아 있다.

 

 

 

1층 몸돌에는 원나라 지정 8년에 세웠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습니다. 탑의 규모가 매우 크고,  전통적인 석탑과 다른 형태인 데다 장식 또한 놀랍도록 화려합니다. 때문에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고려 충목왕과 왕실이 아니라 원나라 승상 탈탈과 기황후의 복을 빌기 위해 세워졌으며 원나라의 장인이 와서 만들었다는 설도 존재합니다. 1824년 간행된 개성부 읍지《중경지》에는 "전하는 말에 의하면, 원나라 승상 탈탈이 자신의 원찰을 세우고 싶어 했는데, 이에 진녕군 강융이 원나라의 장인들을 모집해서 이 탑을 만들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강융은 친원파의 대표적 인물로 그의 딸은 탈탈의 첩이었습니다. 당시 고려는 30년에 걸친 전쟁 끝에 화의를 맺은 1259년 이후 원나라의 영향 아래 있었고,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경천사지 십층석탑 (고려 1358년). 높이 13,5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전시동 1층 '역사의 길' . 국보 86호.

 

 

 

2005년, 용산에 새로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1층 복도 '역사의 길에 우람한 석탑이 천정을 찌를 듯한 자태로 서 있는데, 사람들은 치켜든 고개를 떨굴 줄 모릅니다. 웬만한 건물 5층 높이쯤은 되어 보이는 석탑을 건물 안에 우뚝 세운 것도 신기하지만 경천사지 십층석탑이 이토록 화려하고 아름다운 탑이었나 하고 새삼 느끼게 됩니다. 박물관 3층에서 내려다보아도 장관입니다.

 

 1348년 처음 멋진 모습을 드러냈던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그간의 온갓 수난을 이겨내고 657년 만에 그야말로 환골탈태 하여 다시 한 번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한 장쯤은 찍습니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실내 1층 복도에 전시되어 있지만, 1959년 이후 1995년 경복궁 복원 사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경복궁 내 전통공예관 앞 야외에 서 있었습니다. 1990년대 들어 환경오염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있었으며, 안정성 문제까지 제기돼 보존과 복원 작업이 시급했습니다.

 

 

 

 

 

경복궁의 경천사지 십층석탑. 1955년까지 현재 동궁이 복원된 자리에 있었다.

 

 

 

복원 작업은 국립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1995년부터 2004년까지 10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부재 142점, 탑 안쪽을 채우기 위한 적심 45점 등 187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탑을 해체하고 보니 중심이 되는 부재의 윗면에 '몇 층의 동서'처럼 각각 층수와 방위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탑을 처음 세운 장인들은 언젠가 탑이 해체되더라도 복원될 것을 예상하기라도 했던 것일까요. 매우 요긴한 기록이었습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김사덕 사무관은 "약한 대리석탑인 데다 다면체를 짜 맞춘 구조, 심각한 훼손 등으로 처음 작업에 들어갈 때는 앞이 캄캄했다"고 회고합니다. 현대 기술로도 복원하고 조립하는 데에만 10년이 걸렸으니, 그 옛날 장인들의 솜씨가 새삼 놀랍습니다.

 

복원은 탑재의 상처와 파괴된 부분을 최대한 새로이 보수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석질이 무른 대리석이라 회복 불능으로까지 여겨졌던 석탑을 현재와 같이 되살려높은 것을 두고 관계자들은 문화재 보존 과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평가하고 있습니다. 새로 사용한 부재의 경우 경천사지 십층석탑에 쓰였던 대리석과 가장 비슷하다는 강원도 정선의 대리석이 사용되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와 다시 세워지는 경천사지 십층석탑. 1995년부터 2004년까지 10년에 걸친 복원작업

끝에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다나카의 개성 석탑 탈취 사건

 

훤칠하고 균형 잡힌 자태에 섬세하고 우아한 조각까지! 아름다운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비뚤게 탐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입니다. 다나카는 1907년 1월 20일 순종의 결혼식에 참여하기 이해 일본특사로 파견됩니다. 그는 내심 기뻤을 것입니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어떻게 해서든 이 기회에 자신의 집에 가져다놓으려 마음먹었던 차였기 때문입니다. 다나카가 어떻게 경천사지 십층석탑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일본인 미술사학자인 세키노 타다시가 1902년부터 한반도 전역의 고건축을 샅샅이 조사한 뒤 1904년에 펴낸 《한국건축조사보고》에 그 자세한 위치는 물론 사진까지 실려 있어 이를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조선에 머문 날짜는 열흘 남짓, 다나카는 '조선 내부 대신에게 말하여 동의를 얻었고, 그 대신을 황제의 허락도 얻었다"는 말을 꾸며냅니다.

 "고종 황제가 기념으로 나에게 하사한 것이니, 개성 근처의 절터에 있는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도쿄의 우리 집 정원으로 운반하라."

 1907년 2월 4일, 무기를 가진 일본인 인부 130~200명가량이 허가 문서도 없이 경기도 개풍군의 절터를 급습했습니다. 그러곤 석탑을 해체하려는 그들에게 거세게 항의하는 주민들을 총과 칼로 위협합니다. 인부를 지휘하는 자는 서울에서 악명 높은 골동상인 곤도 사고로였습니다. 10여 대의 달구지에 헐어낸 탑을 싣고 개성 철도역으로 향하는데, 수많은 주민이 막아섰지만 일본 헌병들까지 나서는 바람에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소식은 신문을 통해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 소식을 제일 먼저 알린 것은 <대한매일신보>였습니다. 그러나 헐어 내간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결국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반출되고 맙니다.

 

 

 

 

 

경복궁에서 복원중인 경천사지 십층석탑.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40여년 방치되었다가 1960년에야 복권되었다.

 

 

 

그러나 연일 언론에 이 소식이 오르내리자, 다나카의 악질적인 약탕행위에 대해 국내는 물론 해외언론과 일본인들 사이에서조차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여론이 이와 같은데도 대한제국 內部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조선을 강압통치했던 테라우치 통감조차 엄중히 잘못을 지적하며 반환은 요구했지만 다나카는 꿈쩍도 하지 않고 버티엇습니다. 다나카 역시 만만치 않은 권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포장된 채 도쿄에 있는 그의 집 정원에 10여년 간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1916년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새 총독으로 부임하자 다시 여론이 일어났습니다. 명백한 불법행위를 확인한 조선총독부가 반환을 재차 요구하자 다나카는 마지못해 반환을 결정합니다. 마침내 경천사지 십층석탇이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1918년 11월 15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탑은 이미 해체와 운반과정에서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상처를 입은 상태였습니다. 결국 해체된 상태 그대로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된 채 해방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해방 후에도 석탑은 제대로 돌보아지지 않았습니다. 1960년에야 시멘트에 의존해 억지로 복원된 뒤 1962년 국보 제 8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급한 보존 대책의 필요와 대대적인 경복궁 복원 계획에 따라 1995년 다시 해체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