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19. 19:31ㆍ책 · 펌글 · 자료/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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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하여 집까지 넘긴 어머니는 이제는 남의 집이 된 집에서 속내를 모르고 찾아올 아들을 기다린다. 단 한 끼, 그 집에서 마지막 더운밥을 지어주기 위해, 어머니는 팔린 집이 아직도 내 집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방 안에 옷궤와 이부자리 하나를 그대로 놓아둔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K시로 나가는 어린 아들을 배웅하러 대덕의 차부까지 함께 나간다. 20리는 족히 되는 길이었으리라. 어머니는 아들을 새벽 첫차로 보내고 다시 그 길을 되짚어 돌아온다. 먼동이 터오고 어머니는 그때 하얀 눈 위에 찍힌 두 개의 나란한 발자국을 발견하게 된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듯 찍혀 있는 발자국들. 어머니는 아들의 발자국에 자신의 발자국을 꾹꾹 눈물로 찍으며 돌아갈 집이 없는 마을로 되돌아온다.
─ 이청준<눈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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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 서정주 「선운사 동洞口」
선운사 동백꽃의 질박한 아름다움을 막걸리집 여자의 목쉰 육자배기 가락에 비유한 이 시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 아직 짐작할 수 없는 스무 살의 가슴에도 촉촉한 아름다움으로 닿아 왔다. (물론 이 시비가 살아 있느느 사람의 시비로는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 당시 나는 알지 못했다. 비석이란 어차피 죽은 사람의 면전에 세워지는 것이 상식이라면 살아 있는 미당의 시비가 버젓이 세워질 수 있는 현실이 오늘날 미당 개인이, 혹은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한 시대적 아픔의 징표이기도 하다.)
자연(紫煙). 해거름 무렵, 이 시비의 앞에는 굽는 담배 한 대의 맛이 ‘목쉰 육자배기’ 가락처럼 좋았다.
등운암으로 가던 호젓한 숲길에 자리했던 미당의 시비는 지금은 정류장에서 경내에 이르는 대로변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시비가 차지할 최적의 자리를 마다하고 상가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셈이었다. 켄터키 치킨이나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주는 가게가 자리했으면 적당할 자리였다. 수수하고 질박했던 옛 시비의 모습은 어디 가고 없었다. 대리석을 깔아 만든 받침대 위에 올라선 시비의 모습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스무 살 적 첫 선운사 여행에서 내게 지극히 평온한 아름다움을 안겨주었던 시비였다.
- 곽재구 『예술기행』p5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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