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25. 11:05ㆍ책 · 펌글 · 자료/문학
1
박 시인은 눈물이 많았다.
그는 자주 울었다. 내가 울지 않던 그를 두 번밖에 못 보았을 정도로 그리 흔히 울었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그의 눈물을 불렀다.
갸륵한 것, 어여뿐 것,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 소박한 것, 조촐한 것, 조용한 것, 알뜰한 것, 갓 태어난 것, 저절로 묵은 것,
시래기 삶는 냄새, 오지 굴뚝의 청솔 타는 연기, 논누렁 미루나무 호드기 소리, 뒷간 지붕 위의 호박 넝쿨, (………)
아침 9시부터 백제 유민 박씨와 나는 난로가 후끈한 중국집 식탁에 늘어 붙어,
창밖에 쏟아지는 함박눈을 내다보며 고량주를 마셨다.
“왜정 때 내가 조선은행에 댕길 적에 말이여…….
조선은행券 현찰을 곳간차에 가득 싣고 경원선을 달리는디,
블라디보스톡까지 논스톱으로 달리는디 말이여……."
“경비원으로 뭍어 갔더라, 그 말이시구먼.”
“야, 너 웨 그러네? 웨 그려? 이래 뵈두 무장 경호원이 본인을 경호허던 시절이 있어야.
현찰 운송 책임을 내가 자원했던 거여. 너 참 이상해졌다야. 웨 그려?
오─ 그 눈…… 그 눈송이…… 그 두만강…….”
“…….”
“이까짓 눈두 눈인 중 아네? 눈인 중 알어? 너두 한심하구나야.
원산역을 지날 때 눈발이 비치더니, 청진을 지나니께 정신읎이 쏟어지는디,
아 그런 눈은 처음이었었어…… 아─ 그 눈…… 그 눈…….”
그는 이미 떨리는 음성이었고 두 눈시울에는 벌써 삼수갑산 저문 산자락에 붐비던 눈송이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차가 두만강 철교를 근너가는디…… 오! 두만강…… 오, 두만강!
내 눈에는 무엇이 보였겄네? 눈! 그저 쌓인 눈, 쌓이는 눈…… 아무것도 안 보이구 눈 천지더라.
그 눈을 쳐다보는 내 마음은 어땠겠네? 이 내 심정이 어땠겠어?”
“워땠는지 내가 봤으야 알지유.”
“그러냐. 야, 너두 되게 한심하구나야. 그래 가지구 무슨 문학을 한다구.
나는…… 나는 울었다. 그냥 울었다. 두만강 눈송이를 바라보며 한없이 울었단 말여…….
오, 두만강…… 오, 두만강의 눈…… 오…… 오…….”
그는 아침 9시 반부터 두만강을 부르며 울기 시작하여,
그날밤 9시 반 넘어 여관방에 쓰러져 꿈결에 ‘두만강 뱃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기까지 쉬지 않고 울었다.
2
1982년 2월 7일. 나는 작가 강순식 씨와 더불어 박 시인의 추모 여행을 하였다.
시인의 옛동산 옥녀봉은 아직 그 모습이 남아 여남은 그루의 고목과 오막살이 예닐곱 채를 벼랑 아래에 감추고 있었다.
“여보, 구장터 욕보네 집이 워디다요?”
“욕쟁이 여편네 찾소? 따러오우.”
질어터진 골목을 외로 도니 술집 서넛이 의좋게 마주 보고 있었다.
박 시인이 자주 다니던 곳은 가운데의 서산집.
주모의 이름은 박종선. 논묏들 조선감자같이 우둥퉁한 몸매에 파뿌리를 인 여인, 욕쟁이는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자기 또래의 아낙네와 소주를 홀짝이다 말고,
“워디서 투가리 같은 것만 두 것이 온댜?”
“투가리 같은 게 뭐요, 황산벌 배추꼬리마냥 미끈한 미남더러…….”
“미남? 장마에 밀려와 미남이냐?”
“어여 술이나 주셔. 늦으면 옆댕이 옴팡집으루 갈랑께.”
“옴팡집 가서 옴팍 빠져 뒈질 놈. 제 발루 기어온 놈이 맨 입으로 가는 꼴 못 봤다.
그런디 늬덜은 워디서 뭣 땜에 온 것들이냐?”
“사람 좀 찾아보려 왔시다. 성은 박씨고…… 시인이오.”
“시끄러 작것아, 시인은 가고 시러배들만 싸가지 읎이 뫼여든당께.”
“그러지 말고 박 시인이 와서 놀던 얘기나 해보시라니까요.”
“이런 술집에 와서 술값 빼구 갈라는 잡늠두 다 있네.”
하며 주모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박 시인이 시낭독하던 시늉을 한 자락 펼쳤다.
“꼭 애들 같은 사람이지. 늙은 애기여.
저 옥녀봉이랑 놀묏나루를 가리키며 이러구저러구 해쌀 때는 영낙 웂는 철떡쉥인디,
그래두 이런 세상에 그런 이를 워디서 귀경허겄냐?”
주모는 강경 읍내의 마지막 유물이기가 쉬웠다.
박 시인은 이 주모를 통하여 자기 세대의 자녕을 음미했을 거였다.
- 이문구,『문인기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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