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

2015. 2. 27. 11:05책 · 펌글 · 자료/ 인물

 

 

 

전형필(全鎣弼, 1906년 7월 29일 ~ 1962년 1월 26일)은 대한민국문화재 수집, 보존, 연구가이며 교육가이다. 자는 천뢰(天賚), 호(號)는 간송(澗松), 지산(芝山), 취설재(翠雪齋)이다.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훈민정음 원본 등 국보 12점, 보물 10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등 수많은 문화재를 수집하고, 일본으로 유출된 중요한 문화재들을 되찾아와 1938년 조선 최초의 근대사립미술관인 보화각을 세웠다. 해방 후 혼란기와 한국전쟁중에 한국의 소중한 문화재들을 지켜내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의 사후 보화각은 전형필 선생의 유족들과 지인들에 의해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으로 개편되었고, 간송미술관에서는 1971년 봄부터 '겸재전'(謙齋展)주제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일년에 2차례씩 무료 일반공개를 하고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2012년 12월 14일 전형필의 가옥을 등록문화재 제521호로 지정하여 지정,관리중에 있다.

 

 

 

 

 

 

 

간송 전형필

 

 

 

저자 이충렬

저서(총 6권)
이충렬1954년 서울 출생, 1976년 대학 재학 중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1994년 '실천문학' 봄호에 단편소설 '가깝고도 먼 길'로 등단했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격월간지 '뿌리' 편집장을 지냈다. '샘이 깊은 물', '한겨레', '국민일보', '경향신문' 등에 단편소설, 르포, 칼럼을 써왔다. 현재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거주하면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간송 전형필', '그림애호가로 가는 길' 등이 있다. 고국을 떠나 이국에서 보내야 했던 그리움과 고독의 시간을 메우기 위해 그림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 10년이 넘었고, 자연스레 해외에서 떠도는 한국 근대 관련 그림들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국내외 화가들이 그린 작품은 물론이고 당시의 문헌, 국내외 신문시가, 자료들도 함께 모으게 되었다. 2006년 9월 전북 도립미술관에서 열린 '푸른 책에 비친 옛 한국, 엘리자베스 키스전'에 주요 작품들을 출품해 언론과 학계의 큰 주목을 이끌어냈고, 국립현대미술관과 경남도립미술관에서도 같은 제목의 전시회가 잇달아 열리는 성과를 거뒀다. 특히 기획전의 성공은 한국사회에서 근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풍부하고 정확한 사료를 바탕으로 우리 역사의 숨겨진 이면을 끝까지 추적해내는 끈기와,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를 통한 전달력, 방대한 인문학적 소양을 통한 탁월한 해석능력은 대중역사서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문_ 여기, 간송 선생이 있다

청잣빛 하늘, 천 마리의 학
무거운 짐을 진 식민지 소년
무엇을 할 것인가?
평생의 스승, 위창 오세창
하늘이 내린 재산
첫 수집품
세상의 눈에서 멀어져야 문화재를 지킨다
고서화 수집의 전진기지, 한남서림
황금광 시대의 꿈
우정과 헌신의 동지, 이순황과 신보
추사를 만나다
겸재와 진경시대
현해탄을 건너 혜원을 찾아오다
위기!
국보가 된 참기름병
기와집 400채의 승부
우리나라 최초 개인 박물관, 보화각
구제와 교육사업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하다
아, 전형필

해설_ 간송 전형필 수집품의 문화사적 의미
간송 수집품 중 지정 문화재 목록
간송 전형필 연보
참고 도서
수록 작품 찾아보기

 

 

 

 

 

 

1

 

 

‘형제는 베오개(梨峴)에서 가장 큰 상권을 가지고 있는 76세의 兄 정창엽과

무과에 급제해 종2품 가선대부까지 지낸 弟 전창렬이다.

형과 동생이 아흔아홉 칸 한 집에 대문만 따로 내어 살았다.’

 

‘전형필은 형인 전창엽의 손자다.

전창엽은 영기와 명기 두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동생 전창렬이 후사를 보지 못하자 작은나들 명기를 양자로 보냈다.

그런데 양자로 간 명기에게도 후사가 없었다.

게다가 튼아들 명기도 아들 하나 보고는 끝이었다.

영기의 장남 형설이 벌써 열다섯 살이었다.

이러한 때에 형필이 태어난 것이다. 영기의 나이 42세, 부인 밀양 박씨는 45세였다.

형필은 태어나자마자 작은아버지 명기의 양아들이 되었다.

양자로 들어갔다지만, 양부모에 양조부모까지 다 한 집에 살았으므로 양육은 친부모가 맡았다.’

 

‘전형적인 무반 집안에서 태어난 전영기는 무관을 지내다가 중추원 議官을 역임한 후,

베오개 장터에서 몇 대째 운영해온 미곡상을 물려받아 경영하고 있었다.

전형필의 외조부인 박태윤은 훈련원 첨정을 지낸 인물러, 같은 무반 집안끼리 혼사를 맺은 것이었다.

외숙부 박대혁의 3남1녀 중 둘째아들이 월탄 박종화로 형필보다 다섯 살 위였다.’

 

 

 

 

‘전형필은 보통학교에 입학할 당시에 친조부 전창엽과 양조모의 喪이 끝나지 않아 흰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다.

그런데 같은 해 11월에는 양조부 전창렬이, 두 달 뒤인 1918년 2월에는 친조모가 세상을 떠났다.

1919년 10월에는 양부 전명기가, 보름 후에는 친형인 전형설이 28세의 젊은 나이에 후사도 없이 급사했다.

이렇듯 계속된 집안의 상으로 인해 전형필은 친가와 양가의 유일한 적손이 되었다.’

 

‘큰아들 형설의 급사로 손자 없음을 아쉬워하던 전영기는 그해 봄 형필을 고성 이씨와 혼인시켰다.

그런데 고성 이씨가 몇 달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음 해 여름 김해 김씨 점순과 다시 결혼시켰고, 그녀는 전형필의 평생 배필이 되었다. 

그들 사이에 귀한 아들 광우가 태어났으나 광우는 두 돌을 넘기자마자 세상을 떠났고,

해를 넘겨 전형필이 대학 졸업반이 되던 1929년 2월에 친부 전영기도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가 전형필이 24세였다. ’

 

 

 

 

 

 

‘전형필은 상복을 입은 채 대학 4학년을 마치고 1930년 3월 경성으로 돌아왔다.

그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친부와 양부가 남긴 전답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왕십리 · 답십리 · 청량리 · 송파 ·장동 등의 인근에서부터,

경기도 고양 · 양주 · 광주, 황해도 연안과 연백, 충청도 공주 · 서산까지 둘러보면서

전형필은 자신이 물려받은 재산이 얼마나 엄청난지 실감했다.

 

전형필이 소유한 논은 800만 평(4만 마지기)이 넘었다.

200평에서 80킬로 쌀 한 가마니가 나오니, 한 해 수확이 4만 가마니(2만 석)였다.

소작인들에게 후하게 분배하고 1년에 쌀 2만 가마니를 거둬들였다.

당시 쌀 한 가마니가 16원 정도였으니, 1년 수입이 32만원이었다.

세금과 인건비, 유지비 등등을 제해도 순수입이 15만 원 정도 되었다.

이를 당시 서울의 기와집값으로 환산하면 150채,

기와집 한 채를 요즘 아파트 평균 가격인 3억 원으로 계산하면 450억 원이다.

소유한 논의 가치를 계산하면 더욱 엄청나다.

당시 논 한 마지기가 50원이었으니, 4만 마지기면 200만원이다.

기와집 2천 채, 지금으로 보면 6천억 원이었던 셈이다.

당시 재산으로 100만원이 넘으면 '백만장자'라 불렀는데,

조선총독부 기록에 의하면 조선인 중에 43명이 있었다. (※천석꾼 : 750명)

 

 

 

 

 

 

 

 

 

 

월탄 박종화

춘곡 고희동

위창 오세창

 

(한남서림) 백두용

(조선미술관) 우경 오봉빈

심전 안중식 -> 심산 노수현, 청전 이상범

이순황

신보 기조(新保喜三)

김용진  - 혜원 <미인도>

* 심사정 <촉잔도>- 구매 6천원 수리비 5천원 , 이인문 <강산무진도>

* 야나기 무시요네 《조선과 그 예술》, 아사카와 다쿠미 《조선의 소반》 《조선 도자명고》

야마나카 - <혜원 풍속화첩> 2만5천원 (점당 2억5천=75억원)

괴산 팔각당형 부도

존 개스비, 명품 청자 20점 - 40만원(1200억원. 점당 60억원) ← 공주 논 1만 마지기 팔아서

훈민정음, 1만원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1부_나는 내것이 가장 아름답다: 설레고, 떨리고, 사무치고!


1.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상, 앙드레 말로를 사로잡다
2. 고향, 해나무골 이야기
3. 개성박물관에서 스승 고유섭을 만나다
4. 모호한 미래 앞에 서서
5. 인생을 가르는 결정
6. 별이 지다
7. 개성박물관에서 첫해, 설렘과 떨림으로
8. 개성 3걸의 탄생
9. 글의 빛, 오래된 것의 향기
10. 웅장하고 의젓한 우리 탑
11. 이 풍진 세상에서

2부_ 한국의 美를 찾아서: 홀리고, 취하고, 탐하고!


12. 박물감이 되다
13. 금부처님 밀송 사건
14. 전형필과 이경성을 만나다
15. 전쟁, 국보의 수난
16. 서울 수복, 그리고 다시 피난
17. 대통령의 문화재 국외 피난 지령
18.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19. 돌아온 서울에서, “사흘 안에 박물관을 이사하시오!”
20. 덕수궁 시대
21. 가난하고도 서러운 나의 조국
22. 우리 국보의 첫 해외전시
23. 한국적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24. 유럽 순회 전시회
25. 아, 전형필! 돌을 바치며 울다
26. 제집에서 홀대받는 문화재

3부_국보 시대: 발굴하고, 지키고, 알리고!


27. “이 사금파리가 그렇게 중요한 겁니까?”
28. 비석조각으로 천년의 역사를 추적하다
29. 아! 청자기와
30. 박물관 만년과장
31. 빼앗긴 문화재를 찾아
32. 관재수
33. 불화를 살려라
34. 상심
35. 경복궁 시대
36.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다
37. 한국 문화의 역사는 5000년이다
38. 새로 깃든 성북동 126번지
39. 미국 순회 전시회
40. 친일청산에 대해 발언하다
41. 박물관과 한평생 살고 죽고

추천의 말_정양모_제6대 국립중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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