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16. 13:58ㆍ책 · 펌글 · 자료/ 인물
저자 김점선
1946년 4월 24일 출생. 2009년 3월 22일 별세. 홍익대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1972년 제1회 앙데팡당 전에서 백남준, 이우환의 심사로 파리 비엔날레 출품 후보에 선정되며 등단하였다. 자유롭고 파격적인 그림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1987~88년 2년 연속 평론가협회가 선정한 미술 부문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로 선정되었다. 1983년 첫 전시회를 연 뒤 20년 이상 개인전만 60여 차례 열었으며, 2002년부터 디지털 판화전도 개최했다. 1975년 실험영화 '홍씨 상가' 제작 연출. 1988년 예술평론가협회 미술부문 올해의 예술가 선정. 작가는 작품 활동 외에도 KBS-TV '문화지대'의 진행자를 맡는 등 문화 전방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지은 책으로는 '10cm 예술', '나는 성인용이야', '나, 김점선', '바보들은 이렇게 묻는다', '김점선 스타일', 그림동화 시리즈 '큰엄마', '우주의 말', '게사니' 등이 있다.
점선을 앎은 사람, 김점선
개정판을 내면서
이 책을 내면서
1부 내 가슴에 살아 있는 지난날들
2부 나는 나 자신을 몰아갈 뿐이다
3부 풀 향기 속에서
4부 붓 가는 대로
5부 내 식으로 산다
역시 세상에 우연이란 건 없나 봅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 되시는 분이 이만저만 훌륭하신 분이 아니로군요.
먼저 (故)김영희 교수의 부모님들도 그렇더구만은......
원래 개성사람들이 수준이 높은 건가요?
외할머니는 조선왕조시대 사람인데 젊어서는 소설을 몇십 권이나 읽었고, 동네 아낙들과 처녀들을 모아놓고 소리 내어 읽어주기도 하고, 수본(繡本)이 되는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외할머니는 시집갈 때까지 밥 짓는 일이나 허드렛일 하는 것을 배운 적이 없는데도 시집가서 사니까 다 되더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를 키울 때도 집안일을 전혀 시키지도 가르치지도 않고, 유쾌하게 행복하게 어린시절을 보내라고 자꾸 말씀하셨다고 한다.
내가 분명한 잘못을 하면 어머니는 조용히 나를 불러 방에 나만 남게 하고서 내가 스스로 차근차근 자신이 한 일을 얘기하도록 했다. 어머니는 내가 말하는 것을 거들어서 결국은 나 자신이 잘못을 스스로 깨닫고 자신의 입으로 어머니께 말하도록 유도했다. 그 진지한 대화는 어떤 때는 서너 시간에 이를 때도 있는데, 언제난 한결같은 것은 끝에 가서는 내가 엉엉 운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잘못을 뉘우치고 수치심을 느끼다가, 나아가서는 잘못한 그점만 고치면 나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울고 또 울었다. 그런 때가 내 생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의 시간이었다고 기억된다. 나중에 커서 소크라테스를 읽으면서 어디선가 경험한 듯한 느낌이 자꾸 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어머니가 나를 불러내 잘못을 스스로 말하게 한 그 기억이었다.
내가 다 자라서 바람이 나서 집 나가 어딘가에서 아이를 낳고 살고 있는데 어머니가 몇 년 걸려 수소문해서 나를 찾아오셨다. 내 아이가 돌이 될 때였다. 아이를 덥석 안더니 볼을 비비면서 "아이구 이뻐라!"만 계속하시는 거였다. 그 다음날 또 오셨다. 이번에는 아이 돌옷을 손수 짓고 돌날에 차릴 음식도 손수 만들어 오셔서 내 아이는 전혀 생각지도 않던 돌상을 받게 되었고 사진도 찍었다. 잡스런 질문은 하나도 하지 않고 그저 기뻐만 하시다가 가셨다.
(어느날 엄마가 날 조용히 불렀다. 내 남동생이 여자가 생겨서 곧 혼인시킬거니 날더러 집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시집 안 간 시누이가 있으면 며느리에게 떳떳지 못하다고 했다. 깊은 슬픔이란 말은 이런 때 써야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며느리 눈치 안 보려고 나를 내치다니, 얼마 후 집 나왔고 지금까지 집엘 안 들어갔다. ◀ 이런 사연이 있었군요.)
X
사춘기를 거치면서 여러 나라 시인들이 쓴 시를 읽고 그들의 생애를 알게 됐다. 수많은 시인이 후대가 없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언제부턴가 명절날이면 그들이 문득 생각났다. 그 중에서도 아르튀르 랭보가 제일 불쌍했다. 그러던 어느 해, 아버지 몰래 불어(佛語)와 한자가 뒤섞인 랭보의 지방을 써서 식구들 몰래 차례상 뒷다리, 안 보이는 곳에다 붙였다. 나중에는 랭보 외에도 베를렌, 말라르메, 보들레르의 지방도 만들었다.
우리 집에서 개를 세 마리 길렀다. 한 마리는 코카스패니얼이고 두 마리는 잡종 똥개인데 잡종 중 한 마리가 문제엿다. 개면 개답게 짖고 까불어야 하는데, 잡종 개는 개답지 않게 품위가 있었다. 부끄러워하는데 자신이 동물인 게, 개인 게 부끄러운 듯이 보였다. 내가 밥을 주면서 두 눈을 쏘아보면 눈을 마주쳤다가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뿐만 아니라 내가 보는 데서는 절대로 밥을 먹지 않았다. 다른 두 마리는 국자로 밥을 퍼 넣기도 힘들게 밥통에 머리를 디밀고 먹는데, 그 잡종 개는 내가 밥통에 밥을 부어도 딴 데 쳐다보고 있다가 내가 없어져야 먹는다. 몰래 쳐다보면 밥을 먹고 있는 게 보인다. 내가 다가가면 먹다가도 중단하고 먼 곳을 본다.
“너는 니가 개인 게 창피하냐? 뭔 죄를 져서 개로 태어났냐? 개면 개답게 살아야지. 웃기지 마라, 이 개놈아. 너는 그냥 갠데, 놀고 있네. 개면 개답게 개로 살아라, 이 개야.” 내가 이렇게 욕하면서 째려보면 꼭 꾸중 듣는 사람처럼 침묵한 채 시선을 아래쪽 한 곳에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고 듣고 있다. 그 개는 틀림없이 전생이 사람, 그것도 꽤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어떤 사연으로 개로 태어난 게 틀림 없다. 품위로서, 그는 개이지만 나보다 한 수 위다.
남편은 또 며칠인가를 외박하고 늦은 밤중에 나도 잘 아는 선배와 함께 들어왔다. 선배가 있건 없건 나는 또 싸움을 걸었다. 막 싸우고 있는데 오줌이 급해졌다. 나는 더 빨리 내 분노를 말하고 또 말하고 싶어서 변소에 가기가 싫었다. 싸우다 변소 가는 일은, 그것도 내가 건 싸움을 내가 중단시키는 일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언가를 잔뜩 밟고 선 자세 그대로 쏴악 오줌을 누었다. 오줌이 소리를 내면서 방바닥으로, 깔개 위로, 방석 등등의 위로 떨어져 흘렀다. 이렇게 몇 년을 싸운 끝에 그는 내가 못 참을 옳지 못한 짓은 아예 하지 않거나 적어도 내게 들키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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