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25. 10:08ㆍ산행기 & 국내여행
누가 오늘 이 음악을 스크랩해갔습디다?
친구들이랑 부안쪽으로 해서‥ 망년회 겸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똑같은 코스를, 똑같은 멤버로 몇 해 전에도 갔었더랬죠.
이번엔 선운사는 빼고, 격포 채석강 -> 모항 -> 내소사 -> 곰소, 이렇게 돌았습니다.
변산반도는, 새로울 것이야 없지만 푸근한 느낌이 들어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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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계룡시 두계역 근처 포스코 아파트에 사는데, 바로 옆에 김장생 고택이 있더군요.
대전에도 뒤져보면 고택들이 몇 개 있습니다.
沙溪 김장생 고택이 생각밖으로 집이 여러 채에다 방도 무지 많더군요.
방이 전부 50개는 될 것 같습니다. 큰부자였네요.
이 양반, 율곡의 후배이자 우암 송시열의 선배가 되지요?
집안 간의 인맥으로, 특히 할아버지 줄을 잡고 출세한 것 같습니다.
본관은 광산.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대사헌 계휘(繼輝)의 아들이며, 집(集)의 아버지이다.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 近思錄〉 등을 배웠고, 장성하여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에게 사사했다. 1578년(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창릉참봉에 천거되었다.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명나라 사행(使行)을 가는 아버지를 수행한 뒤,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이어 순릉참봉·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동몽교관·통례원인의를 거쳐 1591년 정산현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으로서 군량 조달에 공을 세웠다. 그뒤 남양부사·안성군수를 거쳐 1600년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가 되었다. 1602년에 청백리에 뽑히고 이듬해 익산군수로 나갔으나, 북인(北人)이 득세하게 되자 1605년 벼슬을 버리고 연산으로 낙향했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잠시 회양·철원부사를 지냈다. 그러나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할아버지이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 등이 역모를 꾀했다 하여 사사되거나 옥에 갇힌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동생이 이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어 심문을 받았다. 무혐의로 풀려나온 뒤 곧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연산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몰두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장령에 오르고, 이어 성균사업(成均司業)·집의·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내면서 원자(元子)를 가르치는 등의 일을 맡아보았다. 이 가운데 성균사업은 그를 위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뒤 좌의정 윤방(尹昉)·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천거로 공조참의를 지냈으며, 이어 부호군을 거쳐 1625년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다음해 다시 벼슬에서 물러나 행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하여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워 이이·성혼을 제향했으며, 같은 해 용양위부사직(龍驤衛副司直)으로 옮겼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는 한편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청나라와의 강화에 반대했으나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했다. 그해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1개월 만에 물러난 뒤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했다. 그뒤 1630년에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줄곧 머물면서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연산에서 83세의 나이로 죽어, 진잠(鎭岑)에 장사지냈다.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중심 건물이랄 수 있는 사랑채가 있더군요.
크지도 않고 질박한 모습이 권위가 느껴지지 않아 보기 좋았습니다.
시(市)에서 하는 건지, 문화재청에서 하는 건지, 집안사람들이 하는 건지,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더군요.
저는 사림이니 학파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 별로 좋게 생각 안합니다.
예(禮)니 뭐니 하며 학문을 빙자한 '패거리들', '기득권을 지키려는 토호세력' 쯤으로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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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시각이 10시 가까이 됐을 겁니다.
김제IC로 빠져서 부안 지나 격포에 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채석강, 예전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죠.
...... 이젠 어딜 가도 다 그래요.
여기서 점심먹었죠. 아니, 술 마셨습니다. ㅋㅎ
좌판을 보니까 활어는 별로 없고 조개뿐이던데, 피조개만 있지 꼬막은 안 보입디다?
뭘 사거나 먹기엔 이곳보다 곰소가 나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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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반도 똥꾸멍' - 모항(茅港)
여기 은근히 괜찮아요. 얼핏 평범한 듯해서 지나치기가 쉬운 곳인데,
가만 둘러보면 그런대로 운치가 있습니다.
펜션이 많이 생겼더군요.
우리 칠복일 한번 데리고 온다 온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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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來蘇寺)」<─ 난 늘~ 이 이름이 의심스럽습디다.
백제가 망하고 나서,, 나라는 망했어도 집과 사람을 살아남기려 하니 알랑방귀 뀌느라 ─
'소정방(蘇定方)'이란 이름을 대문간에다 턱 달아놔서 "여긴 소정방 나와바리다!" 했을 개연성이 다분하구만,
(마치 백제 땅에 지어진 대부분의 절들이 진흥왕 때 창건했다는 것처럼)
허나, 안내문 같은 거 어디에도 그건 죽어도 아니라고 하니...
전나무 향(香)이 좋습디다. 주변에다 어린 전나무를 많이 심었더군요.
거름 주고 비료 주고 그러면 금방 클 거예요. 30년만 돼도......
마이산(馬耳山)까지야 아니지만 여기도 신기(神氣)가 좀 느껴집니다.
분위기가 갑사(甲寺)랑도 비슷해요.
얼핏 가람 배치가 어수선하달 수도 있는데, 저는 괜찮습디다.
고마고마 한 것들이, 요렇게 조렇게 널려 있는 게,
부자 마을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람하게 큰 건물도 없고, 단청을 안해서 튀는 건물도 없고…….
괘불지주, 이렇게 온전하게 서 있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당간지주(幢竿支柱) 는 깃발을 거는 거고,
괘불지주(掛佛支柱)는 괘불을 거는 거고‥‥,
저 집은 '진짜배기' 같지요? ㅋㅎㅎ
관광지임에도 공부하는 스님들이 꽤 있는 듯합니다.
봄에 등산으로 다시 한번 와야겠어요.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좋답디다. 직소폭포도 있고. 저수지도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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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소항 들려서
김도 사고, 마른 새우도 사고, 갈치 널어 말린 것도 사고,
6시 돼서 대전 들어왔습니다.
족발도 먹고, 두부두루치기도 먹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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