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16. 12:08ㆍ詩.
만해스님 시는 제가 대략 다 읽어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네요. 처음 보는 시가 많습니다.
심우장 시절 전까지의 시를 읽어보았는데, 좋은 작품은 몇 편 안되는 것 같습니다.
온통 다 사랑타령이네요. 마치 사춘기 소년의 일기장을 보는 듯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만해스님의 혼을 쏙 뽑아간 저 첫사랑의 여인은 누구랍니까?
‘시 감상이나 미술작품 감상이나 결국은 다 마찬가지인 거구나’ 하는 생각이 거듭 듭니다.
작품성과 / 작가의 이력과 / 제작상황을 / 다 알아야만 제대로 된 평가를 하겠습니다.
어떻든 간에 문학, 미술, 음악,, 아무리 大家라고 해도 명작은 10여 작품을 남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만해 스님은 죽는 날까지도 애국애족· 독립투사의 길을 벗어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크게 깨쳤다는 스님들께 묻고 싶습니다. 애국애족은 집착 아닙니까?
부모자식 남녀간처럼 사적인 사랑만이 집착이고 공적인 것에는 낫씽인 것입니까?
40살에 크게 깨쳐서 대자유를 얻었다고 칩시다. 나머지 30년 인생은 뭔 재미로 삽니까?
영화「인터스텔라」보셨지요? 그것이 불교 해탈의 세계와 뭔 관련이 있습니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천국 모습과는 또 뭔 연관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눈 뜨게 해주고 열어주는 이는 종교 · 종교지도자가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이고, 개인적 구도와 성찰은 또 다른 별개 차원의 것입니다. 왜 병립이 안됩니까?
저는 만해스님의 ‘사랑 찬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흠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긴하지만 일련의 작품성을 가지고 볼 때,「5대 시인」에 넣기에는 좀 부족하단 생각입니다.
(그러면 5대시인으로 누구를 꼽을까요?)
시집 머릿말을 이렇게 쓰셨네요.
군말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 저자
* 기룬 : 그리운의 충청도 사투리
‘너에게 님이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라고 하셨으니, 네가 그리워하는 것은 결국 네 자신일 뿐이다, 그런 말인가요?
제1부 님의 침묵(沈默)
이별은 미의 창조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없는 황금과
밤의 올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
<님의 침묵> 다음으로 올려져 있는 시입니다.
저는 도통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는데, 혹시 아시는 분 계십니까? 부탁 좀……
세번째 시 제목이 <알 수없어요> 입니다. ㅎㅎㅎ
이별
아아, 사람은 약한 것이다. 여린 것이다. 간사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진정한 사랑의 이별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죽음으로 사랑을 바꾸는 님과 님에게야, 무슨 이별이 있으랴.
이별의 눈물은 물거품의 꽃이요, 도금(鍍金)한 금방울이다.
칼로 베인 이별의 <키스>가 어디 있느냐.
생명의 꽃으로 빚은 이별의 두견주가 어디 있느냐.
피의 홍보석으로 만든 이별의 기념 반지가 어디 있느냐.
이별의 눈물은 저주의 마니주(摩尼珠)요, 거짓의 수정(水晶)이다.
사랑의 이별은 이별의 반면(反面)에 반드시 이별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있는 것이다.
혹은 직접의 사랑은 아닐지라도 간접의 사랑이라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별하는 애인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것이다,
만일 애인을 자기의 생명보다 더 사랑한다면
무궁을 회전하는 시간의 수레바퀴에 이끼가 끼도록 사랑의 이별은 없는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참>보다도 참인 님의 사랑엔 죽음보다도 이별이 훨씬 위대하다.
죽음이 한 방울의 찬 이슬이라면 이별은 일천 줄기의 꽃비다.
죽음이 밝은 별이라면 이별은 거룩한 태양이다.
생명보다 사랑하는 애인을 사랑하기 위하여는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위하여는 괴롭게 사는 것이 죽음보다도 더 큰 희생이다.
이별은 사랑을 위하여 죽지 못하는 가장 큰 고통이요, 보은이다.
애인은 이별보다 애인의 죽음을 더 슬퍼하는 까닭이다.
사랑은 붉은 촛불이나 푸른 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먼 마음을 서로 비치는 무형에도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애인을 죽음에서 잊지 못하고
이별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애인을 죽음에서 웃지 못하고
이별에서 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인을 위하여는 이별의 원한을 죽음의 유쾌로 갚지 못하고 슬픔의 고통으로 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차마 죽지 못하고 차마 이별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곳이 없다.
진정한 사랑은 애인의 포옹만 사랑할 뿐 아니라 애인의 이별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때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간단이 없어서 이별은 애인의 육 뿐이요, 사랑은 무궁이다.
아아, 진정한 애인을 사랑함에는 죽음은 칼을 주는 것이요, 이별은 꽃을 주는 것이다.
아아. 이별의 눈물은 진이요, 선이요, 미이다.
아아, 이별의 눈물은 석가요, 모세요, 잔 다르크다.
*摩尼(마니) 용왕(龍王)의 뇌 속에서 나왔다고 하는 보물. 이것을 얻으면 소원이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함.
*間斷(간단) 1. 잠깐 끊임 2. 쉴 사이
가지 마셔요
그것은 어머니의 가슴에 머리를 숙이고,
아기자기한 사랑을 받으려고 삐죽거리는 입술로 표정하는
어여쁜 아기를 싸안으려는 사랑의 날개가 아니라 적(敵)의
깃발입니다.
그것은 자비의 백호광명(白毫光明)이 아니라 번득거리는
악마의 눈빛입니다.
그것은 면류관(冕旒冠)과 황금의 누리와 죽음과를 본체도
아니하고 몸과 마음을 돌돌 뭉쳐서 사랑의 바다에 풍덩
넣으려는 사랑의 여신(女神)이 아니라 칼의 웃음입니다.
아아 님이여, 위안(慰安)에 목마른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대지(大地)의 음악은 무궁화(無窮花) 그늘에 잠들었습니다.
광명(光明)의 꿈은 검은 바다에서 자맥질합니다.
무서운 침묵은 만상(萬象)의 속살거림에 서슬이 푸른 교훈을
내리고 있습니다.
아아 님이여, 새 생명의 꽃에 취하려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려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거룩한 천사의 세례를 받은 순결한 청춘을 똑 따서 그 속에
자기의 생명을 넣어 그것을 사랑의 제단(祭壇)에 제물(祭物)로
드리는 어여쁜 처녀가 어디 있어요.
달콤하고 맑은 향기를 꿀벌에게 주고 다른 꿀벌에게 주지 않는
이상한 백합꽃이 어디 있어요.
자신의 전체를 죽음의 청산(靑山)에 장사지내고 흐르는 빛으로
밤을 두 조각에 베는 반딧불이 어디 있어요.
아아 님이여, 정(情)에 순사(殉死)하려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그 나라에는 허공이 없습니다.
그 나라에는 그림자 없는 사람들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에는 우주 만상의 모든 생명의 쇳대를 가지고 척도(尺度)를
초월한 삼엄한 궤율(軌律)로 진행하는 위대한 시간이 정지되었습니다.
아아 님이여 죽음을 방향(芳香)이라고 하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오셔요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
당신은 당신이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이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당신은 나의 꽃밭으로 오셔요.
나의 꽃밭에는 꽃들이 피어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꽃 속으로 들어가서 숨으십시요.
나는 나비가 되어서 당신이 숨은 꽃 위에 가서 앉겠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은 당신을 찿을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이리 오셔요.
당신은 나의 품으로 오셔요.
나의 품에는 부드러운 가슴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머리를 숙여서 나의 가슴에 대십시오.
나의 가슴은 당신이 만질 때에는 보드랍지마는,
당신의 위험을 위하여는 황금의 칼도 되고, 강철의 방패도 됩니다.
나의 가슴은 말굽에 밟힌 낙화가 될지언정,
당신의 머리가 나의 가슴에서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에게 손을 댈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당신은 나의 죽음속으로 오셔요.
죽음은 당신을 위하여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나의 죽음의 뒤에 서십시오.
죽음은 허무와 만능이 하나입니다.
죽음의 사랑은 무한인 동시애 무궁입니다.
죽음의 앞에는 군함과 포대가 티끌이 됩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차라리
님이여, 오셔요. 오시지 아니하려면 차라리 가셔요.
가려다 오고 오려다 가는 것은 나에게 목숨을 빼앗고 , 죽음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책망하려거든 차라리 큰 소리로 말씀하여 주셔요, 침묵으로 책망하지 말고.
침묵으로 책망하는 것은 아픈 마음을 얼음바늘로 찌르는 것입니다 .
님이여, 나를 아니 보려거든 차라리 눈을 돌려서 감으셔요.
흐르는 곁눈으로 흘겨보지 마세요.
곁눈으로 흘겨보는 것은 사랑의 褓보에 가시의 선물을 싸서 주는 것입니다.
*
<가지 마셔요> <오셔요>는 금방 알겠네요. 일제에 굴종하지 말고 저항하라는…….
<차라리>도 같은 류가 아닐까요?
나의 길
이 세상에는 길도 많기도 합니다.
산에는 돌길이 있습니다.
바다에는 뱃길이 있습니다.
공중에는 달과 별의 길이 있습니다.
강가에서 낚시질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발자취를 냅니다.
들에서 나물 캐는 여자는 방초(芳草)를 밟습니다.
악한 사람은 죄의 길을 좇아갑니다.
의(義) 있는 사람은 옮은 일을 위하여
칼날을 밟습니다.
서산에 지는 해는 붉은 놀을 밟습니다.
봄 아침의 맑은 이슬은 꽃머리에서
미끄럼 탑니다.
그러나 나의 길은 이 세상에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님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죽음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것은 만일 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면
다른 길은 죽음의 길보다 험하고
괴로운 까닭입니다.
아아. 나의 길은 누가 내었습니까.
아아, 이 세상에는 님이 아니고는
나의 길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길을 님이 내였으면
죽음의 길은 왜 내셨을까요.
꿈 깨고서
님이면은 나를 사랑하련마는,
밤마다 문밖에 와서 발자취 소리만 내이고,
한 번도 들어오지 아니하고 도로 가니,
그것이 사랑인가요.
그러나 나는 발자취나마 님의 문밖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사랑은 님에게만 있나봐요.
아아 발자취 소리나 아니더면,
꿈이나 아니 깨었으련마는
꿈은 님을 찾아가려고 구름을 탔었어요.
*
<나의 길> <꿈 깨고서>는 구도(求道)의 시지요?
예술가(藝術家)
나는 서투른 화가여요.
잠아니 오는 잠자리에 누워서 손가락을 가슴에 대이고
당신의 코와 입과 두 볼에 새암 파지는 것까지 그렸읍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작은 웃음이 떠도는
당신의 눈자위는 그리다가 백번이나 지웠읍니다.
나는 파겁(破怯) 못한 성악가여요.
이웃 사람도 돌아가고 버러지 소리도 그쳤는데
당신의 가르쳐 주시던 노래를 부르랴다가
조는 고양이가 부끄러워서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는 바람이 문풍지를 스칠 때에
가만히 합창하였습니다.
나는 서정시인이 되기에는 너무도 소질이 없나봐요.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그런 것은 쓰기 싫어요.
당신의 얼굴과 소리와 걸음걸이와를 그대로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집과 침대와 꽃밭에 있는 작은 돌도 쓰겠습니다.
*
삶과는 완전 딴판으로 남자일까 싶을 정도로 섬세하시지요? 그리고 이 표현이 아주 멋집니다.
‘조는 고양이가 부끄러워서…… 가는 바람이 문풍지를 스칠 때에 가만히 합창하였습니다.’
나의 노래
나의 노랫가락의 고저장단은 대중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속의 노래 곡조와는 조금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노래가 세속 곡조에 맞지 않는 것을 조금도 애달파하지 않습니다.
나의 노래는 세속의 노래와 다르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까닭입니다.
곡조는 노래의 결함을 억지로 조절하려는 것입니다.
곡조는 부자연한 노래를 사람의 妄想(망상)으로 도막쳐 놓는 것입니다.
참된 노래에 곡조를 붙이는 것은 노래의 자연에 치욕입니다.
님의 얼굴에 단장을 하는 것이 도리어 흠이 되는 것과 같이
나의 노래에 곡조를 붙이면 도리어 결점이 됩니다.
나의 노래는 사랑의 神(신)을 울립니다.
나의 노래는 처녀의 청춘을 쥐어짜서 보기도 어려운 맑은 물을 만듭니다.
나의 노래는 님의 귀에 들어가서는 천국의 음악이 되고, 님의 꿈에 들어 가서는 눈물이 됩니다.
나의 노래가 산과 들을 지나서
멀리 계신 님에게 들리는 줄을 나는 압니다.
나의 노랫가락이 바르르 떨다가 소리를 이르지 못할 때에
나의 노래가 님의 눈물겨운 고요한 환상으로 들어가서 사라지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압니다.
나는 나의 노래가 님에게 들리는 것을 생각할 때에,
光榮(광영)에 넘치는 나의 작은 가슴은 발발발 떨면서 침묵의 音譜(음보)를 그립니다.
잠 없는 꿈
나는 어느날 밤에 잠없는 꿈을 꾸었습니다.
「나의 님은 어디 있어요. 나는 님을 보려 가겠습니다.
님에게 가는 길을 가져다가 나에게 주셔요, 검이여.」
「너의 가려는 길은 님의 오려는 길이다. 그 길을 가져다 너에게 주면 너의 님은 올 수가 없다.」
「내가 가기만 하면 님은 아니 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너의 님의 오려는 길을 너에게 갖다 주면 너의 님은 다른 길로 오게 된다.
네가 간데도 너의 님은 올 수가 없다.」
「그러면 그 길을 가져다가 나의 님에게 주셔요.」
「너의 님에게 주는 것이 너에게 주는 것과 같다. 사람마다 저의 길이 각각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야 이별한 님을 만나 보겄습니까.」
「네가 너를 가져다가 너의 가려는 길에 주어라. 그러하고 쉬지 말고 가거라.」
「그리할 마음은 있지마는 그 길에는 고개도 많고 물도 많습니다. 갈 수가 없습니다. 」
검은 「그러면 너의 가슴에 안겨주마」 하고 나의 님을 나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나는 나의 님을 한껏 껴안았습니다.
나의 팔이 나의 가슴을 아프도록 다칠 때에 ,
나의 두 팔에 베어진 허공은 나의 팔을 뒤에 두고 이어졌습니다.
(* 검 : 민간신앙의 신)
*
이 시는 오도송(
의심하지 마셔요
의심하지 마셔요. 당신과 떨어져 있는 나에게 조금도 의심을 두지 마셔요.
의심을 둔대야 나에게는 별로 관계가 없으나 부질없이 당신에게 고통의 숫자만 더할 뿐입니다.
나는 당신의 첫사랑의 팔에 안길 때에 온갖 거짓의 옷을 다 벗고
세상에 나온 그대로의 발가벗은 몸을 당신의 앞에 놓았습니다.
지금까지도 당신의 앞에는 그때에 놓아둔 몸을 그대로 받들고 있습니다.
만일 인위(人爲)가 있다면
「어찌하여야 처음 마음을 변치 않고 끝끝내 거짓 없는 몸을 님에게 바칠고」하는 마음뿐입니다
당신의 명령이라면 생명의 옷까지도 벗겠습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당신을 그리워하는 나의 <슬픔>입니다.
당신이 가실 때에 나의 입술에 수없이 입맞추고
「부디 나에게 대하여 슬퍼하지 말고 잘 있으라」고 한 당신의 간절한 부탁에 위반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용서하여 주셔요.
당신을 그리워하는 슬픔은 곧 나의 생명인 까닭입니다.
만일 용서하지 아니하면 후일에 그에 대한 벌을 風雨의 봄 새벽의 낙화의 수만치라도 받겠습니다.
당신의 사랑의 동아줄에 휘감기는 체형(體刑)도 사양치 않겠습니다.
당신의 사랑의 흑법(酷法) 아래에 일만 가지로 복종하는 자유형(自由刑)도 받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에게 의심을 두시면 당신의 의심의 허물과 나의 슬픔의 죄를 맞비기고 말겠습니다.
당신에게 떨어져 있는 나에게 의심을 두지 마셔요.
부질없이 당신에게 고통의 숫자를 더하지 마셔요.
비밀
비밀입니까? 비밀이라니요, 나에게 무슨 비밀이 있겠습니까.
나는 당신에게 비밀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마는,
비밀은 야속히도 조금도 지켜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의 비밀은 눈물을 거쳐서 당신의 시각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의 비밀은 한숨을 거쳐서 당신의 청각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의 비밀은 떨리는 가슴을 거쳐서 당신의 촉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밖의 비밀은 한 조각 붉은 마음이 되어서 당신의 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비밀은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은 소리 없는 메아리와 같아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아니더면
당신이 아니더면 포시럽고 매끄럽던 얼굴이 왜 주름살이 접혀요.
당신이 기롭지만 않다면 언제까지라도 나는 늙지 아니할 터여요.
맨 첨에 당신에게 안기던 그때대로 있을 터이요.
그러나 늙고 병들고 죽기까지라도 당신 때문이라면 나는 싫지 않아요.
나에게 생명을 주든지 죽음을 주든지 당신의 뜻대로만 하셔요.
나는 곧 당신이여요.
당신은
당신은 나를 보면 왜 늘 웃기만 하셔요,
당신의 찡그리는 얼굴을 좀 보고 싶은데.
나는 당신을 보고 찡그리기는 싫어요.
당신은 찡그리는 얼굴을 보기 싫어하실 줄을 압니다.
그러나 떨어진 도화(桃花)가 날아서 당신의 입술에 스칠 때에,
나는 이마가 찔그러지는 줄도 모르고 울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금실로 수놓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꿈과 근심
밤 근심이 하 길기에
꿈도 길 줄 알았더니
님을 보러 가는 길에
반도 못 가서 깨었구나.
새벽 꿈이 하 짧기에
근심도 짧을 줄 알았더니
근심에서 근심으로
끝간 데를 모르겠다.
만일 님에게도
꿈과 근심이 있거든
차라리
근심이 꿈 되고 꿈이 근심 되어라.
행복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합니다.
나는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겠습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의 한 부분입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고통도 나에게는 행복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미워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겠습니까.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일생에 견딜 수 없는 불행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자 하여 나를 미워한다면 나의 행복은 더 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나를 미워하는 원한의 두만강이 깊을수록,
나의 당신을 사랑하는 행복의 백두산이 높아지는 까닭입니다.
((펌)) 1925년, 한용운 시인이 내설악의 백담사와 오세암을 오가며 불교서적『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와 시집 『님의 침묵』을 탈고할 때, 한용운 시인의 의식에는 ‘연꽃 같은 여인’ 서여연화(徐如蓮花)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여연화는 외설악 신흥사(神興寺)에서 한때 동거한 경험이 있는 여인이지요.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자비심을 지향해야 하는 승려와 한 여인을 사랑하는 남성 사이에서 시인은 불안함을 느꼈을 겁니다. 『십현담주해』 집필에 몰두한 것도 그러한 불안함을 떨치고 스님으로서 안정과 평화를 얻으려는 노력이었을지도 모르지요. 열정과 좌절을 겪고 치열하게 자기를 응시한 후에 시인이 얻거나 도달한 세계는 어떠했을까?
한용운 시인은 서여연화를 부정하지 않고 그녀에 대한 사랑을 선택했습니다. 서여연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인정함으로써 승려로서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관념적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승려로서 자신의 삶을 부정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인류와 생명체에 대한 사랑이 생기는 법이지요. 한 사람을 지극히 사랑했고, 승려로서도 그 사랑을 인정했기에 한용운 시인의 마음은 꽁꽁 얼어붙은 호수가 아니라, 나뭇잎 하나가 떨어져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호수가 될 수 있었지요. (강신주의 『철학적 시읽기 의 괴로움』에서.)
님의 손길
님의 사랑은 강철을 녹이는 불보다도 뜨거운데 님의 손길은 너무 차서 한도가 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서늘한 것도 보고 찬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님의 손길같이 찬 것은 볼 수가 없습니다.
국화 핀 서리 아침에 떨어진 잎새를 울리고 오는 가을 바람도 님의 손길보다도는 차지 못합니다.
달이 작고 별에 뿔나는 겨울밤에 얼음 위에 쌓인 눈도 님의 손길보다도는 차지 못합니다.
감로(甘露)와 같이 청량한 선사(禪師)의 설법(雪法)도 님의 손길보다는 차지 못합니다.
나의 작은 가슴에 타오르는 불꽃은 님의 손길이 아니고는 끄는 수가 없습니다.
님의 손길의 온도를 측량할 만한 한란계는 나의 가슴밖에는 아무 데도 없습니다.
님의 사랑은 불보다도 뜨거워서 근심 산을 태우고 한(恨) 바다를 말리는데,
님의 손길은 너무도 차서 한도가 없습니다.
해당화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 하고 물었습니다.
꽃도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격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花)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이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烟氣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 제 맘대로 줄 바꿈하였습니다.
비
복종
참아주셔요
나는 당신을 이별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님이여 나의 이별을 참아주셔요.
당신은 고개를 넘어갈 때에 나를 돌아보지 마셔요.
나의 몸은 한 작은 모래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님이여, 이별을 참을 수가 없거든 나의 죽음을 참아 주셔요.
나의 생명의 배는 부끄럼의 땀의 바다에서 스스로 폭침하려 합니다.
님이여, 님의 입김으로 그것을 불어서 속히 잠기게 하여주셔요.
그리고 그것을 웃어 주셔요.
님이여, 나의 죽음을 참을 수가 없거든 나를 사랑하지 말아 주셔요.
그리고 나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할 수가 없도록 하여 주셔요.
나의 몸은 터럭 하나도 빼지 아니한 채로 당신의 품에 사라지겠습니다.
님이여, 당신과 내가 사랑의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참아 주셔요.
그리하여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말고
나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할 수가 없도록 하여 주셔요.
오오 님이여.
어느 것이 참이냐
엷은 사(紗)의 장막이 작은 바람에 휘돌려서 처녀의 꿈을 휩싸듯이
자취도 없는 당신의 사랑은 나의 청춘을 휘감습니다.
발딱거리는 어린 피는, 고요하고 맑은 천국의 음악에 춤을 추고
헐떡이는 작은 영(靈)은 소리 없이 떨어지는 천화(千花)의 그늘에 잠이 듭니다.
가는 봄비가 드린 버들에 둘려서 푸른 연기가 되듯이
끝도 없는 당신의 정(情)실이 나의 잠을 얽습니다
바람을 따라가려는 짧은 꿈은 이불 안에서 몸부림치고,
강 건너 사람을 부르는 바쁜 잠꼬대는 목 안에서 그네를 뜁니다.
비낀 달빛이 이슬에 젖은 꽃수풀을 싸라기처럼 부시듯이
당신의 떠난 한(恨)은 드는 칼이 되어서 나의 애를 도막도막 끊어놓았습니다.
문 밖의 시냇물은 물결을 보태려고 나의 눈물을 받으면서 흐르지 않습니다.
봄동산의 미친 바람은 꽃 떨어뜨리는 힘을 더하려고 나의 한숨을 기다리고 섰습니다.
선사의 설법
나는 선사의 설법을 들었습니다.
「너는 사랑의 쇠사슬에 묶여서 고통을 받지 말고 사랑의 줄을 끊어라.
그러ㅕㄴ 너의 마음이 즐거우리라」고 선사는 큰소리로 말하였습니다.
그 선사는 어지간히 어리석습니다.
사랑의 줄에 묶인 것이 아프기는 아프지만
사랑의 줄을 끊으면 죽는 것보다도 더 아픈 줄을 모르는 말입니다.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해탈(大解脫)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얽은 님의 줄이 약할까봐서
나의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드렸습니다.
낙원은 가시덤불에서
죽은 줄 알았던 매화나무 가지에 구슬 같은 꽃망울을 맺혀주는 쇠잔한 눈 위에
가만히 오는 봄 기운은 아름답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 밖에 다른 하늘에서 오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모든 꽃의 죽음을 가지고 다니는 쇠잔한 눈이 주는 줄을 아십니까.
구름은 가늘고 시냇물은 얕고 가을 산은 비었는데,
파리한 바위 사이에 실컷 붉은 단풍은 곱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풍은 노래도 부르고 울음도 웁니다.
그러한 <자연의 인생>은, 가을 바람의 꿈을 따라 사라지고
기억에만 남아 있는 지난 여름의 무르녹은 녹음이 주는 줄을 아십니까.
일경초(一莖草)가 장육금신(丈六金身)이 되고 장육금신이 일경초가 됩니다.
천지는 한 보금자리요, 만유(萬有)는 같은 소조(小鳥)입니다.
나는 자연의 거울에 인생을 비춰보았습니다.
고통의 가시덤불 뒤에 환희의 낙원을 건설하기 위하여
님을 떠난 나는 아아 행복합니다.
참말인가요
그것이 참말인가요. 님이여, 속임없이 말씀하여 주셔요.
당신을 나에게서 빼앗아간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그대는 님이 없다'고 하였다지요.
그래서 당신은 남모르는 곳에서 울다가, 남이 보면 울음이 웃음으로 변한다지요.
사람의 우는 것은 견딜 수가 없는 것인데, 울기조차 마음대로 못하고
웃음으로 변하는 것은 죽음의 맛보다 더 쓴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것을 변명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의 생명의 꽃가지를 있는 대로 꺾어서 화환을 만들어 당신의 목에 걸고,
'이것이 님의 님이라'고 소리쳐 말하겠습니다.
그것이 참말인가요. 님이여, 속임없이 말씀하여 주셔요.
당신을 나에게서 빼앗아간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그대의 님은 우리가 구하여 준다'고 하였다지요.
그러면 당신은 '독신 생활을 하겠다'고 하였다지요.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분풀이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많지 않는 나의 피를 더운 눈물에 섞어서, 피에 목마른 그들의 칼에 뿌리고,
'이것이 님의 님이라'고 울음 섞어서 말하겠습니다.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
(전략)
용서하여요 논개여,
금석(金石)같은 굳은 언약을 저버린 것은 그대가 아니요 나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쓸쓸하고 호젓한 잠자리에 외로이 누워서 끼친 한(恨)에 울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대입니다.
나의 가슴에 <사랑>의 글자를 황금으로 새겨서 그대의 사당에 기념비를 세운들
그대에게 무슨 위로가 되오리까.
나의 노래에 <눈물>의 곡조를 낙인(烙印)으로 찍어서 그대의 사당에 제종(祭鍾)을 울린대도
나에게 무슨 속죄가 되오리까.
나는 다만 그대의 유언대로 그대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영원히 다른 여자에게 주지 아니할 뿐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얼굴과 같이 잊을 수가 없는 맹세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그대가 용서하면 나의 죄는 신에게 참회를 아니한대도 사라지겠습니다.
천추(千秋)에 죽지 않는 논개여,
하루도 살 수 없는 논개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즐거우며 얼마나 슬프겠는가.
나는 웃음이 겨워서 눈물이 되고 눈물이 겨워서 웃음이 됩니다.
용서하여요. 사랑하는 오오 논개여.
사랑의 끝판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
에그 등불을 켜려다가 초를 거꾸로 꽂았습니다그려. 저를 어쩌나 저 사람들이 숭 보겠네.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에그 저것 좀 보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하시네.
내가 님의 꾸지람을 듣기로 무엇이 싫겠습니까.
다만 님의 거문고 줄이 완급을 잃을까 저어합니다.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릅나무 그늘을 지워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입니다.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
제2부 심우장의 노래
산거(山居)
티끌 세상을 떠나면
모든 것을 잊는다 하기에
산을 깎아 집을 짓고
돌을 뚫어 샘을 팠다
구름은 손인양하여
스스로 왔다 스스로 가고
달은 파수꾼도 아니언만
밤을 새워 문을 지킨다.
새소리를 노래라하고
솔바람을 거문고라 하는것은
옛사람의 두고 쓴는 말이다
님 기루어 잠 못 이루는
오고 가지 않는 근심은
오직 작은 베개가 알 뿐이다
공산(空山)은 적막이여
어데서 한가한 근심을 가져 오는가
차라리 두견성(杜鵑聲)도 없이
고요히 근심을 가져오는
오오 공산의 적막이여.
*
이제야 좀 뭔가 시 같습니다그려.
낙화
떨어진 꽃이 힘없이 대지의 품에 안길 때
애처로운 남은 향기가 어디로 가는 줄을 나는 안다.
가는 바람이 작은 풀과 속삭이는 곳으로 가는 줄을 안다.
떨어진 꽃이 굴러서 알지 못하는 집의 울타리 사이로 들어갈 때에
쇠잔한 붉은 빛이 어디로 가는 줄을 나는 안다.
부끄러움 많고 새암 많고 미소 많은 처녀의 입술로 들어가는 것을 안다.
떨어진 꽃이 날려서 작은 언덕을 넘어갈 때에
가없은 그림자가 어디로 가는 줄을 나는 안다.
봄을 빼앗아 가는 아가의 발밑으로 사라지는 줄을 안다.
강(江) 배
저녁 빛을 배불이 받고
거슬러 오는 작은 배는
온 강의 맑은 바람을
한 돛에 가득히 실었다.
구슬픈 노 젖는 소리는
봄 하늘에 사라지는데
강가의 술집에서
어떤 사람이 손짓을 한다.
심(心)
심은 심이니라.
심만 심이 아니라 비심(非心)도 심이니,
심 외(外)에는 하물(何物)도 무(無)하니라.
생(生)도 심이요, 사(死)도 심이니라.
무궁화도 심이요, 장미화도 심이니라.
호한(好漢)도 심이요, 천장부(賤丈夫)도 심이니라.
물질계도 심이요, 무형계도 심이니라.
공간도 심이요, 시간도 심이니라.
심이 생하면 만유(萬有)가 기(起)하고 심이 식(息)하면 일공(一空)도 무(無)하니라.
심은 무의 실재요, 유의 진공이니라.
심은 인(人)에게 누(淚)도 여(與)하고 소(笑)도 여하느니라.
심의 허(언덕墟)에는 천당의 동량도 유하고, 지옥의 기초도 유하니라.
심의 야(野)에는 성공의 송덕비도 입(立)하고 퇴폐의 기념도 진열하느니라.
심은 자연전쟁의 총사령관이며 강화사(講和使)니라.
금강산의 산봉에는 어하(魚鰕)의 화석이 유하고, 대서양의 해저에는 분화구가 유하니라.
심은 하시라도 하사하물(何事何物)에라도 심 자체뿐이니라.
심은 절대며 자유며 만능이니라.
제3부 산사운(山寺韻)
심우장(尋牛莊)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시 분명하다면
찾은들 지킬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한강에서
술 싣고 계집 싣고
돛 가득히 바람 싣고
물 거슬러 노질하여
가고 갈 줄 알았더니
산 돌고 물 굽은 곳에서
다시 돌아오더라.
*
아니,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나?!
남아(男兒)
사나이 되었으니 무슨 일을 하여 볼까
밭을 팔아 책을 살까 책을 덮고 칼을 갈까
아마도 칼 차고 글 읽는 것이 대장부인가 하노라.
무궁화 심으과저
- 옥중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네 나라에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 와서
나의 마음 비춘 달아
계수나무 베어 내고
무궁화를 심으과저.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님의 거울 비춘 달아
쇠창을 넘어 와서
나의 품에 안긴 달아
이지러짐 있을 때에
사랑으로 도우고자.
달아 달아 밝은 달아
가이 없이 비친 달아
쇠창을 넘어 와서
나의 넋을 쏘는 달아
구름재(嶺)를 넘어 가서
너의 빛을 따르고자.
제4부 산가의 새벽
- 한시 10편 고은 역주 -
맑은 노래
물기슭에 외로운 꽃이 벌고
몇 개의 종이 걸려 대숲이 차다
도통(道通)한 일 알지 못하여
오히려 사물을 처음으로 보나니
영산포의 배 안에서
어적(魚笛)소리 들리는 밤
강에는 달이 밝고
술집의 등불
두 기슭은 가을이네.
외로운 돛배에
하늘이 물 같은데
사람은 갈꽃 따라
하염없이 흐르노니.......
오도송(悟道頌)
丁巳年 12월 3일 밤 10시경
좌선중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 무슨 물건인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심하던 마음이 씻은듯 풀렸다.
그래서 시 한 수를 지었다.
사내란 어디나 제 고향인 것을
그 몇 사람 객수(客愁) 속에 길이 막혔나.
한마디 소리 질러 삼천세계 뒤흔드니
눈 속에 점점이 복사꽃 붉네.
회갑날의 즉흥
홀연히 지나간 예순한 해가
이 세상에선 소겁(小위협할劫) 같이 긴 생애라고
세월이 흰 머리를 짧게 했건만
풍상도 일편단심 어쩌지 못해.
가난을 따르니 범골(凡骨)도 바뀐 듯
병을 버려두매 묘한 처방 뉘 알리
물 같은 내 여생을 그대여 묻지 말게.
숲에 가득 매미 소리
사양(斜陽)으로 가는 뭄을.
*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아버지 한응준과 어머니 방씨의 2남으로 출생.
*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龍雲. 법호는 卍海
* 8살에 서상기 · 서경 기삼백주 통달.
* 1892년(13세) 전정숙과 결혼. -> 1904년(25세) 아들 보국 태어남.
* 1896-7년 의병 참가 -> 백담사로 승려생활 시작.
* 1933년(54세) 심우장 짓고, 유씨와 재혼. -> 1934년 딸 영숙 태어남.
* 1944년 중풍으로 심우장에서 입적. 망우리 공동묘지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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