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시 몇 편 外

2014. 7. 23. 20:48詩.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수술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을 때
시멘트 지붕을 뚫고 하늘이 보이고
날아가는 새들의 폐벽에 가득찬 공기도 보였어


하나 둘 셋 넷 다섯도 못 넘기고
지붕도 하늘도 새도 보이잖고
그러나 난 죽으면서 보았어
나와 내 아이가 이 도시의 시궁창 속으로 시궁창 속으로
세월의 자궁 속으로 한없이 흘러가던 것을


그때부터야
나는 이 지상에 한 무덤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고
나의 아이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나쁜놈, 난 널 죽여 버리고 말 거야


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거야
내 아이는 드센 바람에 불려 지상에 떨어지면
내 무덤 속에서 몇 달간 따스하게 지내다
또다시 떠나가지 저 차가운 하늘 바다로,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오 개새끼
못 잊어!

 

 

- 최승자, 「Y를 위하여」 전문

 

 

 

 

 

 

 

되게 궁금하네,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ㅋㅋ

 

 

 

1952년~  충남 연기군.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과.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 창작과 번역을 같이 해왔다.

2001년 이후 투병을 하면서 시작 활동을 한동안 중단하다 2006년 다시 시를 발표했다.

박노해, 황지우, 이성복 등과 80년대가 배출한 스타 시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여자 시인이랑은 깊게 사귈 게 못 되는구나. 클나겠다.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전문

 

 


 

 

 



모두가 입을 벌리고 있다
모두가 머리보다 크게 입을 벌리고 있다
벌어진 입으로 쉬지 않고 공기가 들어가지만
명태들은 공기를 마시지 않고 입만 벌리고 있다
모두가 악쓰고 있는 것 같은데 다만 입만 벌리고 있다

그물에 걸려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려고 입을 벌렸을 때
공기는 오히려 밧줄처럼 명태의 목을 졸랐을 것이다
헐떡거리는 목구멍을 틀어막았을 것이다
숨구멍 막는 공기를 마시려고 입은 더욱 벌어졌을 것이고
입이 벌어질수록 공기는 더 세게 목구멍을 막았을 것이다

명태들은 필사적으로 벌렸다가 끝내 다물지 못한 입을
다시는 다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끝끝내 다물지 않기 위해
입들은 시멘트처럼 단단하고 단호하게 굳어져 있다
억지로 다물게 하려면 입을 부숴 버리거나
아예 머리를 통째로 뽑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말린 명태들은 간신히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물고기보다는 막대기에 더 가까운 몸이 되어 있다
모두가 아직도 악쓰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입은 단지 그 막대기에 남아있는 커다란 옹이일 뿐이다
그 옹이 주변에서 나이테는 유난히 심하게 뒤틀려 있다 


- 김기택, 「명태」전문

 

 

 

 

 

 

 

나주 들판에서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꽃이 소를 웃긴 것이지

풀을 뜯는

소의 발 밑에서

마침 꽃이 핀 거야

소는 간지러웠던 것이지

그것만이 아니라

피는 꽃이 소를 살짝 들어 올린 거야

그래서,

소가 꽃 위에 잠깐 뜬 셈이지

하마터면,

소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것이지

 

 

- 윤희상, 「소를 웃긴 꽃」전문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어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 문정희 「“응”」 부분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 한 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 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 권의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 고영민,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전문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 강은교 「사랑법」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