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의 시에 대해서

2014. 5. 7. 20:12詩.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우에” 같은 영랑의 시를 생각하면 나는 1930년대 식민지 현실 속에 만연한 인간적 상실과 좌절을 뼛속까지 느끼게 된다. 영랑의 시가 향토적 서정과 민족적 운율을 동반한 영롱한 서정시라는 것은 문학사가들의 해설이 없어도 알겠고 또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서정의 발현이라는 것이 이렇게 파리하고 맥빠질 수 있겠는가? ‘모란이 피기까지’ 그가 기다린 것은 고작 ‘찬란한 슬픔의 봄’이었다. 그런 식의 정서발현이란 감상의 과소비밖에 안될 것이니, 클리넥스 홑껍질보다도 근수가 덜 나갈 이 가벼움을 티없이 맑다고 표현하기는 싫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고,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고 신문화운동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1925년이 되면 KAPF를 비롯한 진보적인 문예운동이 일어나다가 1930년대 들면서 국내는 진보적 운동이 결정타를 맞고 그 대신 남만주와 북간도에서는 항일 게릴라와 독립군이 무장투쟁을 하고 있을 때이다. 이때 우파의 문학 · 예술인들은 맥없이 순수예술을 주창하다가 그래도 그중 괜찮다는 사람들이 일말의 양심에서 좌파가 내세운 민족성 · 현실성의 가치 중 고작해서 ‘향토색’이라는 이름으로 흡수되어갔다. 그것이 문학에서 국문학파이고 미술에서 오지호 김용준 등의 ‘향토색 논쟁’이며 김중현 김종태의 ‘향토적 서정주의’ 그림이다. 그리고 음악에서 홍난파 같은 작곡가를 낳았다.

 

속알갱이는 송두리째 일제에 빼앗겨버린 식민지적 현실을 극복할 비전과 의지는 상실한 채 형식에서만 향토적 빛깔과 맛을 찾으면서 그것이 민족적 아이덴티티라고 믿으려고 했던, 그런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영랑의 시에서 차라리 측은한 인간적 상실과 비애가 느껴지는 것이다.

 

 

- 유홍준 -

 

 

 

 

 

김영랑 金永郞 [1903.1.16~1950] 본명 윤식(允植). 전남 강진(康津) 출생. 부유한 지주의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면서 자랐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 3 ·1운동 때에는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학원에 입학하여 중학부와 영문과를 거치는 동안 C.G.로제티, J.키츠 등의 시를 탐독하여 서정의 세계를 넓혔다. 1930년 박용철(朴龍喆) ·정지용(鄭芝溶) 등과 함께 《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참가하여 동지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쓸쓸한 뫼 앞에> <제야(除夜)> 등의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서정시를 계속 발표하였고, 1935년에는 첫째 시집인 《영랑시집(永郞詩集)》을 간행하였다.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한 그의 시는 정지용의 감각적인 기교, 김기림(金起林)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는 저항 자세를 보여주었고, 8 ·15광복 후에는 민족운동에 참가하는 등 자신의 시의 세계와는 달리 행동파적 일면을 지니고 있기도 하였다. 6 ·25전쟁 때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은신하다가 파편에 맞아 사망하였다. <자료출처 : 야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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