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3. 26. 12:27ㆍ미술/서양화
Jean Francois Millet
(1814 ~1875 : 프랑스)
111.1 X 85.4cm 미국 메사추세츠주 Museum of Fine Art Boston
The Walk to Work, 1851, Oil on canvas, 55.5 x 46 cm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몇몇 화가들이 모델을 더이상 상류층 사람들에 한정하지 않고 하류층 사람들을 모델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미술에서의 조용한 혁명이었습니다. 가난한 인생을 주제로 한 작품이 낭만주의 문학과 음악에서 종종 나타났으며, 회화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의 주요인물인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1814-75)가 가난한 농부를 그린 그림들은 여러분에게 아주 낯익을 것입니다. 밀레는 시골 바르비종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1857년에는 <이삭줍는 사람들 The Gleaners>을 그려 농부들의 삶에 숭고함이 있음을 알렸습니다. 그의 이러한 점은 1830년대와 40년대 사회에 대한 인식을 그림과 조각에 반영시킨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1808-79)와 더불어 20세기에 출현한 사회사실주의Social Realism 회화의 선조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밀레는 가난한 농부들을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렸으므로 빈센트 반 고흐는 그를 가리켜 ‘농부 화가’라고 불렀습니다. 밀레는 여인들의 얼굴이나 표정을 세밀하게 표현하지 않고 다만 그들의 손을 크고 뭉툭한 형태로 묘사했습니다. 밀레 작품의 특징은 강인한 조각적 형태와 인물의 뚜렷한 윤곽입니다. 고된 노동에서 오는 육체적 피로를 묘사하는데 밀레를 추종할 화가는 없었습니다.
허리를 구부린 여인들의 자세는 너무 오랫동안 구부리고 일하느라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보입니다. 여인들 뒤로 빛을 가득 품은 추수 장면은 흰색이 섞인 창백한 색조로 채색되었으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전경이 보다 어둡고 침침한 색조로 표현되었습니다.
또한 무거운 짐이 실린 수레와 커다란 건초더미 그리고 이삭을 줍는 여인들 앞에 놓인 한 줌의 낟알 사이에도 날카로운 대비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멀리 오른편 농장 건물 앞에 일꾼들을 감독하는 사람이 말에 타고 있습니다. 그는 이삭줍는 여인들에게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데, 이는 배경의 부유한 농장과 전경의 가난한 여인들 사이의 구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바르비종파란 명칭은 파리 근교 퐁텐블로 숲속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유래했습니다. 바르비종파의 지도자는 테오도르 루소와 장 프랑수아 밀레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파리에서 활동했지만 가난을 이기지 못해 1846년 루소가, 1849년에 밀레가 바르비종에 정착했습니다. 많은 풍경화 화가와 동물화 화가들이 그들을 좇아 이 마을에 모여들었습니다. 이 마을에 모여든 화가들 대부분 파리 화단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토대로 삼은 건 17세기의 프랑스와 네덜란드 화가들의 풍경화와 동시대 영국 화가들의 풍경화였습니다.
그들은 섬세한 관찰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주제에 접근했습니다.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은 그들은 위풍당당한 자연의 풍경보다는 소박하고 평범한 자연의 풍경을 강조했습니다. 영국 화가 컨스터블이나 터너와는 달리 그들은 빛과 색의 효과나 대기의 변화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국의 풍경화가 프랑스의 풍경화보다 훨씬 진보적이었습니다.
건초더미 가을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화가 루소는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과 어렴풋이 보이는 나무들을 그리면서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낸 반면, 밀레는 자연과 가까이 하고 사는 미천한 농부들의 고귀한 삶을 찬양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바르비종파의 미술사적 의의는 순수하고 객관적인 풍경화를 프랑스의 정통 장르로 확립하는 데 이바지한 점입니다.
1850년을 전후하여, 쿠르베의 작품에서 보았듯이, 화가들은 자신을 고용한 상류계급이 선호하는 주제를 그리는 대신, 일상 주제에서 가져온 다양한 장면들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밀레는 가장 빈곤한 계층 사람들이 겪는 고된 노동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이삭줍는 사람들>은 막바지에 접어든 추수의 현장을 묘사한 것으로, 화면의 배경 오른쪽에 보이는 농부들은 마무리 작업에 한창입니다. 농부들은 말을 탄 감독의 지휘 아래 곡식을 모두 수확했습니다. 짐수레는 일꾼들이 실어놓은 짐의 무게 때문에 버거워 보이고, 들판에는 몇 개의 건초가리가 세워져 있습니다.
화면 왼쪽의 건초더미 두 개는 비교적 선명하게 묘사되었으나 보다 멀리 놓인 나머지 건초더미들은 희미하게 처리되었습니다. 이는 추수의 규모가 크다는 걸 암시하며, 올해는 풍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화면 앞쪽에서 이삭을 줍는 여인들은 풍요로운 현실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농장에 고용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인들은 지방 관청의 허가를 받아 추수가 끝난 후 들에 남아 있는 낟알들을 주워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일은 오로지 손으로 일일이 주워야 하는 고된 노동입니다. 게다가 먼저 추수한 사람들이 거의 모든 곡식을 수확한 뒤 그루터기만 남겼기 때문에 이 가난한 여인들의 현실은 우울하기만 합니다. 밀레는 여인들의 곤궁함을 성스러운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삭줍는 사람들>은 그려진 그 해 1857년 살롱에 전시되면서 적대적인 반응을 받았습니다. 1857년이라면 1848년의 프랑스 2월 혁명의 기억이 아직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던 때였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습니다.
184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물러나고 루이 필립이 입헌 군주로 즉위했지만, 1848년 2월 혁명으로 루이 필립 왕정이 무너지고 제2 공화정이 성립했습니다. 2월 혁명 중 치러진 보통선거에서 온건 공화파가 의회를 독점하자, 일부 과격 사회주의자와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폭동은 진압되었고, 마침내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손자인 루이 나폴레옹이 공화정의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이삭줍는 사람들>이 전시되었으므로 몇몇 비평가들이 이 작품을 사회적 불안을 조장하기 위한 정치적 항의라고 해석했습니다., 2월 혁명에 대한 밀레의 시각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삭줍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이 상당히 복합적이란 사실은 분명합니다.
밀레가 1852년과 53년에 그린 그림들에는 이삭줍는 사람들의 모습이 계절적으로 묘사되었고, 행복한 표정의 어린아이들이 등장해 분위기가 밝았지만, <이삭줍는 사람들>에는 선동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밀레의 의도는 정치적이기보다는 미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사실주의가 유행하고 있었으므로 실제 상황을 그대로 전하려는 의도에서 이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밀레의 작품은 주제와 양식으로 인해 빗발치는 비난을 초래했는데, 정치적 혼란기에 영웅을 그리는 대형 캔버스에 농부들의 삶을 표현하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양식적으로 그의 작업이 거칠고 완결되지 않다는 공격을 종종 받았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체로 과장되었으며, 색채는 따듯하고 순박하며 채색은 두텁게 표현되었습니다. 세밀한 부분들을 제거한 그의 양식은 훗날 신인상주의의 리더 조르주 쇠라와 후기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들 중 하나인 빈센트 반 고흐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The Hay Trussers, 1850-51
<만종, 장 프랑소와 밀레, 1857~59, 파리 오르세 미술관
The Angelus, 1857-1859, Oil on canvas, 53,3 × 66 cm Musée d'Orsay,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걸려 있는 장 프랑수와 밀레의 <만종>은 원래 ‘수확에 감사하는 부부’가 아니라 ‘아이의 죽음에 슬퍼하는 부부’였다고 한다. 작품 속의 부부가 삼종 기도를 올린 것이 아니라 땅에 묻힌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는 미술가 살바도르 달리의 끈덕진 주장 때문에 엑스레이 분석으로 알아본 결과, 놀랍게도 최종 덧칠 전에 관과 비슷한 형태가 그려져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The Gleaners. 1857. 타작 Winnowing 을 끝 낸 농장의 밭Agriculture 에서 밀Wheat 이삭 줍는 사람들
Oil on canvas. 83.7 x 111 cm. Musee d'Orsay, Paris, France
밀레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1857년 살롱에 출품되었던 작품. 밀레는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상당히 오래 전부터 계획한 흔적을 보여 주고 있는데, 특히 많은 데상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농민화 가운데서도 비교적 주제가 뚜렷한 것으로, 어떤 점에선 밀레의 사상의 단면을 보여 준다고까지 할 수 있다.
허리를 굽혀 이삭을 줍고 있는 두 여인과 그 오른편에 약간 허리를 굽힌 한 여인의 배치가 주는 견고한 짜임새와, 세 여인이 지니는 양감이 먼 지평의 배경을 통해 더욱 리얼하게 전달되고 있다. 농민 가운데 가장 하층의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다룬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견고한 인물의 설정 때문에 일종의 사회적 향의의 성격을 띤다고 비평가들은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은 여름철의 노동과 노동에 의한 피로를 표현하고 있다. 세 여인의 일련의 정지된 듯한 동작을 모노톤 배경과 더불어 시간을 초월한듯 마치 성서의 한 장면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조화롭고 안정된 구도와 갈색톤의 자연적인 색채속에서 부드러운 빨강, 파랑, 노랑의 대비는 고전적인 성화를 연상시킨다.
The Wood Sawyers. 1875. Trunk (Tree) 나무 톱질꾼Woodcutter
Oil on canvas.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Great Britain
오후의 휴식 1866
Norman Milkmaid
Peasant with a Wheelbarrow: 1848
Peasant Women with Brushwood: ca 1858
Shepherdess Guarding her Flock of Sheep 양 떼를 지키는(키우는) 여자 Musee d'Orsay
Peasants Bringing Home a Calf Born in the Fields
씨 뿌리는 사람 The Sower , 1850, The Sower Museum of Fine Arts, Boston
Starry Night (Nuit Étoilée), ca. 1851 별이 총총한 밤 Oil on canvas, 25 3/4 x 32 in. (65.4 x 81.3 cm)
The Sheepfold, 1856-1860. Glasgow City Art Gallery
Susanna and the Elders, ca 1846-49
The Baby's Cereal, 1867
The Bather, 1846-48
The Boiler, 1853-54
Potato Planters, ca 1861
추수하는사람들의 휴식 Harvesters Resting (Ruth and Boaz)From 1850 to 1853 09
빵굽는 여인 Woman Baking Bread, 1854, Oil on canvas, 55 × 46 cm, Kröller-Müller, Otterlo
The Winnower, 1848
Man with a Hoe, 1860-62
Maternal Care, 1855-57
Mother and Two Infants
Mountainous Landscape with a Citadel
Man with a Hoe, 1860-62
봄 날 에 씨를 뿌리기 전에 밭의 잡초와 돌을 고르느라 괭이질을 하는 남자
The Spinning Girl. 방직공장 industry:spinning 에서 일하는 소녀
Musee d'Orsay, Paris, France
The Church at Chailly c.1868 샤일리에 있는 교회
Pastel on paper 28 1/2 x 33 1/2 in. (72.39 x 85.09 cm)
Louise-Antoinette Feuardent 1841
Oil on canvas 28 7/8 x 23 7/8 in. Louvre, Paris, France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
프랑스의 사실주의(Realism) 혹은 자연주의(Naturalism) 화가.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의 주도적 인물로 소박하고 경건한 삶을 사는 농민들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 밀레는 농사를 지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19세쯤 되어서는 셰르부르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1837년에 그는 파리로 와서 폴 들라로슈의 문하생으로 등록했는데, 이 화실에는 1839년까지 다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40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가 낙선된 뒤, 그는 셰르부르로 돌아가 1841년 말까지 그곳에서 지내면서 초상화를 그렸다. 1844년에 〈우유 짜는 여인 The Milkmaid〉과 파스텔화 〈승마 교습 The Riding Lesson〉으로 처음 성공을 거두었는데, 〈승마 교습〉은 그가 1840년대에 그린 작품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특징으로 관능적 성격을 갖고 있다.
농부에 관한 주제는 1850년 대 초부터 그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지만, 이 주제가 처음으로 뚜렷하게 드러난 중요한 작품은 1848년 파리 살롱전에 입선한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 The Winnower〉이었다. 이 그림은 나중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농촌의 삶을 다룬 작품으로 〈씨뿌리는 사람 The Sower〉·〈저녁기도〉·〈소치는 여인〉 등이 있으며 그 외에 일상생활의 장면들을 묘사한 파스텔화 및 소묘들을 많이 남겼다.
한동안 심한 고생을 겪은 밀레는 1849년에 파리를 떠나 퐁텐블로 숲속의 작은 마을 바르비종에 정착했다. 그는 농부를 그린 그림을 계속 발표했고, 그 결과 사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밀레의 입장을 옹호하던 그 당시의 편지들은 그림에 대한 그의 접근방식이 근본적으로 고전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1860년대 중엽에 이르자 밀레의 작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1867년의 전시회에 9점의 주요작품을 출품한 뒤인 1868년이었다. 미국 보스턴의 미술관과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이삭줍기 The Gleanes〉(1857, 루브르 박물관)· 〈만종 The Angelus〉(1855~57, 루브르 박물관) 등 밀레의 중요한 그림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만종〉은 해질 무렵의 빛의 효과를 이용해 시적 정감이 넘치는 분위기를 창조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Jean F. Millet(1814~1875) [The Walk to Work (Le Depart pour le Travail)] 1851 ; Oil on canvas, 55.5 x 46 cm (21 7/8 x 18 1/8 in)
'미술 > 서양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Walter Langley (0) | 2013.04.10 |
---|---|
제리코 (0) | 2013.03.26 |
구스타프 클림트 풍경화 (0) | 2013.03.24 |
모네, 교회와 건초더미 연작 (0) | 2013.03.09 |
모네, 포플러 연작 (0) | 2013.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