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ter Langley

2013. 4. 10. 08:31미술/서양화

 

Walter Langley (1852-1922)

 

 1

fleurdulys:


Never Morning Wore to Evening But Some Heart Did Break - Walter Langley
1882

 

Never Morning Wore to Evening but Some Heart Did Break  슬픔은 끝이 없고 / "저녁이가면 아침이 오지만 가슴이 무너지는구나"

88* 64 버밍엄미술관

 

 

 

 

“얘야, 실컷 울어라. 눈물이 슬픔을 지우지는 못하겠지만, 사라지지 않는 슬픔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실없는 눈물만 하염없이 흐르는 걸 어찌 멈출 수 있겠니.”


"‘어머니, 눈물이 멈추지 않아요. 세월이 지날수록 슬픔은 점점 옅어집니다.

슬픔의 크기가 줄어든 걸까요? 슬픔을 담는 마음이 담대해진 걸까요?

매해 남편과 아이를 기억해야 하는 그날, 무뎌진 제 맘을 탓하듯이 눈물이 멈추질 않습니다.

시간과 함께 점점 견딜만한 슬픔이 됩니다. 언젠가는 이 눈물마저 멈추면 어쩌죠?

남편과 아이를 사랑했고, 그들의 부재에 가슴 찢어지는 아픔으로 더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던 제가

이제 그들이 없는 삶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래도 될까요?

죽을 것 같던 산 사람은 변해가고, 결국 죽은 사람만 불쌍한 꼴이 되어버립니다.

슬픔에 익숙해져도 되는 걸까요? 어머니.’"


“그들이 떠난 지도 여러 해가 되었구나. 아들과 손자를 잃은 슬픔이 네 슬픔보다 가볍진 않단다.

다만, 나이를 먹을수록 삶의 단계를 더 많이 겪게 되고 이 모든 것이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거지.

너보다 더 많은 이를 떠나보냈고, 슬픔 뒤에 오는 공허함과 끝나지 않는 슬픔에 대한 슬픔을 더 많이 알고 있단다.

슬픔에만 빠져 있으면 삶의 밝은 단면을 놓치게 된다.

우리의 삶은 슬픔만큼이나 기쁨이 많았고, 공허함이란 것은 채워짐 다음에 오는 것이라는 것을 잊고 있지.

네 삶은 그들이 떠난 이후의 삶이 전부가 아니란다.

우리는 가끔 그들과 함께 행복했던 삶이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지.

이전의 삶을 기억하기에 이후의 삶이 슬픈 거란다.

그들이 없는 삶에도 모두 슬프기만 했던 건 아니지.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우리가 웃고 지냈던 날들이 떠오를 거야.”


"‘그래요. 내내 슬퍼하며 지낸 건 아니네요.

남편을 삼킨 바닷가에서 일몰에 감탄하며 발걸음을 멈추기도 하고, 아이를 삼킨 땅의 수확에도 감사하며 지냈네요.

생각해보면 매해 하루, 오늘 같은 날, 그가 떠난 날, 아이가 떠난 날만 슬퍼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매해 그날이 있는 걸까요? 사람들은 잊지 못할 것 같던 슬픔도 잊는 존재라서? 한 번씩 일깨워줘야 해서? 그런 걸까요?

어머니, 오늘 전 슬퍼요. 눈물도 멈추지 않아요.

이게 누구를 위한 걸까요? 그가 생각나서, 아이가 생각나서?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어요. 지금 이 눈물은 나를 향한 눈물이네요.

내가 너무 불쌍해서, 남편도 없고 아이도 잃은 내가 너무 불쌍해서 흐르는 이기적인 눈물이죠.

점점 나빠지고 있어요.’"

“점점 나아질 거야. 슬픔이 눈물로 흘러나오지 않는 날이 올 거야.

나이가 들면 먼저 수분이 빠져나가는 거야. 눈물도 마른단다.

얘야, 이제 그들을 기억하면서 미소 지을 수 있는 날도 올 테니 걱정하지 마라.

동네 아이들이 까르륵 웃는 소리에서 네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행복을 떠올릴 수 있는 날이,

맑은 하늘과 잔잔한 파란 바다가 하나가 되면 네 남편의 넓은 가슴을 떠올릴 수 있는 날이 올 거란다.

기쁨이 충만했던 그 시절을 눈물 없이 추억할 수 있는 때가 올 거야.

삶이 그런 거란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을 견디며 사는 거지.

슬픔이 사라진다고 그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란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야.

우리 곁에 없지만,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거지.

나도 곧 네 곁을 떠나겠지만, 네가 툭툭 털고 우리와 함께 씩씩하게 살아갔으면 한단다.

그들도 그렇게 생각하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거야.

실컷 울어라. 가슴이 후련해질 때까지.”


"‘아, 어머니. 그래서 너무 슬퍼요.

그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요. 제 발목을 잡는 것이 그들이에요. 오늘 저는 또 남겨졌답니다.

그는 함께 떠나자고 했어요. 그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자고 했지요.

하지만, 떠나지 못했어요. 그들 때문에 어머니를 두고 떠날 수가 없었어요.

그를 따라가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는 제가 너무 안타까워서,

또다시 사랑하는 누군가가 없는 삶에 익숙해져야 하는 기나긴 세월이 두려워서,

이후로 내내 어머니를 원망할까 봐 두려워,

눈물이 멈추질 않아요.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는 오로지 자신만을 불쌍하게 여기는 눈물이에요.

어쩌죠, 어머니. 어머니의 다독거림은 전혀 위로가 되질 않아요.’"


"‘위로가 되진 않겠지. 나도 알고 있단다.

지난밤 그가 네게 속삭이는 걸 들었단다. 밤 귀가 밝은 늙은이라, 들리는 건 어쩔 수가 없더구나.

오늘 아침 네가 없어서 떠난 줄 알았단다.

이곳에서 울고 있는 너를 보고 어찌나 마음이 놓이든지. 내게 얘기했다면 널 잡지 못했을 거다.

아들도, 손자도 없으니 붙잡을 핑계가 없더구나.

얘야, 나를 용서해라. 등을 떠밀어 그에게 보내지 못하고 등을 다독이며 위로하는 척 너를 잡아두는 이 늙은이를.

홀로 남는다는 게 너무 무서워서,

그 또한 익숙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홀로 남겨진다는 게 너무너무 무서워서 ……."

 

 

※ 이 글의 출처는 모르겠습니다. 여러군데 돌아다니길래 가져와봤습디다.

읽고난 소감이 어떻습니까? 겁나게 적나라하지요? ^^

 

 

 

 

2

Langley Walter The Orphan Walter Langley (1852 1922)

월터 랭글리, 고아 (Orphan),1889년,종이에 수채, 66 X 87.5cm



시골과 어촌을 배경으로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영국의 화가 '월터 랭글리'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흡사 19세기 런던 빈민들의 삶을 소설화한 영국의 문호 '찰스 디킨스'가 떠오릅니다.

찰스 디킨스가 19세기 런던 빈민들의 밑바닥 생활을 소설로 옮겨 놓았다면,

월터 랭글리는 시골 서민들의 일상을 화폭에 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수 많은 식민지를 거느린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지만,

산업혁명 이후 극심한 빈부 격차로 인해 사회에 숱한 노동자들과 빈민들이 존재했었습니다.

당시 문학가나 미술가들은 그런 사회의 그늘진 곳과 소외 계층의 헐벗고 굶주린 삶을 작품의 소재로 삼곤 했습니다.

월터 랭글리도 그 중 한 사람인데, '배를 기다리며',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 '고아'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생한 인물 묘사에서 서민들의 힘겨운 삶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습니다.

 

작품들 중 '고아'는 비록 가난한 서민들의 일상을 다루고 있음에도 어린 아이가 등장하는 탓에 비교적 따뜻한 느낌을 줍니다.

아이가 할머니나, 아줌마의 손자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은 그림의 분위기만 봐도 알수 있습니다.

할머니나 아줌마가 어려워서 그런지 아이는 다소곳이 앉아 얌전하게 먹는 모습입니다. 먹는 폼이 손자나 아들 같지 않죠?

아마도 길거리를 헤매거나 구걸하는 아이를 집안에 들여 음식을 먹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는 매우 조용하게 음식을 먹고 있지만 볼이 튀어나올 정도로 먹는 게 매우 굶주려 있었던 모양입니다.

생기 없고 초라한 아이의 모습은 흡사 '올리버 트위스트'가 시골에 내려와 있는 모습 같습니다.

할머니와 아줌마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매우 차분한 분위기지만 '측은지심'을 느끼게 하는 그림이 아닐 수없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올리버는 고아원을 탈출하여 런던까지 오게 되지만,

아무 연고 없는 도시에서 소매치기 패거리에게 포섭되어 구걸과 소매치기를 일삼는 거리의 아이로 전락합니다.

그러다 마음씨 좋은 노신사를 만나게 되는데,

올리버를 가엾게 여긴 노신사는 올리버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며 그를 따뜻하게 보살핍니다.

랭글리의 그림에서 할머니의 인자한 풍모는 흡사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의 노신사를 연상하게 합니다.

비록 누추해 보이는 가난한 집이지만 따스한 온정이 넘치는 곳이라는 느낌입니다.

부모를 여의고 갈 곳 없는 어린 아이를 말없이 보듬는 할머니의 옆 모습도 푸근해 보입니다.

 

19세기 후반 월터 랭글리는 뉴린이라는 어촌에 정착하여 그곳 주민들의 고단한 삶과 일상을 화폭에 담기 시작합니다.

서민들의 고통 받는 삶을 그린 그의 작품들은 기록적으로 팔려나가면서 그는 화가로써 입지도 굳혔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랭글리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스트이자 최고의 수채화가로 명성을 얻었지만 유채화에도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월터 랭글리가 가난한 서민들의 삶을 화폭에 담아 부를 누렸다는 것이 왠지 아이러니 하게도 느껴지지만,

어쨌든 그는 나중에 톨스토이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칭송했을 만큼 당대에 성공한 화가로 자리를 굳히게 됩니다.

말년에 랭글리의 작품은 '서민들에 대한 연민'에서 모성을 중심으로 한 '가족'으로 테마가 옮겨갑니다.

비록 힘겹고 고단한 서민들의 삶이지만, 가족이 있기에 사랑과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랭글리 말년의 메시지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이슈데일리 박정은 미술컬럼 전문기자]

 

 

 

※ 그릇 꼭 껴안고 볼이 메지게 먹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제 목이 다 메이네요. ㅜㅜ.

저 아이를 어떻게 했을까요? 저라면 거두워서 키웠을 것 같습니다만.....

 

 

 

 

3

Langley Walter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Walter Langley (1852 1922)

Langley_Walter_At_Evening_Time_It_Shall_Be_Light.jpg

 

 

 

4

Langley Walter Between The Tides Walter Langley (1852 1922)

Langley_Walter_Between_The_Tides.jpg

 

 

 

5

Langley Walter In The Fishing Season Walter Langley (1852 1922)

Langley_Walter_In_The_Fishing_Season.jpg

 

 

 

6

Langley Walter Motherhood Walter Langley (1852 1922)

Langley_Walter_Motherhood.jpg

 

 

 

7

Langley Walter The Breadwinners Walter Langley (1852 1922)

Langley_Walter_The_Breadwinners.jpg

 

 

이그림을 보니 일리아 레핀의 <볼가강의 뱃사람들>이 생각나는군요.

혹시 거기서 아이디어를 채오지 않았을까요?

 

 

 

8

Langley Walter The New Arrival Walter Langley (1852 1922)

Langley_Walter_The_New_Arrival.jpg

 

 

 

9

Langley Walter Thoughts Far Away Walter Langley (1852 1922)

Langley_Walter_Thoughts_Far_Away.jpg

 

 

 

10

Langley Walter Waiting For The Boats Walter Langley (1852 1922)

Langley_Walter_Waiting_For_The_Boats.jpg

 

 

 

11

Motherless Walter Langley (1852 1922)

Motherless.jpg

 

 

 

12

When the Boats are Away Walter Langley (1852 1922)

When_the_Boats_are_Away.jpg

 

 

 

13

 

 

 

14

 

 

15

Plate-8--Tucking-a-School-o.jpg

 

 

16

 

 

17

 Plate-4--Among-the-Missing-.jpg

1885

 

 

18

 

 

 

19

 

 

 

20

 

 

 

21

 

 

 

22

 

 

 

 

 

 

 

 

 

 

 

영국 화가 Walter Langley (1852~1922)

  

랭글리는 영국 버밍햄의 슬럼가 근처에서 태어났는데 형제 자매가 11명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나던 시대는 산업화가 진행 중이던 빅토리아 여왕시대였죠. 당시 노동자 계급들에게는 영양실조와 질병 그리고 유아 사망 같은 가혹한 환경이 겹쳐진 환경이었습니다. 그의 그림이 가난한 노동자와 어부들 같은 노동자 계급에 포커스가 맞춰 진 것은 어렸을 때의 성장 환경 때문이기도 합니다. 

 

랭글리의 어머니는 강인한 여자 가장이었습니다. 아들이 미술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늘 아들을 격려했습니다. 어머니 자신은 문맹이었지만 아들이 자신의 잠재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랭글리를 버밍햄 디지인 학교 야간부에 입학시킵니다. 그리고 아들의 학비 마련을 위해 어머니는 세탁부 일을 시작합니다. 그의 작품에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여인들의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의 개인적인 경험이 밑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랭글리의 어머니도 우리 나라 어머니 못지 않으셨군요.

 

15살부터 시작한 석판공의 견습생 일은 21살이 될 때까지 계속 됩니다. 그 후 캔싱턴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고 산업디자인을 공부하는데 장학금 지원 기간이 끝나자 석판공일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게 됩니다. 제의를 받아들여 금전적인 문제는 해결했지만 석판화를 제작하느라 정작 그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에 고작 3일뿐이었습니다.

 

24살에 클라라 퍼킨스와 결혼을 하는데 아내가 쌍둥이를 임신하게 되자 랭글리는 석판화 제조일을 계속 할 것이지 아니면 전업 화가가 될 것인지 결심해야 했습니다. 쌍둥이를 키우려면 아무래도 돈이 더 필요했겠지요? 랭글리의 결정은 전업화가의 길을 걷는 것이었습니다. 조금씩 제작했던 그의 작품이 마침 상업적으로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았기 때문이었죠. 그 뒤 그의 인생 흐름을 보면 이 때의 결정이 옳았는데 우리 식으로 말하면 그에게 쌍둥이는 복 덩어리인 셈입니다.

 

1880년 랭글리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뉴린(Newlyn)이라는 어촌을 찾게 됩니다. 잠깐의 방문이었지만 뉴린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어촌에서 일어나는 일상들과 그들의 힘겨운 삶이 사회주위적 사실주의 기법으로 묘사하고자 했던 주제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던 것이죠.

 

다음 해 버밍햄의 유력자로부터 작품 20점을 주문 받은 랭글리는 뉴린으로 이사를 갑니다. 그 해가 저물어갈 무렵 당시로서는 거금인 500파운드의 후원을 받는데 그 해 랭글리가 판매한 그림은 총 102점이었다고 하니까 대단한 성공을 거둔 해였습니다. 기록에는 총 723파운드를 벌어들였는데 당시 석판공 수입의 3였습니다. 랭글리의 훌륭한 선택과 성공이었습니다.

 

랭글리가 뉴린에 정착한 후 몇몇 화가들이 뉴린으로 이사를 옵니다. 마치 프랑스의 바르비종처럼 뉴린도 화가들이 모이는 곳으로 바뀝니다. 뉴린은 곧 화가들의 목소리와 작품 활동으로 떠들썩한 어촌 마을이 되고 나중에 그 곳 출신 화가들은 뉴린파 (NewlynSchool)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따져보면 랭글리가 그 시작인 셈입니다.

 

랭글리의 작품은 당대 좌파라고 분류되었습니다. 그의 친구 중에는 빅토리아 시대 좌익을 담당했던 사회주의 노동당의 당원도 있었지만 랭글리 자신이 끝없이 가난이 계속되는 노동자 계층에 대한 연민을 기록해야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1889년 그의 작품은 기록적으로 팔려 나갔습니다. 그 해 그가 판매한 작품의 총액은 요즘 환율로 계산하면 1억 원쯤 되니까 대단한 기록이지요. 그러나 평론가들로부터는 관심을 끌지 못했는데 그의 작품이 주로 수채화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랭글리는 유화에도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890년 대에 접어들면서 랭글리도 유화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명성이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아름답고 진정한 예술작품으로 랭글리의 작품을 꼽았습니다. 1895년에는 우피치 미술관에 그의 초상화가 걸렸습니다. 당시 우피치 미술관에는 렘브란트, 루벤스와 같은 대가들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는데 랭글리의 것도 자리를 잡게 되었으니까 그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말년이 되면서 랭글리의 주제는 가족으로 바뀝니다. 특히 모성에 대한 것이 그의 주요 관심이었습니다. 1900년 이후 홀랜드와 벨기에를 방문합니다. 초기 랭글리는 섬세한 표정의 수채화를 큰 규모로 즐겨 그렸는데 홀란드 화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었습니다. 말년에 그 곳을 찾은 것이죠. 1910년대에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여러 상도 받게 됩니다.

 

1차 대전이 시작되자 해안가에서 이젤을 펴 놓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금지되었습니다. 전쟁 중이니까 위험했겠지요. 랭글리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미술사 최고의 수채화가라는 평가도 있고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화가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물론 주제와 기법에 따른 분류이지만 이것 저것을 다 떠나서 제가 느낀 랭글리는 그림에 눈물과 한숨담아낸 화가였습니다.

 

 

윗글 출처. 레스카페

 

 

 

 

 

 

'미술 > 서양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0) 2013.04.10
William-Adolphe Bouguereau   (0) 2013.04.10
제리코  (0) 2013.03.26
밀레  (0) 2013.03.26
구스타프 클림트 풍경화  (0) 2013.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