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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눈으로 본 현대 예술』

by 알래스카 Ⅱ 2013. 1. 11.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아무렇게나 읽어도 좋다.

이 글들은 그저 '예술'과 관련하여 곳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기록하고자 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고 경험하든 생각할 주제를 하나 택해 공부할 기회로 삼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예술적 고뇌와 실천적 삶은 한번쯤 깊이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예술가나 철학자들의 삶과 고뇌에는 개인적 생존의 기쁨과 사회적 과시의 허망함 사이에서 허우적대는 인간들에게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보려는 긍정적인 마음이 가득 담겨 있으니 말이다.

그들보다 삶의 허무를 짙게 경험했던 이도, 삶의 에너지를 힘차게 폭발시킨 이도 없다.

 

- 머리말 중에서

 

 

 

 

철학의 눈으로 본 현대 예술

 

 

 

PART 1 우리 시대의 시각 예술 Contemporary Visual Arts

 

 

ㆍ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앤디 워홀, 현대 미술의 영원한 아이콘

▲ 〈도판〉앤디 워홀,‘ 달러 사인’, 실크 스크린, 1981, 필라델 피아 앤디워홀미술관 소장

 

 

‘오리지널과 복제품’, ‘순수예술과 상업예술’, ‘화가와 비평가 그리고 관객’ 등

모든 예술 현상들의 경계면에 놓였던 앤디 워홀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그래도 앤디 워홀의 세계는 한번쯤 돌아보아야할 커다란 산이다.

그에게서 찾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의 삶이었다.

항상 자신이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이 자기가 아닌 세상의 허위로 인해 만들어진 것임을 주지시키는 듯한 워홀.

언제나 한 발짝 물러나 삶의 허무와 권태를 어루만지며 예술계의 전위를 형성했던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예술을 통해 ‘생존’의 안도감을 추구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명성과 부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비지니스 예술가’였지만,

그 기반에는 삶의 허무를 깊이 경험하고 정면으로 직시하는 용기가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ㆍ파괴적 전복의 기념비 / '지금'을 담아내는 MoMA
ㆍ미술관으로 들어온 유튜브 / 유튜브는 어디까지 진화할까?

 

 

 

보수주의자라 자처한다면, 옛 선비들이 그랬듯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완벽한 인간이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들은 구조적 변화를 꿈꾸지 않으니, 사회발전을 원한다면 내적 충만함에서 그 원동력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릇이 커지면 '새로움'의 형식을 모두 담아낼 수 있다. 이것이 그들이 지니고픈 특권에 대한 교환조건이다.

영국 하원의원 버크는 미국의 독립을 옹호했고, 영국의 식민 지배가 인도에 끼친 해악을 고발했다.

그는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내적 원리로 삼아 자국의 부도덕한 이중성을 날카롭게 꼬집었다.

 

 


ㆍ영국식 양면성과 예술 발전소 / 보수적 혁신의 길

 

밀레니엄브리지에서 본 <테이트 모던 아트 갤러리>

 

 

철거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긴 낡은 발전소 건물을 활용하기로 한 <테이트 모던>의 설립 과정에서도 이러한

보수적 혁신성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전시 주제였던 리히터 역시 회화가 지닌 양면성을 같은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재현 회화를 지키는, 아니 전통적 재현 회화의 힘을 극대화하는 보수적인 면을 보이면서,

그 안에 추상작업이 포괄됨을 입증하는 혁신을 보여준 셈이니 말이다.

영국과 테이트 모던, 리히터의 이러한 특징을 한데 모아 '긍정적 양면성'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Gerhard Richter 독일, (1932~ )

"나는 어떤 목표도, 어떤 체계도, 어떤 경향도 추구하지 않는다."

 

 

 

 

 

 

 

Singer  1965 104 cm X 74 cm Oil on canvas

 

 

woman Descending the Staircase 1965 198 cm X 128 cm Oil on canvas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 는 원리로 가장 잘 설명되는 이러한 정책 기조는 미국식 모델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과를 낳았다. 흔히 미국식 모델은 예술가들의 자유를 말하지만 종국에는 경쟁구도와 적자생존을

야기하고, 기부자의 '선의'와 소비자의 '선택'을 강조하지만 결국 소수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당양성을 막는다.

“전통을 중시하고 혁신을 지속한다”는 모순적인 말을 수백 년째 표어로 삼아 온 영국. 런던이 지닌 세계 문화

중심으로서의 위상은 이 긍정적 양면성이 꽃피운 결과물이다.

 

 


ㆍ지각적 한계에 대한 즐거운 경험 / 전문가의 붕괴

 

ㆍ‘예술’이 된 예술가의 공간 
ㆍ하늘 위의 미술관에 펼쳐진 일본 현대 미술 / 도쿄 모리 미술관
ㆍ빼앗긴 문화, 새로운 예술 / 뉴욕 디자인 미술관

 

 

 

현대인에게 식민주의는 과거의 일인 듯하다.

피식민자의 저항으로, 식민자의 자멸로 인해 슬픈 인간의 역사의 한 장은 대강 마무리되는 중이다.

하지만 빼앗겼던 땅을 되찾아 다시 밭을 갈아도 지배자에 의해 깊이 패인 상채기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지배자들은 역사적으로 왜곡된 해석을 주입하여 피지배자에게 문화적 열등감을 덧씌우고,

지배자의 힘을 동경하게 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그들을 칭송하며 자신의 것을 버린다.

오랫동안 삶과 어우러져 오던 문화는 삶과 괴리되어 껍데기만 남은 박제가 된다.

박제된 문화는 더이상 그 땅에서 밭을 가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화를 우리네 삶에서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과거에 이러이러했다'는

지식으로나 알 뿐이다. 그것도 노력을 들여야 한다.

 

우리는 보통 누군가 쥐여준 잣대로 세상을 본다.

그가 누구인지, 그 잣대의 근거가 정당한지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 기준의 비합리성과 싸우는 이들도 있지만, 대개는 편견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뜯어고칠 기운이 없다.

식민주의자들은 그 기준을 선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것이 내면으로부터 지배 관계를 고착화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등에는 가장 짙고도 깊은 낙인이 찍혔다.

인종주의에 기초한 '열등감'이라는 낙인은 아프리카에 남긴 현재진행형의 상처이다.

 

세계가 흔들린다. 부를 거머쥔 사람들이 이제 정치권력까지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 현상은 현재 후진국이나  선진국 어느 나라나 막론하고 일어나고 있다.

식민지는 사라졌지만 식민주의 구조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차별과 우열의 구조'의 내재화가 그것이다.

식민주의 계승자들은 권력자들과 결탁하여 자본주의적 우열의 잣대만으로 삶을 가늠하는 사회를 구축한다.

소리 없이 전파되는 글로벌 신新식민주의로 인해,

보통사람들은 그동안 누리던 권리를 조금씩 빼앗기며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다.

특정 이익 앞에서 국가와 민족의 경계는 껍데기일 뿐이다.

 

 

 

ㆍ미술관에서 길을 잃다 / 미술, 그리고 예술 - 뉴욕 휘트니 미술관

 

 

‘예 역시 빠르게 화석화하는 개념인 듯하다.

‘예술의 정의’ 문제에 대해 열띤 논쟁을 펼쳤던 지난 세기의 미학 이론들은 이제 사료에 가까와지고 있다.

‘이것이 왜 예술인가’ 라는 물음도 예전처럼 호기심을 자극하기 어렵고,

그 답을 얻기 위해 다양한 예술의 정의들을 조합한다고 해서 그리 쓸모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예술의 본질을 잘 모르게 된 것은 그 저변이 넓어져서 그런 것도 아니다.

영화, 게임, 만화 등 새로운 장르가 예술의 일련번호를 부여받는다고 해서 예술의 개념적 본질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며,

이 확장은 그 무언가를 담아내는 형식이 바뀐 것일 뿐이니 말이다.

예를 들어 미술관에서 무용가가 춤을 춘다고 해보자.

누가 보아도 그 춤은 예술이다. 그런데 그것이 미술인지 물으면 당혹스러울 것이다.

이러한 물음 은더 이상 의미 있는 답변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예술과 미술을 구분하려는 시도가 부질없음을, 언어의 문제에 불과함을,

나아가 지금의 세계에서 어떤 개념적 대상을 정의하는 게 쉽지 않음을 암시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PART 2 과거의 시각 예술과 예술의 확장 Historical Visual Arts and New Arts


· 슬픈 웃음 / 비극적 삶의 무기 - 표현의 자유와 풍자

· 젊음과 자기 성찰 / 로스앤젤레스 게티 빌라 - 자기를 돌보아야 한다
ㆍ삶과 비극, 그리고 예술 / 삶과 비극
ㆍ인간적 교류의 접경지대 - 샌디에이고 미술관

· 바르셀로나 대 마드리드 - 축구와 스페인 현대사
ㆍ주관적인 맛, 객관적인 미 / 일상의 이면을 전시하기 - 그 그늘에 대하여
ㆍ스러져 가는 산업 도시의 건축 /버펄로 다윈 D. 마틴 주택 단지 - 장밋빛 과거와 회색빛 미래
ㆍ유리의 모든 것 - 코닝 유리 박물관
ㆍ‘논란’으로 보는 사진의 역사 / 진실과 믿음, 그리고 가치 - 빈 쿤스트하우스
ㆍ과거에 담긴 교훈 / 세상에서 제일 큰 사진

·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까?
ㆍ지음, 서로를 알아보다 / 도쿄 21 - 21 디자인 사이트


PART 3 공연 예술과 축제 Performing Arts and Festival


ㆍ한 강소强小 오케스트라의 1년 - 버펄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ㆍ두 바이올리니스트 / 상흔의 치유 - 로멜 조제프와 DBR - 아이티의 미국인 대사 

ㆍ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여름 / 블러섬 페스티벌 - 한 마리 ‘등에’ - 소크라테스의 삶

 

 

사람들은 자기가 나고 자란 곳을, 자기가 속한 나라를 사랑한다고, 또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투철한 이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행위만을 애국 애향 애족 애교의 모범으로 삼고

모두가 그 길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을 강제하는 것도 모자라, 그 모범과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는 이들을 단죄하고 물리적으로 탄압한다.

그들에게는 정녕 '애국의 길'은 무엇이며, 도대체 '애국심'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예로부터 무언가의 본질을 묻는 철학자들은 권력자들에게 성가신 존재였다.

소크라테스가 스스로의 죄 없음을 변론해야 했던 이유도 사실은 아테네 권력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테네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아테네가 믿는 신을 믿지 않는다' 는 죄목으로 법정에 섰다.

이 죄목을 곰곰히 뜯어보면, 소크라테스가 세상이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가치를 곱씹어,

젊은이들 스스로의 힘으로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을 분별하도록 일깨웠으며,

그 사유와 고찰의 대상에 신에까지 이르렀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ㆍ저항과 상상력 ― 록 음악과 사이언스 픽션

ㆍ라스베이거스의 역설 / 태양의 서커스 - 라스베이거스에 가다
ㆍ다음 세대 예술가들을 위하여 / 뉴욕 고담 아트 익스체인지
ㆍ새로운 창조의 고통 / 시카고 조프리 발레단
ㆍ보다 좋은 삶을 향해 / 댈러스 예술 구역 
ㆍ예술가와 후원자 / 소살리토 아트 페스티벌
ㆍ시간을 걷는다 / 토론토 ‘뉘 블랑슈’ 축제
ㆍ시간의 시작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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