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 술에 취해 꽃밭에 누운 선승

2012. 11. 8. 23:33책 · 펌글 · 자료/종교

 

 

 

『경허』 책을 다시 봅니다.

얼마전에 경허선사 100주기 기념 논문(윤창화-불교평론)으로 시끌벅적했었죠.

지금 검색을 해보니까 경허선사에 대해서 쓴 책이 꽤 있었네요.

그런데 이 경허선사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입니다.

근거로 제시하는 팩트라는 것 자체마져도 그 실재 여부와 정확성이 다 확실치가 않습니다.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부정해버리자니 경허에 대해서 남아 있는 게 아무것도 없게 생겼고….

사실 세세한 팩트가 뭐냐는 것은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겠지요.

뭐, 그럴 수도 있고, 또 그러면 어떠냐, 그렇다고 치고,, 할 수도 있고,, 

아니, 그러면 안되지, 할 수도 있고…,,

제 생각에는 꼭 어느 한쪽 편을 들어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오히려 경허선사보다도 만공선사에 대해서 의심이 많이 듭니다.

‘술에 취해 꽃밭에 누워서 한 세상 신나게 놀다 간 경허’ ,,

자, 일단 어떤 책인지 한번 봅시다.

 

 

X X X

 

 

禪의 탐구자들은 소문에 의해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이 책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경허를 둘러싼 진부한 소문에 관심 있는 독자들을 위한 책이아니라

오직 경허의 禪과 인생을 알고자 하는 소수의 독자만을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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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友人 (벗과 작별하며) / 경허스님

석주(石州) 땅 三월 산루(山樓)에 오르느니
살구꽃 복사꽃 만발하고 시냇물 흐르네
이제 한번 헤어지면 그대와 나 하늘 끝의 나그네 되리니
눈앞의 풍물에 슬픔이 배나 더하는구나

石州三月上山樓  桃杏花開挾澗流
一別天涯俱是客  眼前風物倍生愁 

 

 

X X X

 

 

무릇 글이 경전이 아니며 경전이 부처가 아니다.

도를 설하는 자가 바로 경이며

도를 깨달은 자가 바로 부처이다.   - 월인석보(月印釋譜)

 

 

이 생애 다하도록 차라리 바보가 되어 지낼지언정

문자에 매이지 않고 조사의 도를 닦아 삼계를 벗어나리라.  - 경허스님

 

 

초기의 경허처럼 禪의 달인들은 대부분 교학에 전념하던 경력을 갖고 있다.

저 위대한 백장도, 남전도, 임제도 모두 1급 불교사상가로서의 경력을 갖고 있다.

경전을 읽는 자신의 內心自證이 없거나 또는 경전 이해를 위한 자기 준거가 확립되지 않으면

결국 경전과 언구의 노예가 되고 만다.

인간이 사상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인간을 부리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화두는 공안(公案)이라는 명칭과 혼용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의미가 다르다.

즉 '조사스님들이 가르쳐보인 바를 공안이라고 한다'고 정의되는 공안은 선사와 제자의 선문답이다.

선사들의 행동도 하나의 공안이다. 그러므로 1700공안으로 불리우듯 매우 많을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화두란 공안이 이루어지는 선문답의 요점이다.

그러므로 화두는 선사의 답이 화두로 많이 사용되는데,

간화선(看話禪)이란 바로 화두를 참구하는 선수행 방식을 말한다.

화두는 견성을 제1차 목표로 삼는 간화선의 대명제이다.

이 화두를 타파, 해결하는 것을 선문에서는 조사관(祖師關)을 뚫었다고 말한다.

 

 

X X X

 

 

현대의 대한불교 조계종이 성립되기까지는 현대 한국선의 중흥조라고 불리는 경허 성우선사의 투철한 선체험과

활동이 근 현대 한국 禪家에 새로운 활력이 되었다.

수월 음관

남전 한규

만공 월면

혜월 혜명

한암 중원

동산 혜일

춘성 창림

금오 태전

전강 대우

향곡 혜림

경봉 원광

은 모두 경허의 문하에서 직접 수학하고 깨달음을 얻은 선사이거나 그들의 제자, 또는 경허선사를 사숙한 인물들이다.

 

 

X X X

 

 

경허선의 본질과 관련하여, 선은 막연한 이해나 신비주의 적 이해를 철저히 배제하고

선은 자기 응시를 통한 해탈의 도임을 강조하는 경허의 입장이다.

"부처님께서 법을 전하실 때, 모든 제자들이 화현으로 거듭 오셨으니 가섭과 아난 같은 분들의 수가 한이 없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전한 것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 한 사람에게 일대교주를 삼으려고 한 것뿐이지,

득도한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조사의 뜰을 찾았다'는 등등 염화미소를 가섭만이 깨달은 것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다.

경허의 선불교는 어떠한 사상적 권위나 지식의 집착을 벗어나서 인간의 주체적인 자기 형성을 강조한다.

즉 어떤 사상의 틀로 인간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상을 만들고 주체적인 자기 형성의 자유를 체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경허선의 본질이다.

 

 

X X X

 

 

경허는 자신의 정신적 고향, 천장암에서 보림을 행한다.

선문에서 보림이란 깨달음을 체득하여 견성한 선사가 계속 정진하여 다시는 번뇌의 티끌이 묻지 않도록

자신의 심성을 밝히는 수행을 말한다.

그 옛날 노련했던 선승은 보림의 필요성에 대해서

'납자가 비록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만약 깊이 숙성시키고 두텁게 다듬지 않으면 반드시 준폭(埈暴)을 일으키게 되어

교문(敎門)을 지키지 못하고 장차 화를 부르게 된다'고 적었다.

이미 인혹과 물혹을 물리쳐서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선승은 자신의 깨달음을 더욱 다지고 깨달음의 등불을 이어갈

선승으로서의 깊은 성찰과 고행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야만 선승의 깨달음은 결코 흠집이 나지 않는 금강석처럼 맑고 강한 지혜를 잃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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