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통감부건백서

2012. 1. 7. 16:13책 · 펌글 · 자료/종교

 

 

 

통감부건백서 (요지)

 

 

엎드려 생각컨대, 승려의 결혼을 부처님의 계율이라 하여 금한 것이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나

그것이 백 가지 법도를 유신하는 오늘날 현실에 적합지 않은 것은 말할나위도 없는 일입니다.

 

부처님의 계율에 있는 금혼은 본디 하나의 방편에 불가한 것일 뿐,

불교의 궁극의 경지와는 거리가 먼 터이니 이를 제한한들 어찌 손상됨이 있겠습니까.

거기에다 남녀 간의 욕심이란 지자 우자에 공통되는 것이어서,

만일 일생 결혼을 못하도록 금한다면 이 금혼으로 인해 폐단이 생겨서,

폐단은 자꾸 폐단을 낳아갈 것입니다.

실은 조선 승려들도 해금이낫다는것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다만 하루아침의 말로 천 년의 구습을 타파할 수가 없어서 마음 가득 의구심을 품고

해가 다 가도록 주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저는 조정의 법령으로 금혼을 해제하고자 바란 까닭에 금년 3월에 사실을 들어 전 중추원에

청원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무런 조처가 없고, 승려들의 의구심은 더욱 깊어만 가서 환속하는 승려가 많아지고,

전도가 날로 위축되어 가고 있으니 속히 금혼을 풀어 교세를 보존하는 것과 어느 쪽이 낫겠습니까.

많은 수효의 승려로 하여금 태도를 바꾸어 결혼해 애를 낳게한다면,

그것이 정치 도덕 종교계에 영향 줌이 많지 않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하여 이에 감히 소견을 개진하오니 깊이 살피신 다음에 승려의 결혼 금지 해제를

특별히 부령으로 반포하시어 대번에 천년의 누습으 타파하여 세상에 드문 치적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명치 43년 9월 일

통감 자작 마사다케(寺內正毅) 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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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해서 이 책의 저자인 김삼웅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무렵 만해에게는 일생일대의 너무 큰 '실수'를 범한다. 경술국치가 일어나던 해 3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중추원 의장 김윤식에게 '중추원 헌의서'와 '통감 테라우치에게 '통감부건백서'를 보낸 것이다.

병탄 전후의 일이다. 만해는 이 '통감부건백서'를 쓴후 불후의 명저 '조선불교유신론'의 제 14장에 편입하였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아니라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것은…

 

 

1886년 열여덟 살 입산. (속리산, 오대산, 백담사)

1904년 고향 홍성으로 돌아가 그해 12월 21일 맏아들 보국을 낳음.

1905년 백담사 주지 연곡스님을 은사로, 영제스님에 의해 수계 (계명은 奉玩, 법명은 龍雲, 법호는 萬海)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등 불교경전에 정진.

1907년 강원도 건봉사에서 처음으로 禪 수업.

          양계초의 <음빙실문집>과 세계지리 책인 <영환지략>을 읽고 러시아 브라디보스톡行

1908년 유점사에서 화엄경을, 건봉사에서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료.

1908년 渡日. 일본 曺洞宗 종무원 방문. 대표 弘津說三과 친교.

          조동종 대학 6개월 공부. 최린 등과 교우.

 

1908년 조선 승려 52인은 원흥사에서 전국 사찰 대표자회의를 열어 圓宗 종무원을 설립하고 이회광을 종정으로 추대.

          일본에 건너간 이회광은 조동종 대표 弘津說三과 '조선의 단종사원은 일본의 조동종과 완전 영구히 연합한다'는

          7개 조항의 합의를 맺음.

 

          여기에 만해는 박한영 진진은 김종래 등과 더불어 송광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열고 새롭게 임제종을 창립하여

          임제종 종무원장에 추대되었다.

 

1911년 송광사 승려대회 한일불교동맹조약 파기 성공.

1910년~13년 「조선불교유신론」 탈고 및 출판

 

 

 

자, 여까지만 놓고 보십시다.

 

 

입산해서 탁발도 다니고 불목하니처럼 지냈다곤 해도 

한학에 대한 기본 바탕이 돼있는데다가 머리가 워낙에 뛰어나니까 성취가 남달리 빨랐을 것이긴 한데,

그렇다하더라도 어쨌든 1905년에 이르러, 28살에 수계를 받고 정식으로 스님이 된 것입니다.

반야경 화엄경을 수료하고 禪 수업을 처음 시작한 것이 1907년~1908년이라니까

아무리 불경공부가 깊다하더라도 법력으로 치면 이제 갓 햇병아리 스님 아닙니까?

 

그런데 1908년에 일본 건너가서 일본 불교 대표 종단의 오야붕과 친교를 맺는다?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도대체 당시 조선 불교의 형편이 어느 정도였던 겁니까? 위 아래도 없고, 조직도 없는 거였습니까?

아니, 겨우 5년차 햇병아리 스님이 송광사에서 전국 승려대회를 주관하고,

임제종을 창립하고 종무원장에 추대가 될 수가 있다니요?

1910년에 저「통감부건백서」를 쓰고, 1911년에 한일불교동맹을 파기했다니까

명실공히 한국 불교의 최고 지위에 오른 게 분명합니다. 수계받고 5년, 겨우 나이 서른 둘에 말입니다.

 

이게 뭐냐면, 조선 불교가 개판이었다는 증거입니다.

중들도 개판, 절도 개판, … 제대로 갖추어진 승려조직이나 위계질서도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김삼웅님이 '만해의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하는데,

당시의 조선불교의 현실을 무시한 지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엉망진창인 상황이라면, 일본불교에 먹힐 것은 명약관화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 일단은 조선 불교의 목숨부터 살려놓고 보자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일본 불교는 비구랑 대처승이랑 구별을 두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보나마나 문란한 조선 중들인데, 재정도 틈실한 일본불교로 다 넘어가게 생겼겠지요. 

(물론 만해스님의 평소 주장이기도 합니다만...)

 

 

 

대처승에 대해서 조금만 더

 

 

이 세상 사람 전부가 부처님 제자 되겠다고 산속 절간으로 틀여박혀 목탁이나 두드리고 면벽하고 않아 있겠다면

누가 먹여살립니까? 다 굶어죽습니까?

또 모두가 비구 비구니가 된다면 인류는 멸종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나면 부처님 가르침이 무슨 소용있습니까?

- "에이~ 그럴리가 있겠느냐? 너무 질문이 극단적이도다."  ☜ 이렇게 답변하실 겁니까?

그렇지 않으면 또,

어떤 놈은 저 혼자 공부해서 해탈하겠다고 하고, 어떤 놈은 그 뒷돈이나 대주고..... 등신입니까?

- 그러니깐 애초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만해스님이 주장하시는 바도 바로 그것이구요.

대처승이 옳습니다. 일반사람들과 똑같이 노동하고 똑같이 어울려 사는게 정상입니다.

예전에 야학(夜學)이라는 게 있었잖습니까? 대학생들이 저녁에 아이들 모아놓고 무료로 가르치는 것.

불교나 기독교나, 다 그런 식으로 생활종교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문 직업인으로 할 일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