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29. 18:49ㆍ책 · 펌글 · 자료/종교
붓다를 죽인 부처인물과사상사 | 2011.10.22
|
1. 사유의 주체
업(業)이라는 말은 행위라는 것입니다. 몸으로 하는 행위, 입으로 하는 행위, 마음으로 하는 행위 세 가지를 통틀어서
행위라고 얘기하죠. 이걸 身, 口, 意, 三業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내 삶은 규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현재 내가 어떻게
행위하느냐에 따라 현재의 삶, 혹은 미래의 삶이 좌우된다고 얘기를 하는 거죠.
내 삶은 누가 주거나 누가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주체이며 창조자라는 겁니다. 즉 도둑질을 하면 도둑놈이
된다는 말입니다. 도둑놈이 원래 있어서 도둑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조상 대대로 양반이엇다고 해도 지금 여기서
도둑질을 하면 바로 도둑놈의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조상 대대로 도둑질을했다 하더라도 지금 내가 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도둑놈의 삶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주체적으로 창조해가는 현장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지금 여기'라는 겁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내가 도둑놈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면 도둑놈의 삶이 되는 것이고, 부처님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부처님의 삶이된다는 것
이죠.
2. 여성차별
인류의 탈자본주의적 해방의 등불인 마르크스도 자신이 속했던 지역과 사회의 한계를 처음부터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하였듯,
인류의 궁극적 해방의 길을 열어준 중생의 영원한 스승 붓다 역시 자신이 속하는 사회의 관습과 규칙들이 일부 몸에 배기도
하고, 일부는 어쩔 수 없이 무시하지 못하기도 했다.
부정적인 여성관은 붓다의 기본적인 세계관이나 종교적 실찬론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세계가 空하고 모든 현상이 사막의 신
기루와 같은 무명에 가림 우리 인식의 산물이라면 과연 남성과 여성이 따로 존재할 리가 있겠는가? 남성 수행자가 어떤 인식
의 대상을 '여성'이라고 분류하고 그 대상을 성애화하여 자신의 성적 욕망을 투영한다면, 그건 아직 지계(持戒)와 정진을 통해
욕망의 업을 끊지 못한 그 남성 수행자의 자격 문제이지 결코 '욕망의 덩어리인 여성'의 문제가 될 수 없다.
붓다의 신성한 이름을 보호막으로 삼아 불교 교단 안의 남성 우월주의자들이 그 '태생적인' 기득권을 여태까지 신주단지처럼
지켜온 것은 불교의 부끄러운 역사이다. 남녀를 구별하는 식이 분별심을 일으키는 사람이라면 몸이 굳어지도록 수행을 해도
열반을얻을 수 없다는것, 그리고 굳이 불교의 비폭력성과 자비는 차라리 '여성성'이라는 것이다.
3. 기도빨. 六神通
어떤 장애와 허공일지라도 마으대로 통과하고 다닐 수 있으며, 몸을 몇 개로 나눈 수 있는 神足通,
지은 업에 따라 미래 중생들이 죽ㅇ서 가게 될 곳 등 모든 세계를 볼 수 있는 天眼通,
보통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세간 · 천상의 모든 소리를 남김없이 듣는 능력인 天耳通,
자신보다 법력이 높은 존재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이나 신, 짐승 등의 일체중생의 마음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他心通,
자신과 다른 사람의 과거와 그 생존의 상태를 아는 宿命通,
그리고 마지막으로 번뇌를 모두 끊어서 두 번 다시 미혹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게 되는 상태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계들을 다 초월할 수 있는 누진통(漏盡通).
누진통을 얻기에는 아라한 이상의 수행이 필요하지만
앞에서의 다섯 가지 신통한 힘을 꼭 붓다나 그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뿐만 아니라
수행의 경험이 어느 정도 돼 있는 어떤 사람도,
심지어 불교를 배척하는 도인들까지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불교 경전들이 '현세의 사실'인 것처럼 말한다.
여기에 대해 지눌은
"육신통을 바라지 말라, 이것은 성인의 지엽일 뿐이다.
신통의 지혜는 불심을 바로 믿는 법의 힘에 따라 더욱 수행하여 공을 쌓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4. 계율과 호국불교
한국불교하면 일반적으로 호국불교라고 얘기하잖아요.
불교가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제 구실을 해왔다기보다 국가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보호하는 구실을 하는 불교로
살아온 셈이죠. 그것이 한마디로 호국불교라는 이름으로 정리가 된 것이고요. 이것이 한국 불교사에서는 원광 법사의
세속오계라든가 서산대사 사명대사의 승병 활동 등으로 이어지며 한국 불교의 자랑스런 전통으로 얘기되어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주 적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당연히 출가 수행자나 불교인도 이 나라의 국민이기 때문에 병역 의무를
하는 게 옳다, 정당하다는 논리와 주장, 인식이 일반화되어 있는것이 현실입니다. 국가주의의 발로로 일어나는 전쟁이
얼마나 비불교적인 것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매우 빈약합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개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폭력 등과 같은 문제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는 움직임이 출가
수행자들 사이에서 공식적으로 심각하게 다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죠.
5. 불교와 자본주의
세계관 문제까지는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쨌든 오늘날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것이 자본주의라고 한다면, 자본주의
라는 것은 인간 개개인들이 '더 많이 갖고 싶다, 더 즐거워지고 싶다, 소유 욕구가 충족되는 것이 행복이다, 그러므로
소유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발전해야한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사회를 말하는 거잖아요. 즉 인간의 욕구
를 정당화시키고 욕구를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도록 유도하는 게 자본주의적 삶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게 자본주의적 삶이라면 이는 철저히 非불교적이고 反불교적 삶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불교인들은 자본주의
적 삶에 대한 심각한 성찰과 비판, 저항을 당연히 해야하고, 여기에 대안으로서 연기적 세계관이나 무아의 철학으로
삶을 바꿔갈 수 있는 구체적인 모범사례를 보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6. 불교와 국가 / 불교와 사회주의
7. 조계종단
지금 조계종단은 국가가틀을 지운 '국민적 질서'에 안주하며 사찰의 경제적인 문제들을 기복적인 의레와 유산층의
기부 등 각종 자본과의 긴밀한 관계 유지를 통해 해결하고 있다. 조계종단과 같은 '주류'종단들은 송나라의 귀족적
인 간화선을 내세워 '문화자본'을 획득하는가 하면 민중의 요구들을 계속 외면할 수 있는 '수행에 전념할 필요'와
같은 명분을 얻기도 한다.
불교가 보살펴야 할 중생, 즉 노동자나 영세민들이 신자유주의적 경제논리에 의해 무한경쟁의 지옥에 떨어져 신음
해도, '용맹정진'을 내세우는 주요 종단들의 원로나 중진들에게는 별 관계없는 일에 불과하다. 일단 "무엇보다 먼저
깨쳐야 된다"는 이유 때문이란다.
붓다가 설한 자비의 윤리를 상대화하고 대신 송나라 귀족 승려들의 '영적인 유희'를 절대화한 오늘날의 종단 불교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나는 없다고 본다. 지금 전쟁과 경쟁의 나락으로 이끌려가는 사회에 필요한 것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와 같은 법어가 아니라 "모든 산 것들이여, 편안하라, 안락하라"는 적극적인 대타적 원력(對他的 願力)
이 필요하다.
수행 원리로서 선(禪)은 필요하지만, 불자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비회된 깨달은이 아니라 모든 중생의 행복이다. 화석
화한 전통과 무관하게 붓다의 원리 원칙과 초기 불교의 정신에 근거해 재가자 위주의 새로운 민중적 불교를 백지 상태
에서 새롭게 건설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짐이 될 뿐인 전통들을 폐기해야 살아 숨 쉬는 불교로 거듭 날 수 있다.
'책 · 펌글 · 자료 >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교공부 (지관스님) (0) | 2012.01.07 |
---|---|
서로 다른 시각의 <만해 한용운 평전> (0) | 2012.01.05 |
<華嚴一乘法界圖> (0) | 2011.12.21 |
소염시(小艶詩) (0) | 2011.11.16 |
십자군 이야기 (0) | 2011.11.10 |